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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연필 Mar 06. 2017

마음의 문신 - 배려

잊을 수 없는 진심

21살. 실내디자인과에서 나름 노력했지만, 1학년 최종 성적은 좋지 않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수업시간을 제대로 듣지 못한 후회가 몰려오는 1년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입대를 신청했다. 내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병과가 없을까 고민하다 공병을 지원하게 됐다.


훈련소부터 자대 배치, 자대에서 이등병이 막 끝날 무렵에 한 병장으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군대에서 진행하는 여러 건물 공사들을 외부 건설업체 및 토목업체에서 진행하는데, 이를 감독하는 '감독병'에 대한 제의였다.


고통스러운 고민의 시간들이 다가왔다. 평소 튀지 않게 잘 따라서인지 선임들의 신뢰를 받았었고, 각자 자신들의 그룹으로 데려가려 했었다. 이런 와중에 감독병을 선택하는 순간. 흔히 말하는 왕따가 되기 쉬운 아주 불편한 직책이었다.


감독병은 일과시간에도 공사 일정이 있으면 공사현장으로 나가서 공사감독을 해야 했고, 업체 관계자분들과 사제 음식이라 불리는 군대 밖 음식을 취식하는 일이 잦았기에 소대원들이 배척하고 싫어할 이유가 너무나 명백했다. 감독병을 계속하던 상병, 병장들의 대우를 보더라도 감독병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분명했던 건, 실내디자인과를 휴학하고 왔던 나에게 감독병은, 졸업 후 취업 시 꽤나 좋은 경험과 가산점이 될 수 있었다.


결국 감독병을 선택했다. 이후 보초를 서는 시간마다 좋게 보였던 선임들에게 각자의 성격에 맞는 감정을 듣게 됐다. 너도 꿀보직 앞에선 어쩔 수 없구나 하는 눈빛이 가장 힘들었다. 한 달 정도 그런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조금은 덜한 하루가 오고, 또 하루를 견디면서 죄인 같은 하루들을 보냈다.


어느 날, 군대 내 미뤄뒀던 공사 진행을 위해 장기간의 파견 일정을 전달받았다. 이미 나의 소대 내 입지는 명백했기에 그 누구도 특별한 반응을 하지 않았다. 소대원들의 몸짓과 농담엔 비아냥 뿐이었다. 아 너는 그냥 또 나가는구나. 이번엔 아예 나가서 자는구나.


파견을 가는 당일 아침. 주말이면 함께 농구를 하는 선임이 청소 중인 나를 불렀다. 이등병 때부터 나에게 잘해줬던 몇 안 되는 선임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 관물함에서 물건을 다 뺀 후, 필요한 품목들을 하나 둘 직접 배낭에 넣었다. 나는 이등병이나 일병보다 큰 차이가 없는 B급 품목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들을 자신이 가진 최상급 품목들로 바꿔서 넣었다. 그리고 특유의 투덜대는 말투로 말했다.


"너가 지금 청소할 때냐? 안 챙겨준다고 가만히 있냐 병신처럼? 이런 거 미리미리 챙겨 놨어야 될꺼아니야. 상병 달더니 빠졌냐?"

"아닙니다"


기계처럼 대답하고 남은 품목을 직접 넣으려 했지만, 그는 시간 없으니까 군화 광이나 내라 했다. 바로 나가 군화를 찾아 광을 내기 시작했다. 다들 아침 청소 후 일과 시작 전이라 밖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부족한 잠을 걸터 누워서 자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잘 이겨냈던 감정들이 뜨끈한 온도를 품고 눈으로 올라왔다. 순간, 누군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다행히 그 감정들을 눌러 막았다. 그런데도 전부는 막지 못했다. 그래도 아침 바람에 충분히 마를 수 있는 양이었다. 좌우를 살펴가며 빠른 속도로 군화에 광을 냈다. 불안함에 다시 좌우를 살폈다. 다시 광을 냈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을 찾게 될 때 기억난다.


그 사람을 찾지 않는다면 그 이름은 점점 희미해지고, 점점 지워져 간다. 인간의 두뇌는 이런 식으로 사람의 기억을 관리한다. 우리는 두뇌의 지배하에 움직이고 관리된다.


그런 두뇌가 특별하게 만들어 놓은 저장공간이 있다면 바로 마음이다. 이 마음이라는 저장공간은 감정을 동반한 기억들만 선별해서 넣어둔다. 그리고 이 공간에 있는 것들은 평생에 한 번을 찾지 않더라도, 언제나 기억할 수 있도록 그 내용이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마음에 새긴 문신처럼



배려. 이것이 그 특별한 저장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하고부터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게 됐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의미있고 좋은 기억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좋은 사람이고 싶으니까.

그런 이유로 나는 계속 배려라는 것을 했었다.


그런데 정말 힘들어서 버틸 수 없던 어느 날, 날 배려해 줬던 누군가의 이름과 그 장면. 날씨, 온도, 공기의 소리까지 기억하는 날 발견하고부터 배려의 의미가 달라졌다. 조금 더 나아가 마음의 문신을 남기는 모든 나의 기록에 대해서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게 됐다.


도시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지쳐있다. 그리고 외롭다. 많이 힘들어도 아닌 척하며 웃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바라본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는 행동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기억될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리고 매 순간 생각하게 된다. 삶을 편하게 해줄 돈을 준 것도 아니며, 힘든 사연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시간을 함께한 것도 아니지만, 단지 내가 보인 행동 하나가 설명할 수 없는 큰 도움이 되는 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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