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과 워라밸을 외치는 청년들에게 사회는 이런 프레임을 씌운다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가축 새끼를 ‘아지’라고 불렀다. 그래서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 도야지라는 단어가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돼지’라는 단어는 도야지의 준말로서, 돼지 새끼를 의미했다. 사실 다 자란 돼지는 ‘돌’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누군가가 돼지를 가리키며 ‘돌’이라고 말한다면, 아무도 그가 돼지를 지칭했다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돼지와 돌(stone)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돌이란 말이 사라진 이유는, 다 큰 돼지에게는 더 이상 시킬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돼지는 오직 먹기 위해 키우는 가축이었다. 돼지가 다 자란 뒤에도 계속 밥을 주는 일은 경제적 낭비였다. 일 없는 돼지는 자라자마자 잡아먹혔다. 돼지를 돼지라고 부르는 이유다. 다 큰 돼지가 ‘돌’이라고 불릴 수 있는 타이밍이 이 사회에서 사라졌다.
농경 사회에서는 소가 가장 중요한 가축이었다. 돼지와 달리 소는 몇 사람 몫의 일을 하면서도 먹이는 비용이 아주 적게 들었고, 죽은 뒤에는 농사꾼들에게 부족한 동물성 단백질을 제공해 주었다. 소의 가죽과 뿔, 등뼈 역시 수공업에 빠질 수 없는 필수 재료였다. 소가 예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졌던 이유다. 그러나 경운기와 트럭이 등장하게 되었고, 더 이상 소에게도 시킬 일이 없어졌다.
쟁기와 수레를 끌며 일하던 과거의 소는 20년 이상 살았으나, 현대의 소는 5년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 기계의 등장은 소의 영역과 수명을 단축시켰다. 일 없는 소는 자라자마자 죽게 되었다. 돼지와 같이 오직 먹기 위해 키우는 가축으로써 전락해 버린 것이다. 기능이 변하면 단어도 사라진다. '소'라는 단어는 점차 쓰이지 않고, 그 대신 소를 먹기 위해 구분하는 용어인 '한우'와 '육우' 혹은 '소고기'라는 말로 대체되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 요소 중 하나는 사람의 노동력이다. 특히 인구 고령화가 극심한 우리나라에서는 젊은이들의 노동력을 높이 요구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여러 단어들도 존재한다. '열정페이'와 '노예근성'. 제대로 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서 육체와 정신 모두 직장에 바치는 삶을 요구하는 단어다.
이제는 '워라밸'과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유행 중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과거 젊은이의 노동력이 뜨거움과 열정(passion)의 상징이었다면 이제는 쿨함과 냉정(dispassion)의 상징이 되었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쓰임과 기능이 변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열정페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는 사회는 대환영이다. 노동이 착취로 이어지는 사회가 아닌, 조금 더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로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니까. 이 단어가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청년들의 노동력이 헐값으로 취급되는 기능이 없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페이’가 아닌 ‘열정’이라는 기능이 없어질 때 발생한다. 혹여나 열정 많은 개인들이 MZ 세대라는 동일한 군중으로 불리며,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영역들이 축소되고 있진 않은지 고민해야 한다. 일할 수 있는 소가 가축으로 전락해 버린 것처럼.
소확행과 워라밸을 외치는 청년들에게, 사회는 이런 프레임을 씌운다. 불가능에 맞서지 않고 순회하여 소확행에 안착하고 있는 청년들, 더 큰 행복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소확행에 안주하는 청년들, 양질의 일을 원하지 않는 청년들. 그리고 이런 청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들은 그 대상의 사회적 쓰임에 따라 존재한다. 그 대상의 기능이 변화하면, 그 단어는 사라지게 된다. 앞선 변화들이 나와 같은 청년들에게서 대의명분, 도전과 열정, 꿈과 희망이란 단어들을 앗아가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 감정까지도 말이다. 나는 나의 행복이 대폭 축소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나의 무궁무진한 쓰임을 잃고 싶지 않다. 일 없는 청년이 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