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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연필 Feb 28. 2017

이성적인 사람들의 시선

사실은 힘든 사람들의 시선

중학교 2학년 또는 3학년. 쉬는 시간에 게임 이야기를 하다 말고 뜬금없이 자기의 용돈 외 수입에 대해 말하는 친구의 이야기에 놀랐다. 중학생인데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하루에 2시간이면 된다는 이야기. 스스로 목돈을 벌 수 있는 정보였다. 해볼까 하는 생각이 끝나는 시점, 친구가 나를 보더니 말했다.


"사장님이 아르바이트 한 명 더 구하는데 너도 할래?"


10만 원이 넘는 금액. 용돈이 훨씬 넘는 금액. 충분한 유혹이고 당연히 넘어갔다. 학교가 끝나고 친구랑 함께 들린 곳은 평소 자주 가던 떡볶이 집에서 2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이었던 월계역. 그 역으로 가기 전 두 갈래길 사이에 자리 잡았던 신문 집은, 내가 놀던 곳에 있다는 익숙함에 사장님이 더 잘해주실 거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너는 어디 살아?"

"인덕대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나오는 아파트요"

"이거 빠지면 큰 일 난다."

"네"


생각보다 간단한 질문 몇 개로 나는 채용됐다. 친구에게는 너가 끝나는 날까지 길을 확실히 알려주라고 당부했다. 그 질문을 통해 친구가 그만두는 것을 알게 됐고, 같이 하는 거 아니냐는 질문에 그냥 자기는 너무 힘들다고 그만하고 싶다고만 했다. 친구의 정보는 반은 사실이지만 반은 거짓이었다.


한 주 동안 신문을 돌려야 하는 길을 안내받았다. 곧 일이 끝나는 친구는 얼굴이 밝았고, 나도 안내받는 한 주가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새벽이라는 금기된 시간에 정식으로 활동하는 경험. 피곤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 시작하는 첫날. 확실히 달랐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그런 피곤함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함께 깰 수밖에 없던 엄마의 걱정스러운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하며 바로 일어나 화장실로 입장하게 만들었다. 잠깐 멍하게 거울을 본 뒤 찬물이 손에 닿는 순간... 내 몸은 얼어버렸고, 그 물을 얼굴에 문지르는 순간 두려움과 후회가 몰려들었다. 문 밖을 나가기도 전에 나는 내 몸과의 싸움에서 너무도 지친 상태가 됐다.


친구와 함께 했던 기억을 더듬어가며, 적었던 집 주소들을 최대한 보지 않고 무사히 배달을 마쳤다. 2시간 30분간의 노동을 하며 한 마디도 없이 기계처럼 움직였다.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교 전 기상시간까지 남은 30분을 자겠다며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예측한 시간에 집에 도착했고, 아무 말 없이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3주째가 됐을 무렵, 한계에 도달했다. 알람 소리에 바로 일어날 수 없는 몸상태가 됐다. 엄마에게 보여주던 아무렇지 않은 연기는 들통나게 됐고, 결국 엄마의 부름으로 일어나게 됐다. 더구나 초등학생이던 동생이 내 배달하는 게 궁금하다며 따라가기로 한 날이었다. 있는 힘을 짜내서 신문 집으로 출발했다.


큰 사고가 났지만 큰 사고로 가진 않았다. 그땐 웃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섬뜩한 사고였다. 월계역은 다리 밑으로 내려가면서 다시 올라가는 코스가 있는데, 올라가는 중에 동생이 뒤로 굴러 떨어졌다. 잘못하면 머리가 크게 다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동생은 후방 낙법인지 운빨 낙법인지 다친 곳 하나 없이 옷에 먼지만 털고 일어났다. 당연히 나는 미안하다며 웃고 동생은 어떻게 떨어진 걸 모르고 언덕까지 올라가냐며 어이없이 웃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미쳐가고 있구나. 동생의 무게가 줄어들었으면 큰 무게 차이로 바로 알아차려야 하는 상황인데도, 그 부족한 잠 때문에 기계처럼 페달을 밟았구나. 엄마가 이 상황을 봤더라면, 동생이 멀쩡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은 생각보다 신문배달을 오래 할 수 있게 해줬다.








힘든 경험들에 대한 질문을 받곤 했다. 무엇을 했는지 언제 했는지. 그런데 각자의 힘든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면서 웃곤 했다. 이야기의 내용상 이게 웃을 일은 아닌 것들이 대부분인데도 그랬다. 뭐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이야기하는 나를 인지하게 됐다.


단순히 시간이 지나 추억이라는 이쁜 그릇에 담긴 이야기라 그런 걸까. 또는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것을 염려한 배려의 본능일까. 다들 이야기하며 짓는 미소는 설명할 수 없는 동일함을 느끼게 해준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에 물음표를 던지면서 답을 찾다 보면, 결국엔 사람의 감정을 바라보게 된다. 이성적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현 사회의 기준에 어울리지 않는 결과들을 얻게 된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사람이 이룬 모든 것이 감정으로 시작됐다고 믿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성이라는 것은 감정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룰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성적으로'라는 표현은 생각보다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우린 어떠한 해석도 하려 하지 않은 채, 지극히 추상적인 이성적 사고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오늘도 지친다'

'오늘도 힘들다'


이런 시간들이 있다.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찾아온다. 하루가 될 수 있고, 매일매일이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설명하기에는 어디서부터 인지, 어디까지 말해줘야 하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 그런 고통들. 어쩌면 이성적인 사람이란 이런 고통을 외면하고, 보이는 이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배우들. 이를 통칭하는 걸지도 모른다. 신문배달을 하며 엄마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던 그때처럼.


힘든 이야기를 하며 미소 짓는 사람들은 그 힘들었던 경험의 감정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아 그땐 참 아프고 힘들었어'하며 인정하고,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 자체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힐링의 시간이 되는 것 같다.


내가 본 그 미소들의 설명할 수 없는 동일함이란, 아마 인정의 미소가 아닐까 싶다.


아직 고통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감추고 견디어내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실 주위를 보면 거의 대부분 이성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의 연기에는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보인다. 이들에게도 공통된 행동이 있다. 무언가를 무표정으로 응시하는 것. 많은 사람들을 살펴봤지만 대부분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뚜렷한 무엇가가 아니기에,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는 건 아닐까.


만약 그들이 내 지인이거나 친구라면 주저 없이 질문을 한다.


"요새 힘들죠?"

"힘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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