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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이 Oct 30. 2022

제 1부


2003

뜻밖의 시작     


   엄마는 매달 받는 신장 정기검진 결과를 확인하러 온 날 어떤 조건 어도 없이 주치의로부터의 지금 당장 무조건 입원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은 지 세 시간 만에 8인실의 병실에서 격리 병동으로 이동조치 되었다. 이유는 입원 절차 때 뽑았던 혈액 수치의 결과가 병원 측으로부터 그럴만한 조치가 마땅하다는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이었고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엄마는 격리 병동으로 침상을 옮기셔야 했다. 신장 내과의에서 혈액 내과의로 순간에 바뀌어버린 담당 의사의 의학용어가 섞인 설명을 듣고 입원동의서의 보호자 확인란에 내 이름 석 자를 적어 넣었다.      

   입원을 한 날은 불행히도 금요일 오후여서 정확한 결과는 월요일에나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알고 지내 온 지식과 그리고 단 몇 시간 동안의 검색으로 지금 엄마를 입원하게 만든 원인이 소설 속에서나 보았던 백혈병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속에 48시간 동안을 안절부절못하면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조차도 잊어버릴 정도로 보내버렸던 것 같다. 결국, 의사의 진단결과를 들어야 하는 시간이 잡혔고 그 사실을 알아야 할 마땅한 사람들, 아버지, 오빠, 형부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은 다 같이 함께 지나가기에는 약간 비좁아 보이는 혈액 내과라고 알리는 표시가 된 복도를 지나서 낯선 문 앞에 서 있었다. 지금 우리가 만나 보아야 할 의사의 특기임을 알려주고 언제나 따라다니는 수식어 정도로 보이는 ‘혈액종양내과 000 교수’라는 팻말을 뚜렷하게 확인하고서야 문이 반쯤 열려 있는 성인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기에는 벅찬 진료실로 들어갔다. 혈액종양내과, 혈액종양내과……. 이 단어는 내 머릿속에 각인처럼 박혀버렸고 의사의 설명을 듣기도 전에 이미 내 몸 전체는 땅속으로 꺼져버린 느낌마저 들었다.      

   나란히 앉은 우리와 마주 앉은 혈액종양내과 전문의, 그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무척 미안해하는 표정의 신장내과 엄마의 주치의도 함께 와 있었다.      


   “보세요. 초록색으로 써진 글씨는 정상수치를 말하는 것이고 붉은색으로 나타나는 글씨는 현재 환자의 상태를 말해주는 비교치입니다. 전부 다 빨간색이에요. 정상적인 수치가 단 한 개도 없습니다. 환자분은 백혈병입니다.”     


   백혈병입니다. 백혈병입니다. 백혈병입니다……. 내 머릿속에서는 단 이 세 단어만이 들릴 뿐 더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명백히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판사로부터 ‘피고인 살인죄’라고 선고받은 것처럼 판사의 나무망치로 땅! 땅! 땅! 머리를 세게 얻어맞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의사는 의학적 지식과 객관적으로 드러난 결과에 따라 엄마에게 사형과도 맞먹는 ‘시한부 3개월’을 선고하고 그 뒤에 있게 될 모든 책임을 어떤 식으로 질 것인지를 우리에게 물어보고 있었고 어쨌든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쉽게 이야기를 해 보자면 그런 식이었다. 나는 꼭 지금 부산을 내려가야 하는 데 걸어갈 것인지, 버스를 타고 갈 것인지, 비행기를 타고 갈 것인지를 생각해 볼 시간을 그날 오후까지 준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살인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그 죗값을 치러야만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것이고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의 몸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아버지는 엄마가 누워있던 이동 침대가 환자 수송용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양쪽으로 서서히 닫혀버리는 문과 동시에 함께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리셨다. 나는 사실 그 순간에도 내가 꿈속에서 있는 것인지 슬픈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정신상태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 닫혀버리는 승강기의 문 앞에 주저앉아 버린 아버지를 일으킬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럴만한 것이었다.      

   오빠는 구급차 운전기사의 조수석에 앉았고, 나와 아버지는 엄마가 누워있는 환자 수송 칸을 함께 타고 목적지로 정해진 곳까지 이동했다. 그 와중에도 의료진은 엄마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했고 팔뚝에 꽂혀 있는 바늘을 고정한 흰 반창코와 주렁주렁 엉켜있는 수액 줄은 단 며칠 사이 만에 엄마를 그야말로 중증환자로 만들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에 이번 달 신장내과 정기검진을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신장내과의 처방대로 트윈스타 한 알을 먹음으로써 몸의 모든 기능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혈액검사의 모든 결과가 기계 장치에 불과한 모니터 화면에 단지 붉은색의 비정상 수치로 나타나게 되면서부터 엄마 몸의 권위자는 혈액종양내과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엄마는 중증환자가 되었다는 이런 아이러니한 생각들이 드는 것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야만 한다는 사실만이 나를 어두운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을 뿐이었다.     

도착     


   점심시간 이전에 출발한 우리는 해가 한창 달궈진 오후 두 시경이 되어서야 목적지로 정한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구급차의 환자 수송 칸 출입문이 올라가자 마음껏 열을 받은 태양은 눈도 뜨지 못하도록 우리를 맞이해 주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어렴풋이나마 지난 며칠 동안의 암울했던 공포의 시간 속에서 앞으로 우리가 지나가야 할 미래에 비춰주는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구나 생각을 하였지만, 응급실 자동문 출입구 근처에서 우리를 데려다주었던 구급차가 이제 자신의 역할은 거기까지라는 듯이 오는 내내 밝혀온 경광등을 꺼버리고 우리가 함께 들어왔던 병원출입문을 성급히 뒤돌아 나가는 뒷모습 속에서 이제는 무엇에게 의지를 해야 할 것인지를 낯선 장소에서나 맛볼 수 있는 무지함에서 오는 또 다른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엄마가 누워있는 이동식 철제 침대의 난간에는 붙어있던 ‘격리환자’의 붉은색 푯말은 앞으로 이 병원에서 환자로서의 엄마의 직위를 알려주고 온갖 질병의 온상인 무질서한 응급실에서조차도 엄연한 나만의 구역이 있다는 것을 마치 과시라도 하는 듯 하얀색 커튼으로 임시 칸막이가 되어 있는 구석진 자리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엄마가 이 병원으로 옮겨와서 가장 먼저 부여받은 등급, 그건 마치 귀족사회에서의 상위 계급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우리가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있자마자 숙련된 솜씨의 간호사가 엄마에게로 다가와 몇 가지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고서 허리춤에 꽂혀 있던 주사기를 꺼내 들고 그녀만의 직업에서 오는 습관처럼 보이는 행동 - 엄지와 중지를 이용하여 바늘 끝을 한번 튕기더니 피스톤을 끝까지 잡아당겨 검붉은 피를 한가득 뽑아내 갔다. 거기에 있는 우리는 모두 전에 있던 병원에서 나온 아침 급식을 시늉으로만 먹는 척을 하셨던 엄마를 제외하고는 온종일 무엇도 입에 댄 적이 없었지만, 엄마가 어서들 밥을 먹고 오라는 엄마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눈을 돌리고 침대 시트식의 커튼 너머로 보이는 맞은편 침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 한 분을 발견했다. 자녀쯤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옷에 누런 똥을 싼 할아버지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닦아 내고 있었지만, 그 주위를 왔다 갔다는 하는 의사들과 간호사들, 그 밖의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와 관련된 사람들일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누구도 나처럼 그 광경을 보고 신기해하거나 놀라워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건 마치 갓난아기의 기저귀를 봐주는 아기 엄마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누구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것과 같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오직 나의 시선과 후각과 청각만이 유난스럽게 호들갑을 떨 뿐이었다. 나도 점점 저런 상황에 익숙해져서 여기에 있는 사람들처럼 변해갈 수 있을까. 하물며 나에게는 응급실은 처음이었으므로 모든 상황이 낯설고 어설프게만 보일 뿐이었다.      

   또 그렇게 얼마 동안이나 지나갔는지도 모를 복잡한 상황들이 매초 바뀌어 가면서 그렇게 언제까지 속절없이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시간이 흘러간 것이었을까. 초여름 날씨임에도 발끝까지를 온전히 무릎 담요를 덮은 한 아이가 휠체어를 타고 뒤에서 밀어주는 간호사와 함께 우리가 차지하고 있던 그 공간, 응급 실내에서의 가장 수준 높은 자리로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들어 오고 있었다. 그것은 나는 내 자리쯤은 이제 눈을 감고서라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이 공간의 지리에는 능통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은 익숙함에서 오는 안정감이 묻어나는 행동이었고 또한 나는 환자로서, 그 병원의 명패가 반복적으로 써진 환자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이 병원에서의 직위가 누구의 안내 없이도 스스로 내 자리쯤은 찾아갈 수 있다는 식의 최소한, 이 정도쯤은 된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이가 엄마가 누워 계신 바로 옆 침대를 조심조심 올라가는 동안 헐렁헐렁한 환자복 바지 끝으로 보이는 깡마른 새하얀 종아리를 보고서야 그 아이의 계급쯤으로 보이는 직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병원을 입원하고 퇴원한 횟수와 이 병원을 들락거린 지가 최소한 몇 년 차가 되었는지를.      

   그런데 아이가 침대에 눕고 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일어나 앉아서는 심각하게 푹 꺼진 눈꺼풀 탓에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동그란 두 눈에서 소리도 없이 말 그대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갑자기 다급해진 생각에 내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가를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간호사를 불러 달라고 했다. 간호사는 능숙하게 환자복 상의의 단추를 두 개 푸르고 그 아이의 쇄골절흔 약간 좌측 아래에 달린 미색이 도는 조그만 플라스틱 네모난 상자에다 엄마에게서 빼간 피의 두 배 되는 양의 약물을 주입했다. 아이는 불과 2분이 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마치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다는 것을 표정과 행동으로 말해주고 있었고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급하게 그렇게 모르핀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우리를 친근한 표정으로 잠깐 살피는가 싶더니 자기는 오늘 저녁에는 이 병원의 꼭대기, 마치 요새와도 같은 곳, 무균 병동으로 올라갈 거라고 말했다. 엄마를 말하는 것인지 아줌마도 곧 병상이 비게 되면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정말로 해가 느릿느릿 빌딩 사이를 하강하며 누런 불길을 토해내고 있을 때 그 아이는 타고 들어왔던 휠체어를 타고 응급실을 나갔다. 곧 만나게 될 거라고 하면서.     

   우리 – 엄마, 아버지, 오빠와 나는 낮과 밤의 구별처럼 시간의 경계가 명백할 수 없는 생과 사의 순간이 뒤엉킨 응급실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고 혈액검사 결과를 들고 온 회진 의사로부터 오전 중으로 무균 병동 침상이 한 개 비게 되어 곧 그곳으로 올라가게 될 것을 통보받았다. 그렇게 응급실에서 만 하루 동안만을 대기하고 무균 병동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운이 좋은 편이라는 것을 그때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균병동     


   환자수송용 승강기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왕래하는 로비 중앙에 위치하지 않았고 조금은 복잡한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쳐야만 찾을 수 있는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가 누워 있는 침대를 미는 사무원 둘, 인수인계가 목적인 연락책쯤으로 보이는 간호사 한 명, 그리고 아버지와 오빠와 내가 한꺼번에 같은 공간속으로 들어갔고 사무원 중 한 사람이 버튼의 12라는 숫자를 눌러 주황색 불이 들어오자 기계적인 힘에 이끌려 내 몸이 부유하는 기분이 들면서 우리는 그 엄마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침상이 있는 무균병동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내부는 별다른 장식이나 홍보전단 한 장 붙어 있지 않았었고 회색빛의 금속 재질의 벽은 큐브 모양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건대, 그곳은 분명히 죽은 자의 시신도 이동하는 승강기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살고자 했던 자는 태우고 올라갔을 것이고 죽은 자는 실어 내려주는 그런 원초적인 임무가 수행되는 공간, 나는 응급실을 나오자마자 이 환자 수송용 승강기야 말로 생과 사가 공존하는 이 병원만의 독보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승강기의 문이 열리고 사무원이 능숙한 솜씨로 침대를 밖으로 밀어냈다. 우리들도 당연히 따라 내렸고 함께 올라 온 간호사는 검은색 차트를 오른쪽 옆구리에 끼운 채로 자동문의 버튼을 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B동이라고 써져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우리가 내린 승강기 바로 옆에 등처럼 꾸며진 그래서 미세한 불빛이 켜져 있는 ‘중환자실’이라고 명확하게 써진 아래 B동의 것과 유사하게 생긴 자동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다. 몇 초가 지나갔을까 지난 며칠간의 시간을 한데 뭉쳐서 단 하루를 지낸 것처럼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나는 우리가 그 곳에서 얼마나 한참을 대기하고 있었는지는 감지할 수 없었다. 다만 무척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고 우리는 간호사의 안내대로 B동 안쪽으로 따라 들어갔다. ㄱ자 모양의 갈림길에서 엄마는 우리와 반대쪽으로 들어갔고 아버지와 오빠와 나는 간호사를 따라 남아 있는 나머지 길을 따라갔다.   

   

 [B동 무균병실에서의 수칙]     

 1. 환자와 보호자는 1:1 원칙

 2. 일체의 타인의 출입 및 면회 금지

 3. 간단한 필기구 외 책 등 지류 반입 금지

 4. 외부 외출 후 병실 출입 시 소독 필수 실시

 5. 병실 내 마스크 및 두건 착용 필수

 6. 기타 수시로 안내하는 수칙 준수     

※ 위 수칙은 환자의 빠른 쾌유를 위한 조치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나는 보자마자 수긍할 수 있는 조치라고 생각했다. 백혈병 환자를 위한 가장 필요한 환경 조건은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에서의 또 다른 심각한 병을 가져올 수 있는 감염을 막기 위한 청결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1:1 보호자는 나였다. 어느 누구 나를 지목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족 중의 누가 보아도 이 병간호는 내가 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나는 대학교를 마친 상태였고 그때 당시 경찰관이 되려고 공부를 하고 있던 때였다. 물론 필기시험에는 합격한 상태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엄마와 나의 그 어떤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아버지와 오빠는 이 병원을 떠나셔야 했다. 그곳에 남아 계셔도 사실 별달리 도움을 줄 수 있는 여건이 되었던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곳 아닌 이외의 모든 세계는 너무나 태연히도 정상적으로 흘러만 가고 있었기에 곧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이야, 어쩌면 이곳이 너와 엄마가 함께 보낼 수 있는 마지막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돈 때문에 엄마가 치료를 못 받을 일은 없도록 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잘 지내고 있어. 이렇게 너한테 떠 맡겨 놓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다. 금방 올게.”     


   오빠는 유난히 담담하게 말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나의 불안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 나 또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강한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이 상황의 실마리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렇게 아버지와 오빠를 떠나보냈다. 단 며칠 만에 엄마는 한치 앞을 예견할 수 없는 중증환자가 되었고 나는 그 환자를 보살펴 주어야 하는 보호자가 되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그 누구의 의지도 바람도 희망도 소용없게 만드는 컴컴한 터널속의 공포와도 같았다.      

   B병동의 수간호사는 매우 사무적인 말투와 교양 있는 태도로 말했는데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나도 곧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약간의 위로를 건네어 주기는 했지만 나는 신입 보호자 누구에게나 했을 법한 그 말에 진정성을 느끼지 못하고 매우 불안한 마음 상태로 몇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다. 엄마는 6번 침상을 차지하고 계셨다. 이 병동의 수칙대로 머리에 두건을 쓰고 마스크를 한 채로 병실에 들어서자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뜻밖의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언니! 어서 와요. 내가 안 그래도 아줌마가 오늘 내일 쯤 여기로 오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니가 병간호를 맡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무척 반가웠어요. 언니! 나는 여기 이 자리 5번이야.”     

   ‘아, 그래! 응급실에서 모르핀 주사를 연거푸 두 대나 맞고 나서야 웃음을 되찾았던 그 아이가 여기 있구나.’     

   소아암 병동으로 갔을 줄 알고 있었는데 그 애는 나와 단 두 살 차이가 났던 스물세 살 아가씨였던 것이다.      

APL, M3     


   한 번 병을 앓아 보거나 가까운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을 경험해본 사람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가벼운 지식을 자연스럽게 알 게 되는 법이다. 6번 침상에 자리를 잡은 엄마는 다음 날 정확한 진단명을 받기 위한 골수검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전 병원에서는 백혈병인가를 의심하여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골수검사였다면 이번의 골수검사는 정확한 진단명을 내리고 그에 맞는 정확한 처방을 내려 치료를 시작하기 위한 골수검사였다. 검사는 그 단어에서 풍기는 전문적인 느낌대로 검사자체도 상당히 숙련된 의사만이 할 수 있는 검사라고 했다. 환자의 통증을 줄여주기 위해서 강한 마취주사를 놓고 마치 청새치 입모양처럼 생긴 거대한 주사바늘로 골반 뼈를 통과시켜 골수를 채취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석유탐사와도 같이 광구를 탐색할 때 어느 정도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 해 두어야 하는 것과 같이 이 검사 또한 비슷했기 때문에 환자에게 크나큰 통증을 줄 뿐만 아니라 검사가 끝난 후에도 부동의 자세로 4시간을 지나야만 하는 큰 검사였다. 엄마는 그런 검사를 며칠사이에 두 차례나 받아야만 했었고 그건 마치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앞으로의 치료 과정의 전초전쯤으로 생각하고 나니 엄마가 잘 견뎌줄 수 있을까 또한 나는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의 정확한 진단명은 Acute Promyelocytic Leukemia, 그 중에서도 급성전골수구백혈병(M3)이라고 나뉜 병명이었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백혈병은 한 가지라고만 막연하게 생각했던 내게 더 많은 검색과 정보를 알아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생겼고 어쩌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라고도 여겼다. 우선, M3는 백혈병 타입 중 가장 치료효과 및 완치율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우리들끼리는 ‘백혈병의 꽃’이라고도 불러주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달리 출혈위험이 높아 순식간에 사망할 수 있다는 설명도 읽어 보았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이 조혈모세포 이식수술과정에서 잘못되는 수가 많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다행히 거기까지 고려하지 않고도 완치를 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  에 모든 희망을 걸고 싶은 마음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실에는 총 12번까지의 침상이 있었는데 엄마만이 유일하게 M3로 진단을 받은 환자였고 정말로 그 사실 만으로도 아주 잠깐 모든 보호자와 환자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실로 대단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콧방귀 낄만한 말이지만 그야말로 중증 중의 최고, 그곳의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던 낮은 등급의 계급을 부여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부터 나이가 어린 아가씨 환자들은 엄마를 ‘M3아줌마’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지나고 나서야 생각해 보니 그 심정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도 아닌 것이 그곳의 환자들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일 년까지도 12층으로 올라와서 단 며칠이라도 요양 차 퇴원을 허락받은 사실이 없던 사람도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루씩 시간이 지나가고 있음을 달력이 넘어가면서 계절이 바뀌고 있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그동안에 지구가 쉼 없이 공전하는 것을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없는 그런 시간의 흐름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오히려 그곳에서의 시간과 날짜 계산은 각자의 항암치료가 이번이 몇 회 차인가에 따라서 구분하는 것이 서로에게 더 알아듣기가 쉬웠고 또한 그런 식의 대화를 통해 백혈병 환자로서의 상대방의 경력을 짐작해 보기도 했으므로.     

   본격적인 치료에 앞서 필수 준비행위처럼 여겨지는 시술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것은 하루에도 수시로 혈액을 뽑아내고 약물을 주입해야 하는 일종의 인공의 문을 달아주는 역할을 해 주는 정말로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증환자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히크만 카텍터’수술로써 쇄골하정맥을 통하여 일종의 인공관을 삽입하여 환자의 혈관을 직접적으로 찌르지 않더라도 그 관을 통해 혈액을 뽑고 항생제, 항암제를 비롯한 각종 모든 약물을 투입할 수도 있는 그런 장치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료들과의 우연한 대화 중 있었던 일이었는데, 정년을 코앞에 두고 계신 선배님께서 갑자기 다리에 상처를 입어서 대학병원을 찾았다가 그날로 바로 입원을 해야 한다는 병원 측의 경고에 따라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관계로 마침 병문안을 다녀오는 길이라면서 가슴언저리에 이상한 고무관으로 연결된 작은 플라스틱 박스를 통해 링거액을 맞고 있었다고 말했는데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그 분처럼 장기 투석을 해야 하는 환자는 히크만을 가슴에 부착해야 된다고 말을 해 버렸다. 그러자 그 선배님은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그런 시술과 전문용어에 익숙한 것으로 보아 간호사 경력이 있는 줄로 생각했었다는 것이었다. 일부러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타인의 심각한 병명에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토마스 만 - <마의 산>을 보면 요양원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곳 언저리 쇄골절흔을 특이하게도 ‘소금단지’라고 그들만의 은어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그럴 법도 한 것이 중심정맥 카텍터를 삽입할 정도의 환자는 날이 갈수록 몸속의 수분이 빠져나가게 되어서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 대부분은 쇄골절흔이 유난히도 움푹 패여 있어서 한 끼의 음식을 할 때 간을 할 정도의 양 만큼의 소금을 저장해 둘 정도의 크기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소금이라는 어감과 모양의 결정체에서 풍겨지는 슬픈 분위기에서 오는 또 다른 사정이 있었을 것이리라.     

   어쨌든 엄마는 B동의 꽃이 되었다.   

   

신발과 삭발     


   내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어떤 힘 – 말하자면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서이다.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평범하고 당연해 보이지만 결코 쉽게 결론내릴 수 없는 인간에게 있어서 어쩌면 영원불변한 테마가 바로 이것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언제 어느 자리에서나 있는 듯 없는 듯이 그 존재를 쉽게 드러내지 않고 살아오던 그녀는 자신의 매력에 대해서는 전혀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 자신 스스로는 언제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 어떤 상식과 습관에 대해 가운데 중심이 잡힌 뚜렷한 가치관으로 살아오고 있었지만 정작 피상적으로는 쉽게 주목할 만한 점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지극히 평범한 한 어린 여자가 다시금 삶에 대해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 그녀는 최소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그 어떤 불안한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침대에 누워 지내야 하는 날들이 늘어날수록 ‘삶이란 단순한 것이구나.’ 오히려 이런 쪽으로 점점 결론을 짓는 듯 보이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위암 말기환자였던 것이다. 피상적으로든, 피하적으로든 최소한 그녀는 삶을 허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 처음 가보는 길은 갈 때보다 돌아올 때는 더 쉽고 가까운 거리로 느껴지게 하는 법이다. 나는 이미 여러 번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해 보았으니 이번에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지리라.      

   그녀는 오히려 아무런 부작용도 동반되지 않았던 검온하는 처치를 가장 두려워했었다. 수은이 든 작은 유리로 된 체온계를 혓바닥 밑에 넣어 놓고 간호사의 지시대로 2분을 기다리기란 정말로 참아낼 수 없는 갈등의 연속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찌르고 잘라내고 봉합하는 식의 그 어떤 외과적인 치료를 동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 온갖 잡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고 기회를 포착한 생각들은 그 유리를 이빨로 깨뜨려서 수은을 목구멍으로 삼켜버려 중독에 빠지는 편이 더 나은 것인지를 끊임없이 갈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간호사가 그것을 입속에서 빼 내갈 때 비로소 안전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쉽게 죽을 수 있는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아쉬움이 교차하기도 했던 것이었다. 정말로 솔직하게 말한다면, 모르핀 때문에 거의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 암 덩어리의 존재에서 오는 공포심보다 몇 배는 더 무서운 순간이었고 그래서 나는 엉덩이뼈 아래에서 조혈조직을 떼어내 갈 때의 고통보다도 몇 배는 큰 공포심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엄마! 슬퍼하지 말아요.’ 이제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편안히 눈을 감았다. 그 사이로 마지막 남은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렸다.    

  

   엄마는 이제야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울음소리로 나를 부등켜 안고 울기 시작했다. 딱딱한 주치의의 한마디만이 내가 5개월을 살았던 하얀 공간을 흔들며 메아리치는 절정의 순간 속에서.     

   ‘2009년. 4월. 13일. 17:59. 사망하셨습니다.’     

   결국, 엄마와 영원히 이별하는 날이 찾아왔다.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운 나의 팔다리를 가지런히 정돈하면서 몸에 붙어 있던 기계들을 떼 내는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나의 얼굴은 비로소 빛나고 순수하며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상태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결말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엄마의 울음소리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이마저도 수긍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나는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완전히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의 죽음을 보면서 조금도 슬픈 척은 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무균병동으로 오게 된 이후로 끊임없이 누군가가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새벽 5시, 간호사가 환자들의 아침 피를 뽑아가는 인기척에 나의 장례식까지는 지켜보지 못한 채 꿈이 중단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엄마의 삭발이 예정되어 있던 날이다. 병실문 밖, 바로 코앞에 회진 의사와 비슷한 옷차림의 출장을 나온 이발사가 엄마의 머리카락을 깎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약간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는 이발기가 스타일의 사정도 물어볼 것도 없이 무심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떨어지는 머리카락 조각과 함께 말없이 떨어지던 엄마의 눈물 방울방울들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전혀 소리를 내거나 흐느끼며 울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면 보지 않았어도 되었을 엄마의 눈물을 보고서야 정말로 엄마가 백혈병에 걸린 것을 실감했다.      

   엄마가 삭발하던 날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내가 병원에 들어올 때 신고 들어온 신발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나처럼 반쯤 정신이 나간 보호자가 신발로 보이는 아무것에나 발을 끼고 그냥 그 낯선 느낌도 감지 못한 채 끌고 갔을 것이리라. 어떤 속상함도 느끼지 못하고 내 기분은 그냥 무덤덤했다. 다만, 신발을 어떻게든 구하기 전까지는 나는 맨발로 다녀야 하는 불편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삭발하던 그 날, 내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저지른 행동이 있다면 보호자가 사용하던 세면실에서 그날 밤 거의 허리까지 길던 내 머리카락을 귀밑머리로 잘라내 버린 일이었다. 단 몇 시간 사이에 신발을 잃어버렸고 몇 년을 길러온 머리카락을 잘라내 버렸다. 점점 나는 내 것에 대한 어떤 아쉬움도 미련도 애착도 없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 채 미세하게 가벼워진 머리카락의 무게와 두건을 쓸 때 거추장스럽지 않던 게 오히려 더 반갑게만 여겨질 뿐이었으니까.      

   아, 그리고 정신과 병동이 아니던 그곳에서 신발을 신지 않고서 돌아다닌 것은 나 자신보다 환자들과 동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이었으므로 나는 신발을 잃어버린 지 단 하루 만에 1층 매점의 잡화코너에서 싸구려 실내화를 장만해서 신고 다녀야만 했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머리카락의 서툰 모양과 볼품없는 슬리퍼를 신고 있던 나는 단 며칠 만에 완벽하게 그곳에 적응하면서 그야말로 병원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 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사의 영원한 테마 - 삶과 죽음의 문제는 육신과 영혼을 같은 공간에 묶어둘 수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말하는 것임을 아주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했다. 영혼이 죽은 살아 있는 육신은 숨을 쉬고 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으며 영혼은 있지만, 육신이 죽어버린 삶 또한 온전히 살아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어떤 기다림     


   B병동은 매우 정확하게 짜진 일과의 계획에 따라 하루 24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병실의 정확한 소등시간은 22시였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 나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으므로 무조건 등을 꺼야만 했다. 그래서 일정한 주기의 시간 간격의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들은 목걸이로 된 작은 손전등을 달고 다녔는데 나는 그 모습이 이 병동만의 유일한 특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환자들은 대부분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들같이도 잠자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없었고 엄마도 차츰 그 생활에 적응하고 계셨던 것인지 짧게는 30분, 조금 길었던 날은 1시간 동안만을 뒤척거리다가 이내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잠이 드셨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잠이 든 이후에는 오로지 나만의 위한 시간이 허락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던 날에는 언제나 소리가 전혀 나지 않도록 몸을 움직이며 병실을 빠져나가 비상구 쪽 계단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었다. 그곳은 그 병원에서 내가 찾아낸 나만의 유일한 공간이자 일기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엄마의 입원은 여름이 막 움트기 시작했던 5월의 끄트머리였지만 이제 바깥의 날씨는 한여름을 알리며 한밤중에도 무더위로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단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병실 내에는 4계절이 내내 똑같은 날씨라는 것이다. 같은 풍속의 공기의 흐름과 매일 매일 똑같은 온도와 변하지 않는 풍경들, 오로지 변하는 것이 있다면 몸만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비슷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유일한 전달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실에 한 번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길게는 1년이 넘도록 그 안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달력으로 날짜를 계산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제까지 몇 통의 항암제가 투여되었으며 영양제 링거액을 몇 리터를 흡수했는지 여부로 대충 가능해 볼 정도였고, 한 번씩 정확한 날짜를 확인받았던 것은 일주일마다 정기적으로 도착하는 통지서가 지침이 될 뿐이었다. 그 통지서에는 피상적으로는 소소하게 급식비부터 약물의 종류대로 그 몸값들이 호텔 숙박계의 숙박료처럼 0단위까지 정확하게 기입되어 있던 숫자들과 수납 날짜 마감일이 뚜렷하게 적힌 병원장의 도장이 찍혀 있었지만 그 안에는 그 이상을 뛰어넘는 많은 사연과 한숨과 애환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보통사람들은 쉽게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엄마도 입원한 뒤부터 답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편지들을 꼬박꼬박 받고 계셨고 편지들이 쌓여갈수록 들었던 나의 또 다른 생각은 오빠의 말대로 엄마가 정말로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게 되는 것은 아닐지 하는 불안과 고민들이 자라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여름의 끄트머리 8월의 끝이었다. 옥상으로 연결되는 좁은 쇠창살 문은 언제나 커다란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었으므로 나는 언제나 거기까지가 끝이었고 자물쇠 바로 아래 앉아서 있었다. 밖에서 보자면 나는 영락없이 감옥에 갇힌 죄수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소등이 되면 어김없이 이곳으로 오고 싶었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밤은 하루의 반인 나의 낮보다 더 견뎌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어둠이라는 시각이 내 눈을 덮어주었기 때문에 낮 동안에 볼 수 있었던 온갖 사건과 현상들이 내 깊숙이 들어앉은 상념들을 잠재울 수 있었지만 밤이 되면 한곳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가장 유리한 입장이 되어서 어김없이 강한 세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내 마음속은 낮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지러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차라리 몸을 계속 써야 하는 낮이 나에게는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낮보다는 한 밤중에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낮 동안 투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밤에 이르면 그 어느 것도 나 자신외에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게 되면서 자살을 하고 싶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철문의 자물쇠도 이전 어떤 이의 순간의 충동적인 선택을 보고 나서야 앞으로의 그런 무모한 행동들을 막아보고자 설치해 두었으리라.     

   내가 지금 뒤돌아 생각해 보니 그 때의 나의 행동 중에 가장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면 일기장을 따로 구입해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병실 내에 책과 같은 물건을 들고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따로 나와서 일기장 형식의 노트를 사서 간소하게라도 일기를 썼었더라면 지금은 가물가물하여 얼굴조차 희미해져 버린 그곳 사람들의 이름이라도 최소한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리라. 벌써 15년 전의 일이기도 하겠지만 당시 나에게도 미래를 꿈꾸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던 때였고 엄마의 발병으로 내 사적인 원인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그 미래와 절교를 선언하고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과생으로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을 보냈다. 아니 휴학도 했었기에 총 8년 간의 시간을 이과생에 가깝게 생활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우연한 기회에 학교에서 운영하는 고시원 입실시험에서 1등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시원 운영 실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사실 그곳에 들어가 용돈까지 받아가면서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던 상황이었다. 더 자세히 말해 보자면, 오빠의 권유로 경찰관이 되려고 생각하고 시작을 했지만 필기시험보다는 또 다른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던 와중에 고시원 입실 시험을 치르게 되었고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왔던 것이 내가 법이라는 과목을 접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나 스스로의 독학에서 나온 지식들 뿐이었음에도 형법과 영어에서 최고점을 받았던 것이다. 이를 살펴보던 법대 교수 중 한 분께서 이과생이던 나의 이력을 특이하게 알아보시고 면담을 하고자 연락을 해 왔던 것이었다. 다행이 그 교수님의 성함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요지는 자기가 지도하는 많은 학생들이 있지만 나처럼 이런 경우는 처음이고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나의 적성에도 맞을 법한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 오셨던 것이다. 교수님은 고시원에 입실하여 변리사 시험을 준비해 보자고 하셨다. 기타 나머지 따라오는 문제들은 학교에서 해 주는 지원을 받으면 될 것이고 나만의 속도대로만 해 준다면 충분한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라며 진심으로 권유한다고 했었다.     

   그런 일이 내게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그랬다 정말로. 사실 그때 나는 정말로 공부를 하고 싶었던 완전한 열의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어떤 마음의 준비도 못한 채로 병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밤에도 엄마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후에 나는 병실을 조용히 빠져나와 그곳으로 올라갔다. 계단의 막바지 모퉁이를 돌다가 나도 모르게 ‘엄마야’하고 깜짝 놀랐을 때 반사적으로 나올 법한 말을 무의식적으로 뱉어버렸다. 거기에는 엄마 또래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 한분이 언제나 내가 앉던 자물쇠 아래에 앉아계셨고 나는 낯선 사람을 본 것에 대한 놀라움 보다는 온 곳이 금연구역이었던 곳에서 그 아주머니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에 더 놀랐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나는 왠지 그 분의 비밀을 훔쳐본 사람같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순간 자리를 피하는 것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죄송합니다.’말을 하고 등을 돌리던 참이었다.   

   

   “학생! 괜찮아요. 여기 자리 남아 있어.”     


   나는 나를 학생이라고 불러 세우는 아주머니에게로 몸을 돌리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물고 있던 담배를 시멘트 벽면에 눌러 끄고 손으로 파리를 쫓아내 듯 연기를 흩어버리고 계셨다.      


   “미안하네. 담배를 펴서. 그런데 학생도 간병인으로 온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색하게 그 아주머니와 조금 거리를 남겨두고 계단 끝에 살짝 엉덩이만을 걸치고 앉았다.      


   “나는 아들이 아픈데 학생은 누가 아파서 여기에 온 거야?”    

 

   그 아주머니는 나를 고등학생쯤으로 보았던 것인지 아니면 일상생활이 전부 반말로 이루어지는 사람이었던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처음 보는 내게 아주 익숙한 반말을 잘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아들이 아프다고 말했으므로 나를 아들의 또래쯤으로 여겨 그랬을 거라 짐작만 했을 뿐이다.      

   아주머니는 직접 병간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간병인을 사서 쓰고 있는데 갑자기 그분 집에 사정이 생겨서 며칠간을 어쩔 수 없이 들어와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 내가 먼저 어떤 상황인지를 물어보지 않았었지만 아주머니는 자기 아들의 신상에 대해서 그리고 병명과 가족 상황들 그리고 어디가 집인지 등등 지극히 개인적인 사실들을 참 잘도 알려주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주머니도 나처럼 무슨 말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해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열여덟 살, 조혈기관이 잘못되어서 생긴 백혈병이기는 하지만 정확한 진단명은 재생불량성빈혈, 학교에서 축구를 하다가 부상을 당해 응급실에 실려 왔다가 혈액검사를 통해 우연히 발견이 되었다고 했다. 하기야 백혈병이라는 것이 언제나 발병될 것을 염려하여 잠깐씩의 빈혈 증세나 출혈에도 혹시 내가 백혈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며 병원에 찾아가서 피를 뽑아 혈액수치를 분석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어디 흔하게 있겠는가를 감안해 본다면 엄마의 경우처럼 여기에 모여 치료받는 사람들은 전부다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던 도중에 아주 우연히 자신이 백혈병에 걸린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리라.      

   아주머니를 보고 놀란 이유 중의 하나가 환자를 간호하는 사람은 이전에 흡연을 했던 자라도 금연을 시작했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병원 내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과 언뜻 외모에서 풍겨지는 특별한 인상, 보통의 아주머니에게서 느껴지는 전형적인 인상 외에 무언가 강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그 분의 손톱과 짙게 문신한 눈썹에서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A병동에 있다고 했다. 아, 그래. 나는 B병동이 있는 거라면 A병동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인 전제 조건이라는 것을 미처 감지하지도 못한 채로 백혈병이란 남자들에게는 걸리지 않는다는 아주 짧은 생각으로 멍청하게 지내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기야 그런 생각도 굳이 나무랄 것이 못되는 것이 흔히 백혈병이라는 병명에서 오는 인상이란 것이 항상 영화 속에서는 청순한 여주인공만이 백혈병에 걸렸고 죽음조차도 매우 미화시켜서 심미적인 느낌이 들게 하도록 하는 선입견이 자리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말 하게 될 이야기를 염두하고 자신 있게 단언하지만, 백혈병은 막 세상에 태어난 아기부터 내일 자연사를 앞 둔 백수의 노인에게까지 연령과 성별에 전혀 하등의 차별을 두지 않는 병이라는 것이다.       

   그 아주머니는 오늘까지만 병원에 있고 아들을 돌봐주는 간병인이 들어오게 되면 병원을 떠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속에서 어서 오늘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그 어떤 기다림을 느낄 수가 있었고 어쩐지 A병동의 그 소년에게 백혈병에 걸린 사실 외에도 또 다른 면에 있어서 측은함을 느꼈다. 단정하기는 어려웠지만 왠지 정상적인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가 간병인이 오는 날을 기다리 듯 무균병동에서 지내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그 어떤 기다림을 마음속에 품고 지냈으리라. 24시간을 교대로 근무하는 간호사들도 마스크와 두건을 쓴 채로 하루를 꼬박 갇혀있는 것을 벗어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며 환자들도 어서 빨리 이 시간들이 지나가기를 희망하며 그 어떤 결말이라도 감수할 수 있다는 대담함으로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병간호를 하고 있던 사람들도 병이 끝나주기를 기다렸을 테니까. 나 또한 그러했으므로.      

   하기야 살면서 그 어떤 기다림조차 없다면 살고 있더라도 그 어디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그 흐름도 감지하지 못한 채로 엄마에게 주어졌던 3개월의 끝까지 와 있었다.      

   한 번 태어난 인간은 결국에는 죽게 된다. 이것은 절대 변하지 않으며 무엇도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어떻게 보자면 사는 동안 우리 모두는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기다림으로 해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영원한 삶이란 것은 없겠지만 어떤 불가항력적인 원인에 의해서 죽음의 통보를 미리 앞당겨 받은 사람은 내부의 노력과 외부의 개입으로 어쨌든 살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연장시킬 수 있는 노력은 해 볼 수 있다. 우리들은 처음에 받았던 시한부 3개월 동안을 죽음에 가까운 공포감으로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를 기다렸고 이제 그것은 기간만료로 효력이 소멸되면서 또 다른 연장된 삶을 부여받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여기에서 언급한 또 다른 삶이란 비록 인공적인 어떤 장치들과 독극물에 가까운 약물 주입이 생명연장의 필요조건처럼 저당 잡혀 버린 삶일지라도.     


우회전이 자연의 법칙     


   행성과 그 위성들은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회전한다. 적어도 내가 사는 북반구에서 보는 우주의 움직임이란 그렇다. 인간도 왼손보다는 오른쪽 손을 더 많이 쓰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사용하는 장치와 기계들도 거의 다 오른손잡이 인간이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어릴 때 읽었던 <해저 2만 리>에서는 세상의 모든 조개와 소라도 우회전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거의 예외는 없다고 쥘 베른이 꾸며 낸 네모 선장의 잠수함에 우연히 탑승하게 되어 항해를 하는 주인공 ‘나’에 따르면 그렇다. 그러나 돌연변이와도 같이 우연히 나선이 좌회전인 조개가 있다면 해양생물학자는 그 조개와 같은 무게의 황금덩어리의 값을 치르더라도 어떡해서든 손에 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 이것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 나는 병원생활이 길어지게 되면서 가끔은 보통사람들이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말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지진이나 폭풍, 혹은 화산폭발과도 같은 자연재해에 한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과도 같은 신세로 그 어떤 저항한번 해보지 못한 채 수용소와도 같은 이곳으로 와서 1년의 절반 가까이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오전 10시, 숙련된 간호사가 요구르트병만 한 크기의 호일과도 같은 은박 테이프로 몸통 전체가 칭칭 감긴 갈색 유리병을 은쟁반과 같은 금속 트레이에 들고 들어온다. 저 간호사도 머리망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서 그녀만의 외모를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키, 몸매, 그리고 눈의 모양정도로 구별할 수가 있었지만, 물론 여기에 근무하는 모든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단순한 특징들로 기억되고 있기는 했었지만,  나는 지금 엄마에게 3차의 항암제를 막 투여하려고 하는 저 간호사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내게 투시력 따위가 생겼다거나 나름 건강한 정상인으로서 갇혀 있는 생활을 오래 하고 있다 보니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여자를 이성으로 보게 되는 마음이 생기게 된 것도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항상 엉덩이가 유난히 동그랗고 오동통했던 이 간호사가 언제나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동정어린 진심과 그 속에 담긴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전 사복차림으로 퇴근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등허리 절반쯤 내려오는 긴 머리와 도톰한 입술과 동그랗고 봉곳한 콧날이 마치 그녀의 엉덩이와도 잘 어울리는 외모를 갖고 있었고 특히, 전체적으로 풍겨지는 조심스러운 몸짓에서 평소의 그녀의 행동이 가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으며 그래서 그런 것인지 그녀와 외모와 성품이 정말로 적절하게 잘 조화를 이루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녀가 이 무균병동의 간호사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런 그녀가 3차 항암제를 엄마의 중심정맥혈관에 투여할 준비를 하고 있다. 환자복의 단추를 두 개 풀러 의료용 장갑을 낀 손으로 소독약을 가득 머금은 거즈를 히크만 카텍터 부위를 소독했다.      


   “이미 두 번 맞아 보셨으니까 이번에도 잘 하실 수 있으시죠? 시간은 비슷하게 2시간에서 3시간정도면 끝날 거구요. 제가 그 중간에 다시 한 번 더 올 것이고 혹시 사이에 약이 너무 느리게 들어간다거나 빨리 들어간다거나 하면 보호자분은 간호사실로 빨리 말씀해 주세요. 자, 지금부터 약 들어갑니다.”     


   언제나 비슷한 안내와 유의사항이었지만 이 순간 내 마음은 항상 1차로 항암 링거를 맞던 엄마의 모습을 볼 때처럼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히크만 카텍터 수술을 마친 환자는 그 인공관이 정맥혈관에 잘 삽입이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수액을 먼저 주입해 본다. 엄마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정해진 순서대로 수술 결과를 확인하던 날이었다. 만일에 수술이 잘 되었다면 바로 1차 항암 치료를 시작해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엄마에게 남아 있던 시간이란 것은 너무나 촉박하기 그지없었으므로. 수액을 주입하고 몇 분이 지나갔을까. 엄마의 목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고 나는 너무나 놀라서 간호사를 급히 불렀고 바로 응급처치를 했지만 나의 예상대로 인공관이 정맥혈에 정상적으로 삽입이 되어 있지 않아서 수액이 혈관을 타고 들어가지 못하고 피하조직에 고이면서 그곳이 물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것이었다. 어쨌든 엄마는 솜씨 없는 의사의 처치로 한 번의 고비를 더 넘기며 그 수술을 또 다시 받아야 했었다. 그래서 1차 항암치료는 예정일보다 하루가 늦춰지게 되었고 그 때도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었는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터지면 핵폭탄과도 맞먹는 해로움이 있는 이 갈색의 독극물은 가장먼저 암실 처리 된 유리병에서 흘러나와 아주 잠깐 인공관을 타고 흘러가다 곧 엄마의 정맥혈에 진입하게 되면 흐름의 속도를 자유자재로 높였다 줄였다하면서 손가락과 발가락 끝의 말초혈관으로까지 온 몸 전체의 구석구석을 그것도 아주 도도하게 흘러 다닐 것이리라. 그러면서 서서히 엄마의 몸속에 기생하고 있는 또 다른 유기체 – 암세포 - 말고도 그나마 정상적으로 크고 있는 것들까지 죽이게 될 것이다. 원래 항암제라는 것이 세포를 죽이자고 하는 것이니 그만큼 독성이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 무분별한 독재자는 좋고 나쁜 세포를 가려낼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분열하고 있는 모든 세포들을 죽여 없앨 것이다. 지나침은 언제나 부작용을 남기는 법, 그래서 이 부식작용의 가장 큰 외적인 특징으로 특정 부위 조직의 비대증, 병적인 종기 번식, 단백질로 공생하는 몸의 모든 털의 뿌리를 부식시키면서 머리카락부터의 말끔한 제거, 그리고 속눈썹까지도 붙어있지 못하게 하는 분리작용, 영화 속에서처럼 식사도중 구토를 하려고 화장실로 달려가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지만 - , 그 이유야 항암제를 맞고 있는 환자는 스스로 걷을 힘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구토가 나온다고 어떻게 화장실로 달려 갈 수 있단 말이던가, 그 대신 언제나 식판 옆에는 어느 때 올라올지 모르는 구토와 각혈을 대비하여 불투명 비닐봉투를 준비해 두고 있어야 했었다. - 엄마도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부터 책에 나와 있던 대로 처치에 따른 후유증을 그대로 경험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결국 완전무결한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완전히 사멸해 버리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피상적인 변화보다 정작 환자를 괴롭히던 것은 결코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의학적인 수치로 뽑아 낼 수 없었던 내면으로부터 오는 불안과 공포심이 가장 큰 부작용이었으리라.      

   어쨌든 혈액 암환자의 항암치료의 궁극적인 목표는 완치를 목적으로 하는 치료가 아니라 혈액검사에서 검사치들이 호전된 상태를 말하는 관해를 이루기 위한 것에 있었다. 이것은 백혈병환자의 최후의 거점과도 같은 조혈모세포이식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의 환자의 몸 상태를 만들어주는 과정과도 같은 것이며 설령 10회 차까지 항암치료를 하여도 관해가 좋지 못하다면 말 그대로 그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세포분열을 계속하는 악성종양만을 죽이고 또 죽이고 또 다시 살아나 증식하여 커지는 종양을 죽이는 과정만을 반복한 것일 뿐 결국 이 환자는 모든 치료를 포기하게 됨으로써 종양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만 남을 뿐이었다. 우리들이 이렇게 초짜 환자나 그 분의 보호자에게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항암치료의 몇 회 차인지를 마치 어깨에 단 계급장처럼 관등의 수식으로 붙이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였고 그만큼 치료 회수가 높다는 것은 면역증강요법으로 도달하기 까지는 그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진다는 사실과 그것은 곧 점점 죽음에 가까운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우리들 모두는 그렇게 인식하였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보통사회에서 연장자에 대한 상식적인 예우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새벽 5시에 뽑아가는 혈액수치의 결과는 12명 환자들의 아침 식판이 모두 빠져나가는 오전 9시경에 출입문 옆 안쪽에 성적표처럼 붙었다. 하루 중 최고로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또한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최소한의 위화감을 주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채혈결과에 대해 어떤 환자의 보호자들은 병실 밖으로 나와서 그 수치에 대해 약간씩 속여 말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내가 간호하고 있는 환자는 이렇게 혈액 수치가 최저인데도 나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아주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달리 말해 그만큼 자신의 간병인으로서의 수준을 은연중에 끌어올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물론 가족이 아니거나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그 생활에 오랜 기간 동안 젖어 지내서 환자를 포함한 자기 자신의 인생을 두고서라도 별다른 희망과 기대를 걸지 않았던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내가 간호하는 환자는 살 수 있는 희망은 없지만 이렇게 입원과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돈, 돈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만일에 환자가 기적적으로 치료를 마무리하고 퇴원을 하더라도 가야할 길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던 병원비의 부담감이 사람들의 마음을 그렇게 오염시켜버렸으리라.      

   엄마는 모범생처럼 꾸준하게 잘 해내고 계셨다. 백혈구는 언제나 바닥을 치면서도 그럭저럭 면역을 유지했고 빈혈수치도 만성 빈혈환자였던 나와 비슷했으며 무엇보다 혈소판의 수치는 언제나 칭찬할 만 했다. 지금 당장 서울역에 혼자 나가 중식 한 그릇 시켜먹고도 남을 만 한 돈을 호주머니에 지닌 사람과도 같다고 해야 할까. 건강한 성인은 언제나 최저 기준을 따져 정상수치와도 같은 150,000원을 쥐고 있는 것이었다면 엄마는 그래도 최소한 10,000원 이상을 손에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뜻밖의 용돈으로 평소에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살 수 있다는 기대로 부풀어 있는 아이의 배포와도 비슷한 경우였으리라.      

    나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엄마의 검사치가 최소한의 한계선까지는 지나치게 넘어서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아 왜 m3을 백혈병의 꽃이라고 말하는 지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환자로서의 신분이 오래될수록 중증환자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과시욕, 누구든지 자기의 병세를 조금 더 과장되게 보이게 하고 그것을 애써 포장하여 마치 계급 사회의 진지한 분위기의 서열을 암시하는 상류층을 나타내거나 가능한 한 그것에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려는 환자만의 허영심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는 타고난 정신력의 소유자임을 알리며 공연히 으쓱해하는 그런 기분마저 느끼지 못했다면 아마도 무균 실의 환자들은 예상보다 훨씬 더 상태가 급히 악화되거나 더 빨리 죽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끔씩 의사의 허락을 받아 임시적으로 퇴원을 하거나 아예 치료를 포기하고 자진 퇴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환자들의 들락거림을 제외하고는 변화가 거의 없는 곳, 어떻게 보면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도 깨끗하고 평온해 보이는 곳, 유리벽 바깥세상에서 보면 이 무균 실 이야말로 멸균 세계로 보여졌으리라. 달력의 흐름대로 계절은 지나가고 돌아온다는 자연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곳, 어떻게 보면 시간의 흐름을 공간이라는 형태가 붙들어 놓아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린 곳, 시계 초침의 바늘은 잠시도 한눈을 팔 여유도 부리지 않고 주저 없이 우회전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던 그 곳, B병동 12인의 무균 실은 그렇게 순간순간에 사로잡혀 마치 실체는 없지만 영원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공간과도 같은 곳이었다. 시간이 우회전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우회전 방식으로 살아가야한다는 자연 법칙은 존재하지도 않는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얼마 후, 그곳의 우리들은 좌회전과 같은 만성 환자가 합류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     


외출    

 

   무릎길이의 미색 반바지와 모자가 달린 얇은 바람막이 잠바, 영락없는 욕실용 분홍색 슬리퍼, 들쑥날쑥한 숱 많은 검은색 단발머리, 그리고 무엇인가 묵직한 것이 담겨 아래로 푹 늘어져 있는 양손의 검정 비닐봉지, 만성 빈혈을 갖고 있는 작은 여인의 창백하다 못해 초록색 빛마저 감도는 투명한 얼굴, 그림자로 보아도 팔다리가 지나치게 가느다랗게 보이는 이 여인은 무균 실에서 반년을 넘게 살고 있는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병원의 1층 로비를 빠져나가면 8차선 대로를 건너기 위해서는  병원에서 관리하는 작은 분수대와 그 옆으로 대리석으로 꾸며진 소규모의 특설무대가 있는 광장을 지나쳐야 했는데 특별한 예외가 없었다면 나는 일주일에 꼭 한 번씩은 병원 밖에서 구입해 와도 좋도록 허락받은 필수용품을 사기 위해 잠깐씩의 외출을 했었다. 매연과 뿌연 먼지로 얼룩져 그나마 불투명하게 보이기는 했어도 그 날 만큼은 직접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으며 계절의 지나침을 잠시라도 경험하며 비록 오염물질이 섞였을지라도 공기청정기가 아닌 진짜 자연속의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딘 걸음으로 이 공간을 지나가기도 했었는데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지나치면서 앞서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더 많이 보면서 걷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가을 끝자락에 드리는 선물]     

- 공연순서 -     

 1. 비발디 사계 중 <가을 1악장>

 2. 알비노니 <아다지오>

 3. 슈베르트 <아베마리아>

 4. 차이코프스키 <안단테 칸타빌레>

※ 연주 순서는 변경될 수 있음. 남은 시간 동안 앙코르 공연 진행      


   불어오는 바람결을 타고 날아다니다가 내 발등에 걸린 구겨진 종이 한 장을 집어 들고 읽어 보니 이 병원 주최로 광장의 작은 특설무대에서 공연이 있을 모양이었다. 악기들을 무대 위로 나르는 분주한 사람들을 보니 곧 공연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몇 몇은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서 앉아 있었고 대리석으로 된 층계 의자 중간 중간에 연인처럼 보이는 이들도 무료로 진행되는 이 노천 공연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대 옆 작은 분수대도 제 각자의 키대로 높이 솟아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뿌연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연못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무질서한 원을 그리며 물결을 만들어 냈고 나는 또 다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뭉쳐있던 구름들이 순식간에 흩어지면서 해가 온전히 얼굴을 드밀도록 자리를 내어주던 구름의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흩어진 구름들은 높은 빌딩사이에 몸통의 부분 부분을 감추고 있었고 한꺼번에 쏟아지는 햇살들이 구름 끝자락을 조금 씩 조금 씩 갉아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있는 힘껏 쏘아 올리는 분수대의 물줄기 사이에 희미하게 걸려있던 무지개를 명백하게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물과 기체의 중간적인 존재 - , 인간의 육체를 상징하는 물의 담즙과 정신을 대변하는 기체의 투명한 빛이 조합된 신비로운 물질이자 현상으로 그건 마치 삶과 죽음의 중간에 놓인 다리와도 같은 것이었고 교묘한 속임수로 내 시선을 교란시키고 있었다. 베네치아 그란데 운하에 있는 리알토 다리를 닮은 무지개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보았다. 내 눈앞을 가로막으며 나를 질식시키고 덮어버리던 밝은 빛을. 그 순간 나는 하얀 어둠속에 갇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찰랑거리며 반짝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뽐내며 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고 있는 저 여자의 뒷모습이 무척 친숙하다. 최소한의 조명만이 밝혀진 높은 천정 아래의 로비를 지나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저 여자는 정말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도 누군지 쉽게 생각해 낼 수가 없다. 투명한 플라스틱 파일 케이스를 옆구리에 끼고 나머지 한쪽에는 전공서적으로 보이는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책을 들고 있었다. 아마 여대생인 모양이다. 나는 계속 이 여자를 따라갔다. 3층까지 계단으로 쭉 올라온 그 여자는 앞뒤로 밀거나 당길 수도 있는 두꺼운 유리문을 몸으로 밀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도 얼른 그 뒤를 따라 들어갔는데 그곳은 1인용 칸막이가 되어 있는 도서관 열람실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빈자리가 제법 많았음에도 그 여자는 계속 안쪽으로 걸어들어 갔다. 마치 전부터 잘 알고 있던 곳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어느 쪽으로 돌아야 빠르고 넓은 통로가 나오는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이윽고 기둥 모퉁이를 돌아 구석진 자리로 가서는 나무로 된 의자를 조심스럽게 빼내어 앉았다. 나는 정말로 이 익숙한 행동을 하는 여자가 누구일지 너무나 궁금해서 미칠 지경까지 되었다. 이윽고 결심한 듯 여자의 앞을 지나치며 얼굴을 확인하려고 하는 찰나 어떤 남자가 여자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어깨를 건드리며 자판기에서 뽑았을 음료수와 쪽지를 건네주는 것을 보았다. 나는 황급히 몸을 돌리고 도서관에 공부를 하러 온 사람처럼 자리를 물색하는 행동을 했고 이윽고 남자는 그 여자에게서 멀어지고 나는 이제 그 여자의 얼굴보다 그 쪽지의 내용에 더 호기심이 커진다. 한 발자국 거리쯤 떨어져서 남자가 주고 간 쪽지를 조심스럽게 펴는 것을 관찰하고 과연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써져 있을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쪽지가 완전히 펼쳐지고 나는 까치발까지 들면서 내용을 읽어본다. 그 안엔 너무나 또렷한 고딕체의 큰 글씨로 ‘혈소판 0’이라고 박혀 있었고 그 순간 고개를 돌린 여자는 나와 정확하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 여자는 바로 초록색 낯빛의 바로 나 자신이었고 나는 그 순간 정적만이 감도는 열람실에서 비명을 지르며 서 있었다.      

   누군가 내 뺨을 세차게 때리고 시끄럽게 소리치는 고함소리에 정신이 들어와 눈을 떴다. 나는 길바닥에 누워있고 사람들은 동그랗게 아치형 모양으로 내 주위에 모여서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학생, 괜찮아? 갑자기 쓰러졌어. 얼른 병원으로 가봐야겠어요. 안색이 아주 안 좋은데.......”     

   “제가 여기에서 오래 쓰러져 있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한 5초정도? 아주 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아. 그래도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이니까 응급실에라도 가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다행이 병원이 코앞이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놓친 봉지를 집어 들고 우뚝 일어섰다. 빈혈, 빈혈이 나를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게 한 것이다. 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나를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좀 전에 보았던 그 구름들처럼 어디론가 사라졌거나 무대 앞 벤치로 옮겨 갔다. 11월 날씨에 나는 거의 한 여름에 가까운 차림으로 갑자기 찬바람을 맞은 탓에 급히 혈압이 낮아져 정신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의사가 아니라 병간호를 하러 온 보호자이면서도 이렇게 제 멋대로 나의 몸 상태에 대해 진단을 내려버렸다. 그럼 그 잠깐 사이에 내가 꿈을 꾸거나 환영을 본 것일까. 내가 끝까지 뒤따라갔던 그 여자는 결국 나였고 내가 받았던 쪽지는 채혈의 검사치인 혈소판 수치였다. 그것도 m3의 심각한 부작용이던 급성과다출혈을 막아줄 수 있는 혈소판의 수치가 ‘0’이라고 명백하게 써져 있던 쪽지를 말이다.      

   헤겔은‘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석양에 날기 시작한다.’라고 했던가. 생각의 힘은 언제나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난 뒤에나 따라오며 그제야 강해지는 법이다. 나는 아주 잠깐 외출을 나왔다가 만성 빈혈에서 오는 일시적인 현기증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었고 지금 내가 이곳에 왜 와 있었는지를 아주 잠깐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동안 보았던 그 환상이 어떤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나는 이 병원의 한쪽 모퉁이에 솟아 있는 꼭대기를 보았다. ‘저기 무균병동에 엄마가 계신다.’ 서둘러 병원로비를 가로질러 평소와는 달리 승강기를 타고 12층으로 올라갔다.      

   병실 안은 평소의 잔잔함과는 달리 무엇인가 분주한 모습이었고 12인의 환자들은 평소와는 다른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 사이 엄마 앞쪽에 누워 있던 11번 침상 환자가 사라지고 그 대신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건 불과 한 시간 남짓인데 그 사이 병실은 무엇인가 새로운 환경처럼 낯설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사실 11번 환자는 서른을 갓 넘긴 아이 엄마였는데 지방의 소도시에서 미용실을 운영한다고 했다. 아이가 있었으니 당연히 결혼을 했던 유부녀였음은 사실이었지만 그 아들을 낳은 것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신비로운 일로 어떻게 보면 기적과도 같다고 말 할 수가 있었다. 평소에 부르던 대로 언니라고 칭하겠다. 그 언니는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 자기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당시 백혈병 치료에 권위자로서 일본에까지 그 명성이 있던 이 병원의 한 박사가 소위 이 병의 명의라고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 이 병원은 백혈병 치료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에 와 있었기에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거쳐 갔던 곳도 이 곳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였다. 언니와 가족들은 아이를 지우고 병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단다. 그런데 언니는 아들로 태어난 아이를 둔 엄마였다. 이 단순한 결과를 두고 어설픈 귀납적 추리를 해보더라도 언니는 백혈병을 지니고 임신기간을 보냈고 출산까지 했다는 사실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이 병원은 기독교리를 내세우는 병원이라서 낙태수술은 절대로 허용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경우냐고 화를 낼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사법부는 사람의 시기에 대한 판결을 내릴 때 꾸준히 <진통설> - 사람으로서의 객체가 인정되려면 산모에게 진통이 오기 시작한 시점부터 태아를 사람으로 인정하게 되는 학설 – 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남은 정서적 감정은 배제하더라도 낙태는 법대로 하자면 엄연한 의미의 살인은 아니었고 설령 모자보건법위반에 해당 되더라도 예외적인 특수한 경우 – 임신의 유지가 산모나 태아의 건강에 심각한 위해가 있는 경우에 해당 – 에 아주 명료하게 해당되고 있었기 때문에 낙태를 하고 백혈병 치료에만 오로지 전념하였더라 하더라도 그것을 두고서 누구라도 섣불리 그 언니를 비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백혈병치료를 아주 잘 하는 병원에서 임신을 유지한 채로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치료를 할 것인가 아니면 아기를 포기하고 다른 병원으로 옮겨갈 것인가 왜 고민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단언하건대, 만일에 내가 그 경우와 똑같은 입장이 된다더라도 언니와 같은 결정을 내렸으리라. 아기를 먼저 죽이고 치료 도중에 내가 따라 죽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보다는 아기를 살리면서 나도 살고자 하는 희망이 언니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으므로.      

   그런데 지금 언니가 퇴원을 했고 그 자리를 어떤 젊다는 표현이 너무 늙은 편이 속하는 어린 아가씨가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아까 내가 잠시 보았던 머리가 긴 여자가 이 아이일까? 그렇다면 내게 어떤  예지력과도 같은 초능력이 생겼단 말이던가. 양쪽 볼이 뽀얗고 통통한 이 여자와는 많이 달랐지만 머리카락만큼은 분명히 똑같았기 때문에 나는 조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적인 사람은 그 여자의 1:1 보호자로 보이는 아저씨인데 아버지라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백혈병에 걸린 딸을 무균 실에 입원시킨 간병인으로서의 차림과 태도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예감대로 성직자풍의 양복을 입고 환영속의 내가 들고 있던 전공서적과도 같은 두께의  검은색 가죽으로 싼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란 것이 어떻게 저리도 평온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왜 나머지 11인의 환자들의 눈빛이 아이의 눈처럼 반짝거렸는지를 이제야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아까 12층 승강기에서 막 내렸을 때 자매님들로 보이는 차림의 한 무리의 여성들을 상기해 보자면 아무래도 이 어린 여자를 위해 함께 기도하기 위해 따라와 준 사람들로 여겨도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나의 경우를 뒤돌아보았을 때 엄마가 무균 실에 들어오는 첫 날 저런 표정은 절대로 할 수 없었으리라. 거울을 보고 확인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모습을 기억해 낼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고 아버지와 오빠의 표정에서 나의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기 매문이었다. 사실 나도 병원에서 있기 시작하면서 전에 없던 행동이 생기기는 했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하는 습관이었다. 그러나 내가 찾은 존재는 부처님도 하나님도 아닌 바로 엄마가 결혼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였던 것이다. 세상에 엄마처럼 자식에 대해 간절한 사람은 없을 것이란 생각으로 나는 생전 얼굴 한번을 본적이 없는 외할머니를 찾아 엄마를 지켜달라고 기도를 해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의 아버지는 함께 손을 잡고 기도를 했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기도하는 사람의 공통된 마음인 간절함으로 기도한 것은 분명하리라.      

   기도가 끝난 후, 여자의 아버지이며 문 밖 자매님들의 목사님이 떠난 뒤 전문 간병인이 들어오면서 여자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수경이 – 그 여자애의 이름 – 는 12인의 무균 실에서는 그다지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남은 11인들과는 조금 성질이 다른 만성 백혈병 환자였는데 이미 10대 후반을 만성기인 5 ~ 6년을 보냈고 비로소 자각증세를 느끼는 가속기인 5 ~ 6개월을 외래 치료를 하면서 버텨왔는데 이제는 그 마지막 단계이자 거의 대부분 치료에 반응이 없게 되는 급성기 – 대부분의 만성 환자들은 급성으로 돌아설 경우 위험할 때가 많았다. - 를 겪는 환자로 입원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 뒤, 조혈모세포이식수술을 성공해서 삶을 지속시키고 있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로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결과는 알 수 없었다. 이곳 사람들의 특징 중에 분명한 한 가지는 한 번 퇴원하여 다시 입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안부는 아무리 궁금했을지도 각자의 상상에 맡길 뿐 누구하나 먼저 꺼내어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경우, 그녀의 아버지와 그날의 풍경을 종합해 이야기 해 본다면 수경이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도사들을 비하하는 발언이 절대 아님을 미리 밝혀두고 하는 말이지만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사람으로부터 누구나 한 번쯤은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으로 가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을 들어보았으리라. 어쩌면 수경이의 아버지조차도 죽음도 또 다른 인생의 경험처럼 여기고 삶이 지속되고 있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인간의 생명을 두고 세속적인 현세에서의 삶만을 놓고 ‘살아 있다.’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극히 한정된 견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정 종교에서 이야기 하듯 끊임없이 윤회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삶이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었고 숨이 끊기더라도 영원히 평온한 세상에서 어떤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낸다는 것도 가능한 일인지 누구도 그것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 밖으로 외출을 나가는 이 잠깐의 순간이 어떤 전체를 두고 볼 때 아기로 태어나서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할 때까지 잠시 동안의 외출과도 같은 것인지를 누구하나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초현실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죽음조차도 꼭 그렇게 슬퍼할 일만은 아닐 것이리라. 그래서 그 당시 아주 조금은 수경이 아버지가 이해가 되기도 했던 것 같다.     


모르핀굿바이     


   어떤 사람도 그 혼자서는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이니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 땅은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다. 

   한 곶이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고

   그대의 친구나 그대의 영토가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그 만큼 나를 줄어들게 한다. 

   나는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것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 조 던 -     


   어니스트 해밍웨이의 장편소설, 스페인 내전을 무대로 써 내려간 장편소설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제목은 영국 성공회 성직자인 조 던 신부가 쓴 시 구절에서 따 온 것이다.      

   12인의 무균 실은 살고자 하는 희망이라는 공통의 목적으로 전국의 각지를 떠나와 모여 살던 장소였고 아직 각자가 거쳐야 할 치료의 단계를 끝내지 않았는데도 별 말없이 조용히 사라졌던 이들이 한두 명씩 생기는 것을 지켜 볼 때마다 나는 엄마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는 아니, 별다른 호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정체기에 머물러 있을 때는 침울한 기분으로 자주 변하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병실 안에서 보는 창 밖 너머는 언제나 반투명한 종이를 덮어 놓은 듯 자욱한 먼지 안개로 싸여 있었다. 나는 이 병실을 언제라도 자유가 있는 본연의 의지대로 화장실 옆 출입문을 열고 당당히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나에게 부모도 도덕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해 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하루의 대부분을 눕거나 앉아서 있는 엄마의 철제 침대 아래 놓여있는 낮은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그 옆자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이곳에서 이 순간 엄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또한 그 사실이 엄마에게 나를 향한 죄책감을 만들어 내는 미안함보다 더 큰 의지와 기대로 심리적인 안정을 주게 되면서 결국엔 엄마의 관해율이 좋아진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대부분 환자들은 엄마가 m3라서 부러워했기 보다는 나와 같은 보호자가 있었다는 것을 더 부럽게 여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돈이 엄청난 억만장자인 백혈병 환자는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이 병원에 누워 있을 리 없었고 이 곳, 무균 실의 12인들의 사정은 대부분 비슷했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부러움이란 정성과 애정이 있는 보살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옥상으로 연결된 고해실과도 같던 좁은 시멘트 계단에서는 여기가 얼마나 벗어나고 싶은 곳인지 또 점점 불확실해져만 가는 내 미래를 불안해하며 내 안의 이기적인 감정을 얼마나 부끄럽게 여겼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으리라. 함께 지내게 되면서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은 온갖 부사와 형용사들로 나를 칭찬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지만 결국에 남게 되는 진심이라는 것은 모든 수식어를 뺀 나머지, 그것은 바로 내 안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인간으로서의 본능적인 자기애가 가장 컸다는 사실이었으므로.     

   엄마가 처음 이 병원의 발을 내딛은 응급실에서 보았던 민영이는 그 뒤부터 줄곧 5번 침대에서 엄마와 나는 6번 침대에서 같이 살아 왔었다. 우리는 서로 가장 추한 모습도 아무 거리낌 없이 보듬어 주면서 오히려 눈을 돌려 피하기보다는 조금 더 안아 주지 못해 안타까운 진실한 우정을 쌓아 왔고 그래서 나와 두 살 밖에는 차이 나지 않았던 민영이가 내 친동생이고 가족인 것처럼 손톱 밑의 가시같이 아팠었다. 그것도 그 아이만의 특별한 사연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했더라도 항상 민영이를 간호하던 사람들의 불성실한 태도 – 격주간격으로 아버지와 여동생이 민영이를 간병하러 병원으로 왔었는데 아버지는 거의 매일 포장마차로 술을 마시러 나가셔서 자리를 지키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동생마저도 저녁 무렵이 되면 화장실 세면대 거울을 보고 나이트클럽 방문용 화장에도 맞먹을 법한 진한 화장과 야한 옷차림으로 단장을 하면서 환자를 간호하러 여기 서울에 올라 온 것이 아니라 약 일주일간의 휴가를 온 것쯤으로 여길만한 행동을 했었기 때문으로 - 에서 오는 그 어떤 연민의 감정이 나를 그렇게 마음 아프게 했었던 것 같다. 스물네 살,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섬 아이, 제주도를 떠나서 살고 싶지 않아서 그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제주도를 알려주고 싶은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살고 싶다는 꿈을 꾸던 아이, 내가 본 환자들 중 가장 A크래커를 맛있게 먹었던 아이, 이 병이 낫기만 하면 이제부턴 참지 않고 하고 싶은 말도 다하고 해 보고 싶은 건 다 하면서 살겠다고 말하던 아이, 돌아오는 성탄절만큼은 제주도 집에서 보내고 싶어 했던 민영이는 주치의로부터 5일간의 임시적인 퇴원허가를 받고 5번 침대에서 나갔다. 그리고 나의 예감대로 5일이 지난 후에도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임시 퇴원허가를 받고 갔던 민영이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마지막이 되어 버렸다.      

   응급실에서 첫 날 모르핀 주사로 통증을 진정시키던 모습이 눈에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후로도 민영이가 관절통을 호소하면서 모르핀을 맞는 것은 내게 익숙한 모습이 되어 버렸었다. 이미 머리카락과 눈썹은 말끔히 빠진지 오래였고 약물로 인해 항상 얼굴이 부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눈으로 보이는 나머지 신체 부분들은 뼈만 지나치게 도드라질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민영이는 민영이만의 특별한 경력이 있었다. 8살 때 이미 소아백혈병으로 이식수술까지 받았었던 것이다. 그 아이에 대한 더 놀라운 사실은 백혈병을 대하는 민영이만의 자세였다. 나는 병실에서 만났던 내 또래의 환자들한테서는 단 한 번도 민영이한테서 느낄 수 있었던 밝고 쾌활한 심리적 기분을 읽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간병인의 자격으로 병실에서 들어가 살고 있었지만 오히려 몇 차례나 민영이를 보면서 우울하게 꺼져가던 내 마음을 다시 되 살리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때가 많았었다. 어느 땐 민영이가 차라리 울기라도 했으면 그렇게라도 해서 그 속을 보여 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었지만 민영이는 오히려 쾌활한 편일 때가 훨씬 많았었고 또한 그것이 그 아이의 혈액수치에도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항상 수액 거치대를 의지해 걸어 다녔더라도 웃고 있던 때만큼은 두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간 듯 걸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릴 때 한 번의 경험이 민영이를 그렇게 만든 어떤 징표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치 아직 살아 있는 이들 중에 오로지 나 자신만이 이미 죽음을 경험해 보았다는 식의 여유이고 배포였던 것이었을까 어쨌든 인간이란 타인보다 내가 아는 게 많다는 것을 느낄 때 누구나가 그것을 설명하며 아는 척하거나 가르치려 들거나 없던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면서 당당해 지는 법이니까.      

   입맛을 돌게 하는 주사보다 모르핀 주사를 더 많이 맞았던 민영이는 식판에 나오는 밥도 잘 먹는 편이었지만 외출 때마다 내가 사다주던 A크래커를 정말로 좋아했다. 700원짜리 그 크래커만으로도 만족하던 민영이는 12인에게는 희망이고 꿈같던 존재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성탄절을 핑계로 신청한 임시 퇴원이 쉽게 허가된 이유는 이미 계속 모르핀 주사만으로 통증을 없애며 생명을 연장해가며 그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남아있지 않았던 민영이한테 선택의 자유를 주고자 하여 그랬던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900년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남겨 두고 온 민영이를 그 후로 나는 꿈속에서 조차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해 줄 수 있었던 것이 많지 않아 언제나 미안함에 안타까웠던 민영이는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반듯하게 누웠을 때 정확히 5시 방향에 박힌 작은 별이 되어 나보다 먼저 나를 찾아와 주었다. 나는 그것을 낮 시간이 끝나면 거의 언제나 볼 수 있었다. 그 아무리 두껍고 무거운 어둠일지라도 작은 별빛 하나를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나와 엄마가 힘든 고비마다 갈 길을 잃어버렸을 때는 그렇게 작은 별로 하늘에 떠 있어서 길을 밝혀 주었으니까.      


   결코 끊지 못할 것 같던 모르핀이젠 영원히 굿바이.    


   목이 늘어진 색 바랜 티셔츠를 입은 한 여자가 아기를 업고 내 자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와 책상 앞 가로 놓은 파티션 앞에 서서 장지갑보다 조금 커 보이는 손잡이가 달린 가방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아이를 업고 있는 이 아줌마가 나에게 보여줄 종이가 어떤 내용의 것인지 보지 않고서도 대충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 당시 내가 경비교통과에서 맡고 있던 업무 중에 한 가지가 공익매체에 신고를 당하거나 무인카메라에 찍힌 교통법규 위반자를 확인하고 그에 상응하는 범칙금과 과태료 처분을 하는 것이었다. 아이를 업은 아줌마가 드민 종이는 고속도로전용차로위반으로 요청서가 발부된 건이었다. 전용차로 운행시간에 5인용 승용차가 버스와 승합차들 사이에서 달리고 있는 사진이 분명히 찍혀 있었으니 누가 보아도 명백한 위반이었다. 나는 교통단속 경찰관으로서 위반자의 의사를 묻고 도로교통법 상 벌점 30점과 7만원 범칙금에 해당하는 통고처분을 하거나 벌점이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사람한테는 8만원의 과태료 고지서를 발부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등에 업혀 있는 아이가 고개를 돌리고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니던가.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털모자를 쓰고 있었는데도 나는 이 아이가 머리카락이 한 개도 없는 어떤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아이라는 것을 한눈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아이와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순간 그 아이의 눈빛에서 어느 초 여름날 응급실에서 마주쳤던 한 아이의 눈빛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민영이를 응급실에서 처음 보았을 때 보았던 눈빛과 너무나 닮은 눈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업은 아주머니에게 어쩌다가 이렇게 위반을 하였는가를 확인해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났다. 그 아이의 엄마라고 하는 아주머니는 실은 아이가 혈액암환자인데 서울 병원으로 외래를 가던 날 유난히 고속도로 차가 막혀서 진료 시간을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위반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아이의 아빠는 병원비를 버느라 거의 밤낮으로 일을 하다시피 해서 본인 혼자 아이의 병수발을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또 다시 심장이 쿵하면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에 근무복 가슴표장 -  왼쪽 가슴 부분 부착된 경찰관 흉장의 위치 - 이 부착된 정확한 그 부분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절대로 이 아이의 엄마에게 7만원이 됐든, 8만원원이 됐든 그 어떤 처분도 내릴 수 없다.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게 아이와 이 아이 엄마에게 사소한 일에 불과하게 될지라도 내가 지금 그렇게 해 버린다면 나는 무거운 죄책감에 또 며칠간을 괴로워하면서 지내게 될 것이리라.......’     

   나는 아주머니에게 일처리를 위한 것이라 설명하고 면허증만을 복사하고 나서 돌려보냈다. 이 아이 엄마의 나이가 나보다 두 살 어리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 심장은 또 다시 쿵하고 내려앉았다. 나보다 두 살 아래였던 민영이가 살아 있다면 지금 저 아이의 엄마와 같은 나이이리라. 그 때 당시 나는 이 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별달리 크게 고민하지 않았었다. 그 자동차 소유주 앞으로 8만 원짜리 과태료를 발부했고 그날 퇴근길에 회사 앞 농협 CD기에서 그 돈을 송금하면서 그 건을 그렇게 마무리 지어버렸다. 그리고 마트로 들어가 항상 내가 외출할 때마다 민영이에게 사다주던 A크래커를 한 개 사들고 나왔다. 8만원이면 20개들이 5박스를 사고도 남을 돈이다. 나는 그 과자를 아이에게 사 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황금색 테두리를 두른 얇은 비닐 끈을 잡아 당겨서 과자를 뜯었다. 한 개 꺼내 베어 물자 고소한 냄새가 입 안 가득 퍼지면서 순식간에 바사삭하고 부셔졌다. 그리고 어슴푸레 어둠이 깔리는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젠 그 어떤 진통제 따위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듯 환하게 웃고 있는 민영이의 미소가 부드러운 비스킷처럼 부서져 내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자영이     


   민영이가 작았다면 자영이는 키가 컸고 민영이가 귀여운 편이었다면 자영이는 아름다운 쪽이었다. 민영이가 하얀 피부를 갖고 있었다면 자영이는 갈색인 편으로 알맞게 썬 텐을 잘 한 건강한 아가씨처럼 보였다. 하지만 두 아이 모두에게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간직해 온 꿈이 있었고 나는 그 꿈이 마치 어릴 적 어린아이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다녔으면 하는 동화적인 마음을 품 듯 그 꿈들을 쉽게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음 한쪽 구석은 언제나 안타까움이 있었다. 자영이는 내가 본 환자들 중에 병원 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그런 아이였다. 그 만큼 훤칠한 키에 늘씬하게 쭉쭉 뻗은 팔다리로 무엇을 입고 있더라도 훌륭하게 소화해 낼 수 있던 타고난 몸매의 소유자였다.      

   자영이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올려놓은 것처럼 키가 컸다. 그리고 유니폼처럼 나온 환자복은 7부의 기장의 옷처럼 언제나 작달막하게 올라가 있어서 항상 두어 번 둥둥 소매를 걷어 올렸던 민영이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자영이와 민영이,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셋은 병실 중앙에 접이식 의자를 가져다 놓고 인기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함께 보면서 마치 같은 또래의 여자애들이 수다를 떨 듯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기도 했었지만 우리에게 좀 조용히 해 줄 수 없겠냐는 항의를 하던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드라마속의 착한 캐릭터를 보고는 현실에서 저럴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다.’고 일종의 회의감 섞인 무관심으로 일부러 부러움 감정을 숨기기도 했으며 반대로 나쁜 역할을 맡고 있는 배우한테는 ‘그래, 아마 내가 쟤라도 저렇게 했을 거야.’하면서 동정심으로 편을 들어 주기도 했었다.      

   자영이는 언제나 자기와 키가 비슷하게 큰 아빠와 함께 지냈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 또한 외모만큼이나 시원시원하고 말씀이 많은 편에 속하는 그런 쾌활한 분이셨다. 간병인들이나 환자의 보호자들의 식사는 보통 환자들이 먹고 남긴 식판을 들고 나가 주로 옥상으로 연결되어 있던 평상에 모여 함께 식사를 했었는데 보통 이런 종류의 병원 생활을 오래 경험한 사람들은 밖에서 각자가 먹을 밑반찬을 따로 준비해 와서 다 같이 모인 그 자리에 꺼내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가족끼리의 경우엔 상관이 없었지만 월급을 받고 병간호를 하는 간병인들에게는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 이해가 될 만 했고 더욱 무균 실 환자들에게 배식되었던 음식들은 전부다 간이 거의 안 된 밍밍한 유아식과도 비슷하고 그마저도 생으로 된 채소는 거의 구경할 수가 없었고 거의 완벽한 멸균처리를 통해 차려진 음식들로 하나같이 부들부들하고 물렁물렁한 종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음식을 맛으로 먹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의 병실 밖의 공기로 숨을 쉬면서 비워진 위장을 좀 채우고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면서 위로를 해 주기도 내 스스로 위안을 받기도 하던 그런 시간쯤으로 여겼었다. 당연히 병원에서 생활한 이후부터 급격히 살이 빠져 고무줄로 된 면바지도 흘러내릴 정도로 마를 수밖에는 없었다.  사실 그 이전 경찰관이 되려고 준비를 하던 시절에도 나는 마른 편에 속했었고 165센티미터의 키에 47킬로그램도 맞추지 못해서 언제나 체중을 계측하기 전에 2리터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 켜고 체중계에 올라서야 했었고 그래서인지 심사원들은 항상 내 몸을 위 아래로 훑어가면서 ‘의외로 체중이 많이 나가네.’하던 말에 ‘좀 있다 다시 재 보자.’고 말을 할까봐 내심 불안하기도 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병원에서 그런 생활을 1년 가까이 반복하게 되면서 정말로 바람이 불면 날아갈 정도로 내 몸이 정말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계단을 오르고 내릴 때 그다지 힘을 싣지 않아도 발 한쪽이 저절로 부유하며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을 정도로 내 스스로도 실제 내 몸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고 또한 내게 식사 시간의 또 다른 의미란 밥을 먹고 위장을 채우는 시간이라기보다는 환자들이 빠진 공간에서 사람들과 유일하게 그 동안의 속사정을 표현할 수 있던 자유발언의 기회쯤으로 여겨졌다는 것이었다.     

   자영이의 아버지는 그 중에서 언제나 가장 말이 많은 편에 속했다. 나는 거의 듣는 쪽에 있었고 아저씨는 언제나 큰 목소리로 쉼 없이 말씀하셨다. 그곳에 있던 우리들의 성비를 감안해 보더라도 남자는 거의 유일하게 아저씨 혼자였고 우리들은 그냥 그 분의 연령과 성별과 외모 등 여러 가지 사정들을 고려하여 상식적으로 그냥 그 아저씨를 존중해 주고 싶던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누가 보더라도 한창 사회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면서 활동을 가장 많이 해야 할 시기이며 자식의 병원비도 벌어야 할 만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체면을 존중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리라. 자영이 아버지는 자기 집엔 화장실이 다섯 개는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한마디로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막대한 재산가구나.’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었었지만 그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 나의 오해였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자영이는 언제나 그 큰 키를 자랑이라도 하 듯 길게 난 복도식 모양의 병실을 마치 패션쇼 런웨이를 연상시키듯 그렇게 자연스럽고도 당당하게 걸어 다녔는데 특별히 항암제, 항생제 등 링거주사를 맞지 않아도 되었던 날에는 아예 수액 거치대에 의지하는 일도 없이 느린 걸음이지만 아주 우아하게 양쪽으로 있던 침대 사이의 가운데 통로를 걸어 다니고는 했다. 민영이와 엄마의 침대는 5, 6번으로 나란히 고개만 돌려도 모든 이야기의 귓속말이라도 나눌 수 있는 자리였지만 자영이는 우리들과 같은 방향의 가장 끝번의 자리였으므로 대화를 나눌라치면 꼭 자영이가 우리 쪽으로 옮겨와야 했었고 비슷한 나이 또래였던 우리들은 누가 환자이고 누가 간병인으로서 보호자인지의 구분 없이 시시콜콜한 이상형의 이야기부터 자못 진지한 미래의 삶에 대한 이야기까지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던 사이였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각자의 비밀이 아닌 매우 사적인 부분까지도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런 시간들이 점점 많아질수록 서로에 대한 우정과 신뢰를 쌓아갔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건강한 젊은 여자였고 두 아이들은 미래가 불투명한 중증의 병을 앓던 환자라는 사실이 마치 나에게는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도 위로할 수 있거나 갚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빚이 항상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미안한 생각이 들도록 억눌렀으며 그래서 나는 항상 내 이야기보다는 그 아이들이 먼저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도록 내 귀를 열어둠으로 해서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대신하고 싶었었다.     

   자영이는 수녀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마치 오래토록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드디어 고백이라도 하는 듯 얼굴까지 붉히면서 말하던 자영이에게 나는 그만 마음의 상처가 되었을 만한 큰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내가 그 말을 듣자마자 그것의 이유를 생각해 볼 틈도 없이 방정맞은 말을 내 뱉어버렸다는 데에 있었다.      

   “자영아, 너 같이 이렇게 타고난 몸매의 소유자가 수녀가 되는 것은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과 같은 거야! 너에게는 수녀보다는 모델이 되는 쪽이 훨씬 더 어울리고 네가 성공으로 갈 수 있는데 까지 가장 짧은 시간이 걸릴 확률이 가장 높은 직업이 모델 같은데 진심으로 그런 생각은 안 해 본거니?     

   그랬다.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자영이가 수녀와 같이 엄숙하고 무거운 기분이 드는 그런 부류와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들었었고 오히려 모델이 된다면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영이는 그 때 나의 말을 듣고 약간 얼굴이 어두워지는가 싶었는데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길다고 치자면 길고 긴 기간을 그것도 하루 24시간동안 함께 살다보면 분명히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나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이다. 내가 비록 대부분의 시간들을 말없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 역시 이곳에서 햇수를 넘기며 살고 있었으니 누군가에게 이미 그런 식의 사람이 되었거나 될 수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고 그 중 절반이상이 가족이나 피가 섞인 관계가 아닌 직업인으로서 그곳에 와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기를 좋아하고 즐겨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생활이라는 것이 단조롭기 그지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험담을 하는 것을 가장 큰 재미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이거나 그마저도 없다면 참을 수 없는 무료함으로 누구도 그 간병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래 버텨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훗날 나의 꾸준함을 보고 항상 며느리를 삼자고 반은 농담으로 진심 섞인 말을 자주 하시던 간병인 아주머니한테서 들은 바로는 자영이네 엄마는 신 내림을 받은 무당이라고 했고 그쪽에서는 꽤 유명하게 알려져 있어서 전국 각지에서부터 사람들이 점을 보고 굿을 하러 오기 때문에 자영이네 집은 그 사람들이 묵어가고 생활할 수 있는 방과 화장실이 그렇게나 많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영이의 엄마는 병원에 오지 못하고 그 아이의 아버지가 대신 자영이의 병간호를 해주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지난번 나의 말이 얼마나 자영이한테 큰 상처가 되었을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볍게 여겼던 그동안의 자영이의 행동 – 지난 크리스마스 때 병실 내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텔레비전의 특집 방송을 볼 때 자기는 하느님이든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종교 따위는 전부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라며 절대로 누구도 믿지 않는다며 아무도 관심 없던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던 문구에 지나치게 흥분하면서 말하던 태도와 그 병원만의 교리를 내세우며 병실 내와 병원 곳곳에 부착되어 있던 성모마리아의 부조 조각상에도 불쾌한 반응을 보이며 지나치게 예민해지던 얼굴의 표정 등 – 이 새록새록 기억나면서 미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그 아이의 가정사를 조금 물어보아도 될 만한 친분과 신뢰를 쌓았다고 생각하면서 언젠가는 자영이와 일부러 그런 식의 대화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내가 병원으로 들어오기 이전의 꿈이고 희망이었던 전문적인 직업여성으로 풍부한 학식을 쌓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성품을 가져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지 하는 미래를 꿈꾸며 살고 있었다면서 그 꿈이 남들이 보기에 한낱 미미하고 하찮은 것일지는 모르나 적어도 그 당시 나에게는 그것이 전부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마의 갑작스러운 진단으로 누구하나 내게 그 책임을 지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 속에서 전날 밤 보던 법전에 꽂아 놓은 책갈피도 제거하지 못한 채로 허둥지둥 그렇게 병원으로 들어와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실은 병원생활 처음 몇 달 동안에는 엄마의 불투명한 미래만큼이나 나를 괴롭혔던 사실이 바로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데서 오는 상실감이었다고 고백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병원 내 누구한테나 각인되었던 ‘천사 표 막내딸’이라는 수식어에 먹칠을 하는 발언이었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내 안의 솔직한 구석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고해성사라도 한 것처럼 속죄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자영이는 자신을 낳아 준 엄마가 신 내림을 받은 무당이라는 사실이 끔찍이도 싫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전국 각지에서 몰려와 집 안에 이상한 그림들과 촛불을 켜 놓고 소복을 차려입고서 북과 장구를 쳐가면서 이상한 춤을 추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주문을 외워가면서 했던 그 굿을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보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공포감으로 자신을 괴롭혔고 결국에는 그런 것들이 쌓여가면서 엄마에 대한 불신과 미움으로 커져버렸다고 했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하던 모습들이 엄마의 위선들로 보이면서 집에 드나들던 뜨내기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며 들리던‘이 집 딸인가. 나중에 저 아이도 엄마처럼 신 내림을 대물림 받을 것인가.’라는 말을 들었던 날부터는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새해나 특별한 절기 때에는 아예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친구 집에서 지내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고까지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영이는 나를 낳아준 엄마가 점쟁이 무당이라는 사실을 프레드 울만 <동급생> 한스 아버지처럼 유대인이면서도 시온주의자들을 끔찍이 혐오했던 것처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몇 배는 더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싫어했던 것 같다. 심지어 수녀가 되는 것을 장래희망이 될 정도까지 몰아갔을 것이고 그 사실의 발단은 어릴 적부터 지켜본 귀신 쫒아내는 굿과 점을 보러 전국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의 심리와 기이한 모습에서 발견한 비이성적인 태도에서 아마도 진저리가 났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엄마가 치료를 끝내고 퇴원을 한 뒤 4주 만에 첫 번째 외래를 갔던 날 병원 1층 수납 창구에서 줄을 서서 있다가 로비에 나란히 놓여 있던 벤치 형태의 의자에 앉아 계시던 자영이 아버지를 우연히 마주치고 나서 그 아이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날 그녀의 아버지는 중증 환자에 대한 의료비 과다 청구 소송의 승소판결로 그동안 납입했던 병원비의 일부를 환급받으러 온 것이라고 했었다. 제법 계절에 맞는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슬리퍼가 아닌 단화를 신고 있었던 그 아저씨의 차림으로 보아 지금은 무균 실에서 병간호를 하고 있는 보호자의 신분은 아닌 것으로 짐작이 되었고 엄마와 나는 반가운 마음을 뒤로 한 채 걱정이 섞인 조바심과 조심스러운 예의를 차리며 정중하게 자영이의 소식을 물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병원을 드나들면서 나에게 생긴 기이한 기운과도 비슷한 능력이라고 한다면 불길한 예감은 거의 언제나 정확하게 들어맞았다는 사실이었다.      

   자영이는 외동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형제간에나 일치할 확률이 높던 조혈모세포 공여자를 찾을 때까지 수술을 미루고 미뤄왔던 것이었는데 끝내 그 아이와 맞는 공여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항암제 투여만으로 혈액 수치를 유지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 그 아이가 삶을 더 이상 버텨내지 못했던 이유였다. 타인의 미래를 점쳐주면서 액운을 막아주던 일을 하신 자영이의 엄마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언제나 딸자식을 애지중지 간호하던 아버지의 부성애 앞에서도 자영이는 끝내 암세포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나처럼 수줍음이 많고 거의 세상과는 담쌓고 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삶을 살고 있던 내게 유일한 소통이 되어 주었던 사람들, 그 중에도 나와 각별한 마음을 주고받던 사람이던 자영이도 이제는 별이 되었다. 대단히 마음이 아프고 슬픈 일이었지만 나는 그 병원 1층 로비에서 너무도 태연하게 엄마의 병원비를 납부하고 그 아저씨에게서도 등을 돌렸다. 죽음이라는 대단한 사건이 너무나 흔하게 벌어지는 병원 내에서는 끝내 눈시울조차 붉히지 않았다. 하지만 집으로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차 창밖으로 깔리는 어둠을 지켜보면서 풍경이 멋진 수도원에서 수녀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고 있을 것만 같은 자영이에게 장문의 긴 편지가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마치 그녀가 정말로 살아있기라고 한 것처럼.      

   이런 나의 생각을 옆에 말없이 앉아 계시는 엄마한테 조차도 내색 한 번 할 수 없었다. 우선은 나보다 더 상심이 컸을 엄마의 심정을 헤아려 보아서 그랬었고 자영이의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라도 흘리게 되면 내가 정말로 암담한 현실을 앞에 두고 자칫 감상적으로 보여 지게 될까봐 감히 섣불리 이야기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아이의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별은 이별이라고 하던 어느 수수께끼 책 속에서 보았던 그 말이 그날처럼 서글프게 다가왔던 날도 없었다. 이별이란 정말로 이렇게 가장 슬픈 별이란 것이구나. 그리고 완전히 어둠이 내려와 앉은 바깥에서 눈을 떼고 다시 눈을 감았다. 우선은 앙상하게 말라버린 내 얼굴이 점점 또렷하게 보여 지는 것이 거북스러워져서 그랬고 이별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엄마의 병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이렇게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한다는 자체가 내 안의 한계를 만들어 내어 어떤 범위의 설정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편이 나았었던 것이었다. 그 만큼 나는 겨울날의 파충류보다 더 차가운 냉정함으로 가슴속 끓어오르던 열정과 슬픔을 억눌러 없애버려야만 그 현실을 살아낼 수가 있었다. 그것이 스물여섯의 봄이 막 움트기 시작한 그 때였다. 아~! 그리고 자영이는 저 하늘 어딘가에서 지금도 멋진 모델처럼 우아하고 당당하게 걷고 있을 것이리라.      

   “언니! 나는 정말로 수녀가 될 거야.”     

   자영이는 괜찮은 듯 웃으면서, 나 또한 전혀 슬프지 않은 척 그렇게 서로에게 등을 돌리면서 뒤돌아섰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서로를 그렇게 담담하게 보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 줌으로써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음을 또한 그것이 12인 우리들만의 특별한 이별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등 켜 끌어안고 마음껏 울고 싶었던 그 진심 따위는 아무런 소용조차 없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우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젊은 날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던 또 한명의 사람이 기억 속 저편으로 멀어지면서 아스라한 슬픔이 이른 봄철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그렇게 아련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결국 선택의 문제     


   내가 이곳에 온지도 어느새 9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2번 자리에 계셨던 아주머니는 우리들 보다 3개월 먼저 백혈병 진단을 받고 이곳으로 오셨으니 딱 12개월, 1년이 지난 셈이었는데 여태까지 여덟 차례의 항암치료를 했지만 관해유도를 이루지 못하고 마치 이 병원 혈액종양내과 전문의들의 임상 실험 대상자라도 된 듯 약의 종류를 바꿔가면서 항암제만 투여 받고 계신 분으로 거기에 따라오는 심각한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계신 분이셨다. 본인은 ‘사회에 있을 때’ 워낙에 기초체력을 잘 쌓아 두었기에 이런 힘든 치료를 버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환자들은 몸속에 또 다른 심각한 유기세포를 보유하고 일반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에 존재하는 온갖 세균들에 저항할 힘이 부족하다는 것과 심지어 위험한 상황까지도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1년 동안 퇴원 한 번 허락받지 못하고 병원에서 살고 있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대우를 해주어야 하며 위로를 받을 만 하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다. 1년이란 지구가 1회 공전을 마치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우주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시간적 개념으로 이런 물리적인 관념보다 시공간을 점쳐볼 수 없을 만큼 추상적으로 받았을 심리적 고통이 엄청났을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치상의 별다른 치료효과를 기대한다는 것도 사실상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잔인한 사실이기는 하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2번 아주머니는 끝내 이식수술도 시도해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실 것이 뻔한 사실이었다.      

   여러 번 그런 모습을 본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병원 밖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백혈병 환자들이 고통 받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경험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백혈병은 혈액 내 비정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백혈구가 지나치게 증식하게 되면서 감염과 질병을 가져오는 심각한 암이다. 일단 발병하게 되면 다른 종류의 암에 비해 완치율이 현저히 낮을 뿐만 아니라 온 몸 전체를 돌아다니며 다른 세포처럼 스스로 신진대사를 하면서 주인인 유기체 세포를 해치고 파괴하기 때문에 특정한 곳을 잘라내 버리거나 하는 외과적인의 치료를 할 수가 없고 항암제와 항생제를 병행하면서 추적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치료할 수밖에는 없다. 백혈병이 다른 암에 비해 유달리 심미적인 느낌이 드는 이유도 어쩌면 메스를 사용한 절개와 절단식의 치료를 행하지 않기 때문에 피를 덜 보게 된다는 데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끝이 좋지 않은 환자들은 거의 마지막 각혈을 하면서 그렇게 조금은 힘든 모습으로 결국 생을 마감하는 것은 똑같았다. 2번 아주머니는 외모와 연령대가 엄마와 비슷한 분이셨는데 엄마가 유난히 결혼과 출산을 일찍 하셨던 탓으로 그 아주머니의 자녀들은 모두 미성년이라고 했었다. 평소에는 전문 간병인이 아주머니의 병수발을 들었고 주말이 되면 한 번씩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하루씩 병원으로 들어오고는 했다. 엄마의 병을 항상 옆에서 지켜보았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발병 초기의 시점으로부터 1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그 충격과 슬픔을 무뎌지게 하는데 충분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지금 나의 심리는 어떤 상태인지, 그저 하루하루를 막연한 의무감속에서 버텨가고 있던 것은 아닌지 부끄러운 죄책감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나의 지리멸렬한 태도와 거의 변함이 없던 행동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이미 나 자신을 감정이 많이 퇴색해 버린 사람정도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과 거의 언제나 말을 삼가고 침묵으로 행동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되면서 나라는 인간에 대한 무게를 참을 수 없어 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이골이 나 있던 간병인들과 보호자들 사이에서 나의 존재가 투명인간과 같이 왕따로 취급받았던 것을 수긍할 수 있었고 사실 관심을 둘 만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가끔 한두 명씩 이런 나를 짜증내 하면서 마치 나를 빈정거리기라도 하듯 듣기 싫은 소리를 늘어놓기도 했었지만 그때는 그런 모습들조차도 내게는 그냥 어린애 장난처럼 보였기 때문에 관심 밖의 일로 여겨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이유도 그 당시 내게는 나를 꾸준히 괴롭히던 단 두 가지의 사실만 진지하게 다가왔었기 때문이었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에 세상에 단 하나 다수결의 원칙이 통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양심’이라고 나와 있듯 일시적으로 보호자가 없는 환자의 침상을 청소 하거나 식판을 대신 날라주고 휴지통을 비워주는 등의 행동을 순번을 정하여 하자는 그들의 제안을 나는 뭐 그리 대단한 봉사로 여기며 젠체하는 모습에 사실 못마땅한 반감이 있었던 터라 언제나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실상 나 혼자 도맡아 해오던 모습에서도 소위 그들만의 ‘쟤는 뭔데 저렇게 혼자 잘난 척이야.’라는 눈총을 받을만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며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을 더 화나게 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내가 이렇게 선행을 하면 엄마와 나에게 분명히 좋은 보답으로 되돌아 올 것’이란 계산된 행동이었다면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2번 아주머니도 보호자가 자주 없는 환자에 속했고 나는 그 분의 불편한 부분을 진심으로 도와드리고 싶던 마음에 아주 사소하며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 해 드려왔던 것이고 사실 병원 내에서 별달리 할 것이 없었던 내게도 나름대로의 활력을 주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도움을 받는 다는 기분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랬다. 사실 병원 내에서의 생활이란 그것이 전부였다. 새벽녘 일어나 엄마를 확인하고 식판을 나르고 소독약으로 침대를 닦아 내고 휴지통을 비워 놓고 또 때가 되면 식판을 나르면서 잔심부름 축에도 끼지 못할 만큼의 소소한 일들을 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고,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엄마의 목욕을 도와드리고 나면 특별한 일거리는 없었다. 아! 그리고 아침 식사시간이 끝난 후 출입문 입구에 나 붙는 혈액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기록하는 것 말고는 별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던 것이다..      

   난 항상 마음을 소극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런 나의 성격은 병원에 들어와서 극대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저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거나 표정 없는 얼굴과 단조로운 말투를 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이는 나와 달리 내면에서 충동하던 갈등으로 마음속은 언제나 복잡한 생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어떤 날에는 아득한 공해 속에 가물거리기만 하는 빌딩 숲 사이로 보이는 창공을 향해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어보기도 했었지만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속 시원한 대답을 기대할 수 없었다.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진 뜻은 없었지만 내 안에는 나의 의무와 의지와는 반대로 불투명하기만 한 미래를 끊임없이 저울질 하고 있었고 그런 질문 자체로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하기 곤란할 정도의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던 것은 나는 지금 백혈병에 걸린 엄마의 유일한 간병인이자 보호자라는 명백한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렇게 나 혼자 묻고 허공에 그 답을 구하는 형식의 대화를 나눌 만큼 심각한 군중의 고독 속에서 지내고 있었던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병원에 들어오고 거의 열 달 만에 온전한 반나절의 휴가를 얻어 외출할 일이 생겼다. 평소 친분을 쌓아온 간병인 아주머니의 양해를 구하고 토요일 오전동안을 온전한 나만의 시간으로 사용하도록 허가를 받은 것이다. 다행이 엄마의 여섯 번째 항암치료가 잘 된 편이어서 엄마는 컨디션을 많이 회복한 상태였고 하루의 절반쯤이야 엄마의 곁을 비워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나는 나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경찰관 공개채용 시험에 원서를 보냈던 것이었다. 그날이 필기시험 날이었는데 사실 거의 일 년이나 손에서 책을 놨던 내가 매일 매일을 전투적으로 사력을 다해 공부해 온 수험생들을 생각해 본다면 이 시험 자체를 무시한 것이 아니냐며 비난할지는 모르나 나는 병원에 들어오기 열 달 전부터 이 시험에 필요한 거의 모든 과목을 외우고 있다 시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공부를 해 두었다고 자신할 수 있던 상태였고 그런 상황에서 순간에 모든 것들을 그만 두고 돌아서야 한다는 사실에 많은 좌절과 상실감에 빠져 지내야만 했기 때문에 그동안 내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수험표 달랑 한 장만을 들고 무거운 책가방을 매고 들어가는 여느 수험생들 틈 사이를 지나서 고사장에 들어갔다. 한 교실에 40명씩 배치되었고 내 수험 번호는 183번이었다. 나는 다섯 번째 교실에 해당되던 곳으로 들어갔다. 시험 시작을 한 시간도 넘게 남겨둔 교실에는 한두 명의 응시자들이 두꺼운 수험서를 펼쳐놓고 막판 암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내 자리를 찾아 앉은 그제야 비로소 몸에 한기가 느껴지면서 졸음이 쏟아지는 피곤함을 느꼈다. 당연히 그럴 법도 한 것이 간밤에 오랜만의 외출을 두고 밤잠을 설쳤을 뿐만 아니라 이미 내게 남은 체력이란 정신력으로 버텨내고 있던 인내심뿐이었으므로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서 책상에 엎드려서 잠깐 눈을 붙이기로 한 것이 30분이 넘도록 잠이 들었었다. 자고 일어나니 교실은 수험생들로 거의 꽉 차 있었고 무엇인가 차분하지 못한 분위기가 나를 엄습하고 있었지만 잠을 잔 탓인지 내 마음은 편안해지고 머리가 맑아진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쉬는 시간이 없이 내리 두 시간 남짓의 시험시간이 끝났다. 답안지와 시험지를 모두 한꺼번에 제출하고 고사장을 빠져 나오는데 점심나절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 사이로 보이는 가늘고 날카로운 빛줄기가 두 눈을 따갑게 찌르며 제대로 뜨지 못하도록 괴롭혔지만 몸 전체를 따뜻하고도 묘하게 간지럽혔다. 8명을 뽑는 시험에 응시자만해도 거의 천명이 가까이 되었던 상황에서 한 교실에서 단 한명의 합격자도 나오기 어려운 높은 경쟁률을 통과해야만 합격할 수 있었던 그리 호락호락하게만 봐서는 안 될 시험이었지만 고사장 정문을 빠져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의 걸음걸이였다.      

   닷새가 지나면 최종합격자 8명의 1,5배인 12명의 필기시험 합격자 명단이 발표될 것이다. 병원 행을 알리는 안내방송과 함께 출구에서 막 들어오는 지하철 한 대를 그냥 먼저 보내버리고 플랫폼 끝자락에 있는 3인용 플라스틱 벤치로 가 앉았다. 지금 이 시간에 병원으로 곧 바로 들어가더라도 엄마는 점심식사를 끝내고 처방약을 드시고서 약기운에 취해 잠깐 낮잠을 주무시거나 한가로이 계실 시간이 될 것이다. 광고소리, 끊이지 않고 들리는 지하철역의 소음과 걸을 때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붐비는 다수의 사람들과 그들만의 쉼 없는 수다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숨 냄새 진동하는 공간에서 나는 매우 특별한 고요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제까지 전혀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에 뱃속에서는 위가 뒤틀리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어느새 내 몸의 전체는 마치 물살이 전혀 일지 않는 고요한 호숫가에 피어난 달맞이꽃처럼 자욱한 물안개에 쌓여 이제는 평온함마저 느꼈고 내가 어째서 이런 혼란 속에서 이다지도 고요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 시간동안 나를 괴롭히던 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오던 불안감, 내 능력에 대한 불신, 그리고 꾸준히 나를 괴롭히는 만성 피로와 빈혈에서 오는 육체적인 위축들이 만들어낸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알아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불과 몇 시간 전, 몇 달 동안 책 한번을 보지도 않은 채로 내 멋대로 고사장엘 들어가서 시험을 치르고 시험 감독관에게 답안지를 제출하며 교실을 나설 때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시원한 쾌감을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합격을 확신했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 벤치에서 일어나 안전선 안쪽 출입문이 열릴만한 곳에서 줄을 섰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엄마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고 빨리 병원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었다.      

   입춘은 이미 한 달 전의 일이고 아직 춘분이 지나지 않은 3월의 정점에 있었지만 아직 봄이 가까이 왔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만큼 옥상에서 맞는 바람은 콧물이 나올 정도로 차가웠다. 실제로 계절은 달력보다 늦게 오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제야 겨우 겨울이 물러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나의 합격소식을 궁금해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Yes!’라고 대답할 수 있다. 사실 필기시험 합격자 발표하는 날 아침에 나와 친한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나는 그 전화의 발신인을 보고 이 전화가 나의 합격소식을 알려주는 전화임을 직감했으며 친구의 말은 대뜸 ‘너 그렇게 약한 몸으로 체력장은 응시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에게는 내가 시험을 보았고 그래서 그 필기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가뜩이나 나에게 커다란 빚을 진 것으로 생각하면서 항상 미안해하던 그들한테 또 다른 안타까움으로 심적인 부담감을 안겨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체력검정이 있던 날, 나는 시험장에는 가지 못했다. 그냥 그것은 아직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내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던 계기로써 충분한 보상이 될 만한 사건이 되었고 거의 일 년 가까이 내안에서 지속되어 오던 선과 악의 대결에서 선이 승리를 하게 된 것으로 비로소 자아를 회복할 만한 근거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누군가가 ‘그 때 당시 그 상황에서 완전히 미련을 버리면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느냐?’고 물어 본다면 이 경우 나의 대답은 ‘No!’에 가깝다. 나는 너무나 젊고 건전한 영혼을 가진 영리한 사람이었고 누구보다도 빠른 적응력으로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다는 의욕으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에 인생의 내리막길에 선 자와 같이 무엇이든 내려놓음으로써 마음을 비웠다는 것은 나와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했던 당장 지금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무엇이라도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나에게 다시 솟아나고 있었으므로.     

   엄마도 한 번쯤 퇴원을 허가 받을 수 있었지만 퇴원을 하고 고향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절차는 만만치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언제나 회진이 있던 날에도 엄마가 언제쯤 퇴원을 하 실 수 있을 것인지 선뜻 물어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며칠 전 엄마가 화장실 앞에서 졸도를 하면서 옷을 입은 채로 자신도 모르게 용변을 봤던 일을 겪었던 터라 더 용기를 내기도 어려웠다. 만일에 엄마가 그 많은 양의 설사를 하지 않았다면 몸속에 가득 차 있던 독소가 배출이 안 된 상태에서 미성숙 백혈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호중구가 갑자기 비정상적으로 증식하게 되면서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되어 응급실로 옮겨갈 수도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날이 있은 후 며칠 뒤, 12인 무균 실에 지금까지 왔던 사람들 중 최고의 고령 환자인 할머니 한 분이 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급성백혈병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급성골수성백혈병은 고령에서 발병률이 높아 환자의 평균연령이 70세에 이른다고 한 것을 어느 의학박사의 논문에서 읽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또 다른 문제로 언급되었던 것은 점차 사회가 고령화되면서 AML환자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으로 문제는 몸속에 아무런 질병이 없던 노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고연령대의 경우 동반 질환과 몸의 안팎의 모든 기능이 저하되어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보통의 백혈병을 앓는 환자에게 처치하는 치료의 방법을 쓸 수 없다는데 있다고 했다. 그래서 보통 이렇게 고령 환자의 경우에는 무조건 치료를 해야만 한다고 하는 식 보다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통해 스스로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유도하는 쪽이 더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79세의 이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을 하시는 선택을 하신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이 분은 상황이 좋은 편에 속했다. 만일에 백혈병 진단을 받은 고령 환자가 치매와 같은 기저질환이 있는 분이셨다면 상황은 정말로 난처하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죽음과 삶에 대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 앞에서 진지한 고민조차도 해볼 여력이 없는 상태까지 와 버린 그야말로 최악의 경우였던 것이었다. 보통 고강도 치료를 선택하여 암세포와 싸워 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고령의 환자들은 병원에 입원을 하여 치료 도중에 중환자실이라도 갈 각오를 하며 치료를 받았고 반대로 항생제 투여 및 수혈과도 같은 낮은 강도의 치료법을 선택한 환자들은 다시 말해, 마음을 비우거나 자신의 병을 받아들였던 환자들은 병원에 입원을 하지 않고 치료를 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그런 선택을 내렸다. 사실 두 가지 선택을 두고 어느 쪽으로 ‘좋다 나쁘다’식의 편향된 의견을 주장할 수도 없는 것이 고강도 치료를 받겠다고 마음을 먹은 환자들도 그 선택의 대부분의 결말은‘항암제에 의한 살인’이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 수가 많았었고 양자택일이라는 면에서 낮은 강도를 선택했던 사람들과의 생존 기간도 별로 차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경우에는 특히 의사에게는 어디까지나 사람이란 숨이 멈추는 날까지 치료로 인해 생활이 너무 힘들거나 삶의 질이 처지게 되는 등 고통이 덜한 쪽으로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치료 처방을 내리기 전에 환자와 보호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 주고 의견을 물어보아야 하는 직업에서 오는 도적적인 남다른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12인의 대열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시고 퇴원을 선택하셨다. 잘하신 것이다 아니면 왜 그러신 걸까 이런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사람에게는 누구한테나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하는 마땅한 존엄성이 있으며 이렇게 내리기 어려운 결정을 두고 거의 모든 것에 존재하는 양면성의 논리로 장단점을 논할 명분은 없는 것이라고 봐야 옳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발전된 도심 속 안에도 어느 덧 봄이 찾아왔다. 계절의 변화가 사람의 심리를 변화시켜 당장 무슨 일이라도 새로 시작해 보고 싶은 열정이 생기게 하는 결심을 누구나 한번쯤은 해 보았으리라. 그 봄, 내 나이가 20대의 후반에 들어서고 있던 그 순간에 나는 마흔이 넘은 사람에게나 있을 법한 그런 심리의 변화를 느끼고 전에 조급하게 생각되던 일들이 조금은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차츰 내면의 감정이 이완되어 표정과 몸짓으로 나타나던 모습에서 나는 거울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변화를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주치의 말대로라면 보통 예후가 좋은 M3의 경우와 같이 엄마에게 여섯 번의 관해유도 항암치료는 거의 성공을 했다고 봐도 좋다고 했다. 말초혈액 검사상으로도 모든 백혈병의 증상을 찾아 볼 수 없었고 관해의 유무는 백혈병 치료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만큼 중요했던 것임에도 어려울 것 같았던 엄마가 해 내신 거였다. 거의 1년 전 백혈병을 몰랐을 때 엄마의 모습은 꽉 찬 마흔 살 아주머니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커트 단발식의 파마머리에 약간은 배가 나오고 모가 나지 않은 동글동글한 형태의 몸으로 비록 매우 건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아직 갱년기는 찾아오지 않았던 보통의 우리들 엄마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 엄마는 머리카락은 이미 한 올도 남아있지 않은 대머리로 속눈썹까지 반 이상 빠져버린 외모로 한 눈에 보더라도 10년 이상은 늙은 모습이었고 그 일 년 사이에 이미 멘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하기야 그것도 이해할 만한 것이 항암치료가 한 번씩 회전될 때마다 불임이 될 확률은 10%씩 높아졌기 때문에 보통 백혈병에 걸린 미혼 남성이거나 자녀가 없는 경우에는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정자보관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진단 전의 생활이란 모든 것이 일상적인 것으로 먹는 음식에서부터 생활하는 환경까지 보통의 우리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푹 삶아 낸 무균식과 끓인 물, 과일 통조림, 캔 음료 등 모두 멸균 처리된 음식을 제외한 먹거리들은 일절 금지되었고 생활공간 자체도 소재 자체에서 어떤 이물질을 생산해 내는 목재로 된 가구 등 생활용품 사용은 자제를 해야 했으며 어느 시간 어떤 장소를 가더라도 항상 소독약을 분신처럼 지니고 다녀야만 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진 모습이었던 것이다. 또한 매 식사 때마다 먹어야 하는 항생제와 항바이러스제, 항진균제 성분의 약은 손바닥에 부으면 한 가득이 될 정도로 많은 양이었고 사실 관해가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면역력이 저하된 환자에게 쉽게 오는 폐렴과 같은 기타의 감염성 질환을 예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이라도 해도 될 만큼 백혈병의 치료라는 것은 관해 후의 치료가 그만큼 무거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끝난 것이 아니라 한 고비를 넘긴 또 다른 시작이었고 여태까지 과정의 연속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골수이식이 없이 항암치료만으로 종결할 경우 완치율은 반도 안 되었고 향후 5년 동안 재발 여부를 감시해야만 했다. 만일에 재발이 되었다면 관해 치료와 더불어 이번엔 반드시 골수이식까지 해야만 하는 그야말로 심각하고 지루한 병이 백혈병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분홍색 니트 모자와 하늘색 마스크를 쓰고 12인의 무균 실을 수액거치대의 도움도 나의 부축도 없이 스스로 걸어 나오셨다. 여왕이 행차를 하 듯 남겨진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일일이 쾌차를 기원하는 인사를 건네면서 처음 병원에 들어올 때 ‘이 신발을 신고 내가 다시 이 병원을 걸어 나갈 수 있을까?’하던 그 걱정을 이제는 정말 해 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당당히 걸어 나오셨다. 시한부인생 3개월 선고를 비교해 보아도 딱 1년이라는 시간은 그 기간의 4배를 연장한 것으로 어찌되었든 엄마와 나는 이제 다시 12인 무균 실로는 돌아올 일은 없다는 듯 미련 없이 후련한 마음으로 환자 수송용 승강기 대신 일반인용 승강기를 타고서 보통 사람들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1층 지상까지 내려왔다.      

   “엄마, 기분이 어때? 바람이 차지 않아?”     

   이미 꽃샘추위도 전부다 물러난 완연한 봄날의 정오, 매연과 꽃가루가 뒤섞여 희뿌연 공해가 한 겹 내려앉은 층 너머로 은근히 빛나던 봄 햇살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부드럽고 우아하게 통과하며 엄마와 마주 잡은 우리의 손을 따뜻하게 녹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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