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에 집으로
2004년
또 다른 시작
엄마는 거의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느 이른 여름날 신부전관련 정기점검을 나가셨다가 이듬해 늦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1년 전에 엄마가 쓰던 나무로 된 네 칸짜리 장롱과 그 역시 나무로 되었던 텔레비전 받침 서랍장은 창고로 쓰는 방으로 치워져 있었고 그 대신에 새로 장만한 것으로 보이는 뿔로 된 텔레비전 선반 겸으로 사용되는 양쪽으로 분리되어 2층 구조를 이룬 네 칸짜리 서랍장이 들어앉아 있었다. 그 녀석이 장차 엄마가 사용하게 될 방에 떡하니 먼저 들어와서 이 방의 공기를 플라스틱 분자구조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오히려 화학제품보다는 나무로 된 것이 더 건강에는 이로울 듯 보이나 오래된 나무에서 서식할 수 있는 좀 벌레나 곰팡이가 면역력이 저하된 사람에게는 심각한 감염질환을 옮길 수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해롭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무조건 강철로 된 식기류를 사용하셔야 했다. 질그릇은 이온 물질이 나올 수도 있어서 안 된다는 이유였고 물론 유리제품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사용 때마다 열소독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파손될 위험이 커서 다루기 더 힘들었기 때문에 유리제품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오빠는 내 주문대로 거의 이 모든 환경을 준비해 두고 계신 모양이었다. 다른 식구들과 같은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되었었기 때문에 나는 항상 가족들의 식사를 차리기 전에 엄마의 밥상을 미리 봐드리고 부엌에서 안방까지 불과 열 걸음도 되지 않던 그 잠깐의 이동사이에 음식에 병균이 들러붙을까하는 염려로 모든 음식은 그릇에 담겨지자마자 제 뚜껑으로 덮어서 날랐다. 이 모양새는 병원에서 배식 받는 것과 거의 비슷했고 반찬의 가짓수는 늘 두세 가지에 국과 밥을 따로 준비했는데 이렇게 하루 세끼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병원에서 아주 잠깐씩 누렸던 자유 시간은 거의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가 마셔야 할 물을 끓여서 한 번에 음용할 만큼씩 밀봉된 유리병에 보관했는데 내가 새벽에 눈을 뜨게 되면 가장 먼저 했던 일도 유리병 소독과 가스 불에 물주전자를 올려놓는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입는 속옷은 마치 신생아의 배냇저고리처럼 푹푹 삶는 빨래를 해야 했었고 겉옷마저도 세탁기에 돌리지 않고 직접 손으로 빨았다. 엄마의 방청소는 병원에서와 마찬가지로 분무기에 희석시킨 소독용 에탄올을 사방에 뿌리면서 먼지를 일으키는 빗자루는 쓰지 않고 가재 수건으로 최소한의 먼지하나까지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닦아 내야만 했다. 그리고 관해가 목표치에 도달했으니 앞으로 3개월 동안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서 말초혈액 검사를 해야 했고 그 다음 3개월 동안엔 이 주일에 한 번씩, 또 그 다음 6개월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외래를 가야 했고 그렇게 관해유지를 1년간 한 경우라면 그 이듬해는 2개월에 한 번씩 몸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아무런 증상 없이 만 5년을 지낸다면 그제야 백혈병이 완치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집 앞에는 두엄을 실어 나르느라 경운기의 시끄러운 소음이 낮 동안엔 한 번도 울리지 않았던 날이 없었고 울퉁불퉁하게 되어 있던 시멘트 농로를 지나가는 경운기는 길 중간 중간에 두엄덩어리를 흘리고 지나다녔는데 또 다시 그 길을 지나가던 다른 경운기들이 두엄덩어리들을 깔아뭉개고 다녔기 때문에 두엄에는 선명하게 경운기 바퀴자국이 나 있기도 했다. 들판의 이곳저곳에서 풍기던 두엄냄새로 약간 귀찮을 정도의 후각이 자극되었지만 감각기관 중 후각만큼 예민하면서도 무딘 것이 없었으므로 곧 그 냄새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게 되었으며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오로지 시골의 공기는 정령 맑고 투명하다는 것뿐이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우리 동네를 에워싸고 있는 산 능선 뒤로 넘어 보이는 다른 지역에 있을 법한 산꼭대기까지 다 보일 정도로 공해 한 점 없는 하늘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원 옥상 층에서 내다본 빌딩 숲 사이로 보이던 희뿌연 안개가 뒤덮인 대기와는 자못 대조적인 것이었다. 나는 사춘기 시절 대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 줄곧 이 산골 동네에서 살았던 것을 몇 번씩이고 불만을 품어왔던 것에 조금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런 맑은 공기가 정말로 엄마의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은 분명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이곳이 엄마와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줄곧 떠나와 지내다 이렇게 매일 매일을 집에서 있다 보니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에 대한 남다른 특별한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그 중에는 엄마의 남편, 나의 아버지에 대한 삶을 이렇게 진지하게 지켜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자각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보통의 상식으로‘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그렇게 철이 드는 거야.’식의 그런 시간상의 물리적인 의미보다는 어쩌면 어느 한 시점에서 득도를 했다는 옛 성현들의 경우와도 비슷하게 다가왔는데 어떤 날엔 문득 아버지가 정말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이야기는 절대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님을 미리 밝혀 둔다. 아니 이제까지의 이야기도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소설 같은 이야기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나머지 한 자식으로서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고단했던 삶을 기억하며 존경하는 마음을 표시하고 싶은 이유에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젠가는 반드시 다가올 내 죽음의 자리에서 거액의 유언장은 아니더라도 소소하지만 결코 거짓이 없는 한 사람의 인생수첩을 남겨주고픈 소박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몸의 절반을, 또 나머지의 절반 이상을 떡갈나무의 뿌리로 단단히 동여 묶어서 최대한 둥그런 모양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커다란 바위덩어리, 코앞에 천고지가 넘는 웅장한 적상산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에 소재 - 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 듯 아주 안정된 모양으로 동네 한 가운데에서 자리 잡고 있는 우리 동네 동산! - 이 동산은 산이 아니다. 나의 오래된 할아버지께서 이 동산의 발등을 빌려 주춧돌 조금 수월하게 세워 쌓은 집에서 몇 해 전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도 나처럼 손자로 태어나서 계속 살아왔으니 사실 우리 가족은 동산에 월세 한번 낸 적 없이 몇 세대를 거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오고 있는지 모르겠다. 비단 우리 집뿐만이 아니라 동산이 평지와 맞닿은 곳을 빙 돌아가며 도대체 몇 채의 가옥이 있는지 헤아려 본다면 이제껏 동산이 보여준 포용력이란 자기 덩치 큰 것을 으스대며 사람들 발뒤꿈치에도 못 따라오게 만든 큰 산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넉넉함까지 상상력으로만 보이는 웅장함을 갖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 중에서도 우리 집은 아래 큰 마을에서 그것도 햇살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정남향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 층수에 따라 시세가 결정되는 요즘의 아파트처럼 다른 집들 보다 더 많은 것들을 동산에 빚지며 살아오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는 1955년 음력 4월 7일, 석가가 그보다 약 2천 579년에서 하루가 빠진 BC 624년 음력 4월 8일에 인도 왕족의 으리으리한 왕국에서 태어난 것과 달리 흙으로 벽을 바르고 지붕에 볏단이 올라간 초가집에서 태어나셨다. 동네의 산파가 할머니에게서 아버지를 받아내셨을 것이고 요즘의 그 흔한 수술용 메스, 소독약 한 방울 없이 오로지 삶아낸 가위 한 개로 모든 걸 마무리 지어야 하는 순수한 자연분만으로 태어나셨다. 엄밀히 따져보면 요즘의 자연분만은 순수한 자연분만이 아니라 최대한 칼을 쓰지 않고서 최소한의 봉합으로 끝내지는 말 그대로의 자궁의사의 인공적인 처방이 가미된 것인데 아버지의 출생 이후 25년이나 지난 그 뒤로 이 집의 마지막 탄생이 되었던 나조차도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연분만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 집의 생활여건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에도 매우 어려운 열악한 환경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의 근원에는 부모가 있다. 내 본연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결정지을 수가 없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존재가 시작의 필수적인 요건이다. 그리고 일단 어머니와의 연결에서 잘려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스스로 어떤 결단의 주체가 되어 나아갈 수 있는 독립체로서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 동물에게는 여러모로 차이가 있지만 보통 사람이 공식적인 성인으로 취급을 받으려면 20대가 넘어야 하고 우리는 더욱이 갈수록 부모의 품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어려워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캥거루 족 - 취업을 못해 부모에 의지해 살거나, 취직을 했는데도 임금이 적어 독립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을 지칭하는 신조어 - 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조차도 비난받는 주체가 아닌 동정의 대상이 되는 분위기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독립이라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부모의 보살핌과 누리고 받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마치 당연한 수혜자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간다. 나는 아주 가끔, 한 번씩 아버지도 그런 사람들처럼 평범한 환경에서 나고 자라서 적당한 교육을 받으며 사셨다면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실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누구보다 영민하신 두뇌를 갖고 계신 분으로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몇 안 된 대단히 정직한 성품을 지닌 사람인데 그 두뇌를 제대로 한번 펼쳐 볼 교육을 받으신 적이 없으시고 또한 정직함만으로 삶을 지속시켜 오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경제적 환경 속에서 자라나셨기 때문이었다. 그건 마치 보통의 정상적인 수목이 아닌 덩굴손과 같이 흙에 닿으면 뿌리로 변하고, 바위가 닿으면 단단히 늘어 붙어있는 칡덩굴처럼 무엇에든 필요한 존재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력을 해 왔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남을만한 것이었다.
몇 해 전, 엄마의 거의 유일한 피붙이 형제인 제주도에 살고 계시는 막 외삼촌께서 우리 집을 방문하셨을 때였다. 두 분이 나누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막연히 상상으로만 다가왔던 아버지의 고단한 삶의 순간들이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는데 만일에 내가 아버지였더라면 그렇게 살아나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동안 멋도 모르고 투정만 부리면서 부모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만 여겨왔던 나의 철없던 행동에 심한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던가 하시면서 한창 논의 흙을 갈아 뒤엎을 만한 시기인 이른 봄이 되면 동네에서 성격 온순하고 일 잘하기로 소문난 소를 품삯을 치르고 하루 빌려와서 쟁기질을 하셨다고 하였는데 아주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소를 앞세워 하시던 그 쟁기질을 보면서 덩치 큰 소를 잘 다루어야 하는 기술이 필요하지만 쇠 덩어리로 된 쟁기의 균형을 잡으며 반듯한 고랑을 탄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노동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은 내 마음속의 심금을 울릴만했다. 정말로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고된 일을 하셔야만 했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더욱더 그런 생각이 내 자신을 괴롭혔던 것이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하셨다. 왜 그랬는지는 자세히 적어두고 싶지 않다. 가장 큰 원인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것밖에는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이유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내 짐작을 썼다가는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빠져들게 될까봐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또래들이 까까머리로 중학교에서 영어 알파벳을 공부하고 있을 사이에 아버지는 남의 집 품팔이 일로 돈을 벌어야만 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기 10년 전, 1969년 15살의 나이부터 한 가족의 아버지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미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던 것이다.
두 분의 술잔 비워지는 속도처럼 말씀을 주고받는 횟수도 점점 느려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지금껏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또 앞으로도 결코 경험해 볼 수 없는 그런 생활들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가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별빛을 두고 이미 오래전에 우주 공간속 저편에서 내 뿜어져 나오는 빛임을 쉽게 지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고단한 소년 시절을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가족과 미래의 가족에게 바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가장이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가져다 준 불가항력적인 결과였든 결연한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었는지에 상관없이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그런 소년기가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 명의로 된 땅도 있고 제법 살만하다 싶으니 엄마에게 그런 병이 찾아온 것이었다. 박복한 사람은 이리도 계속 박복한 경우만 당하면서 살아야 한단 말이던가.
초여름 오후 나절의 햇살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상념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나치게 감정이 격해지기 전에 생각을 그만 이쯤에서 끝내고자 마당을 나와 집 담벼락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서 한동안 아무생각 없이 걸었다. 걸을 때 경운기 바퀴자국에 길바닥에 바짝 늘러 붙어 있는 흙에 뒤엉킨 두엄덩이를 보고 문득 동화 <강아지똥>에 나온 길 가의 흙덩어리 아저씨가 생각이 났다. 처음에 개똥을 만나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며 비웃던 그 흙무덤은 나중에는 개똥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것에 사과를 하고 사실은 자기 자신이 개똥보다 못한 존재라고 슬퍼하게 된다. 오히려 이미 자기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될 되로 되란 식으로 개똥을 무시하면서 심리적인 위로를 받으려고 했던 이유같이 보였다. 하지만 흙무덤이 반성을 하고 개똥의 엄연한 존재 이유를 인정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레를 끌던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에게 들려 다시 전에 살던 밭으로 되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정말 옛말처럼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라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로 너무 흔해빠져서 그 존재 의미가 없던 개똥이 내리는 비를 맞고 땅속에 거름이 되어 민들레꽃을 피운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저 길바닥에 경운기가 흘리고 간 저 두엄 덩어리는 시멘트 바닥에 스며들지도 못하고 도대체 무엇에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이제까지 나도 길가의 개똥처럼 쓸모없는 존재였는데 갑작스러운 엄마의 발병으로 그제야 나의 역할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하던 생각이 내 안의 깊숙한 곳에서 조금씩 움트고 있던 ‘내 생활 전반에 대한 일종의 피해의식에 대한 따끔한 일침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계속 해서 100미터 쯤 더 걸어내려 가다가 어릴 적에 주인 몰래 채 익지도 않은 것을 한 개씩 따 먹었던 호두나무 옆에 앉아서 서쪽 능선에 걸린 구름과 해를 번갈아 보았다. 두꺼운 구름위에 올라탔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하는 것이 마치 어린 아이들의 숨바꼭질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목마를 타고 노는 아기의 장난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은 다 바람이 해 낸 것임을 바람의 영향력으로 구름과의 힘겨루기에서 해는 그냥 구경꾼에 불과한 것임을 알고 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결코 눈으로 볼 수도 없는 그 바람이 아버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자 눈 속에 고인 눈물이 투시경라도 된 듯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결이 보이는 듯 말 듯 했다. 해를 반쯤 먹어버린 앞산의 능선은 장열하게 불타는 붉은 노을 치맛자락에 덮여 있고 이것은 나는 이제 모든 상념을 떨쳐내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엄마를 위한 그리고 나머지 가족을 위한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내려갔던 길을 다시 돌아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이로써 이제까지의 내 인생의 한 단락을 차지하는 종지부는 찍어지는 것이며 이 시간 후부터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또 다른 인생의 시작점이 된다는 것임을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다.
여름은 그렇게 지나가고
시골에서의 4계절이란 도시에서보다 그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고 명확해서 달력을 앞서가거나 더디게 온다는 느낌이 없이 간혹 반항하는 아이같이 어깃장을 놓기는 하지만 대부분 성실한 모범생과 같다. 날씨는 여름날의 삼복더위를 바른대로 수행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맘 때는 들에 나가면 상추를 따다가 겉절이를 해도 좋았고 밭고랑 사이사이에 심어 놓은 토마토와 참외와 수박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엄마가 농사를 짓던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경사진 고추밭 맨 꼭대기에 있던 모양이 아주 예쁘게 생긴 복숭아나무에 열린 복숭아를 따는 것을 무척 기다리던 때도 꼭 지금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호두나무 묘목을 밭의 가장자리에 빙 둘러 울타리 식으로 아버지가 직접 심어 놓았던 것들이 이제는 전부 다 자란 어른 나무가 되어서 늦가을에 수확할 호두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 밭은 내가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던 어린 시절에는 마늘도 심고 고추도 심었고 참깨, 콩, 옥수수 등 거의 모든 밭곡식과 채소들이 있던 보물단지 같은 곳이었다. 밭 맨 아래쪽으로는 누에가 좋아하는 뽕나무들이 한 줄로 심어져 있었는데 뽕잎은 따다가 집에서 부업으로 하던 누에한테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먹이거리가 되었고 검게 잘 익었던 오디는 노란 양은 주전자에 가득 따 담아 간식으로도 먹고 술도 담그고 남은 것은 설탕절임으로 식초를 만들어 놓기도 했었다. 내 행동과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나기 시작할 때부터 그 밭은 겨울을 빼고는 항상 제 집 드나들 듯 부모님과 함께 있었던 곳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우리 집에도 과실수가 있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웠는데 아버지가 복숭아를 한 자루 따가지고 오시던 날에는 모양이 크고 예쁜 것들을 우선 골라내어 신문지로 정성스럽게 싸서 일단 창고에 보관해 두고 벌레 먹은 거나 무녀리로 미처 크게 자라지 못한 것들부터 먹었는데 한 번은 무턱대고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가 통통하게 살이 찐 복숭아 애벌레가 몸통의 절반을 복숭아 과육에 꽉 끼인 채로 빠져나가려고 상채만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복숭아를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서 아버지는 웃으시며 복숭아 애벌레를 먹으면 미인이 되는 법인데 이제 나보고 지금보다 더 예뻐질 거라고 놀려주시기도 했었다. 물론 아무리 어린 나이에도 예뻐진다는 그 말에 속아 넘어가 ‘그 끔찍한 애벌레를 단 한 마리라도 어떻게 먹을 수 있단 말인가.’하고 생각하다가도 ‘정말 예뻐질까?’그 농담을 믿고 싶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뒤로는 무턱대로 복숭아를 입으로 베어 먹는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또 호두열매는 어떠했던가. 우리 집에 그 비싼 호두가 흔해빠진 주전부리가 될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고 첫 해 수확은 생각만큼 많지는 않았었지만 그래도 우리 호두나무에서 딴 열매라는 그 뿌듯함이란 그것을 까먹는 재미보다도 몇 배는 행복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밭이 이제는 우리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퇴원하는 날 병원의 원무과에서 나오시던 아버지와 오빠의 얼굴이 무척 당당하게 보여서 나는 정말로 오빠가 처음 나에게 했던 그 약속 - 엄마가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던 - 을 지켜냈구나 회상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도시에서 작은 아파트 값 한 채 정도는 장만할 만큼의 금액이던 그 병원비를 어떻게 쉽게 마련할 수 있었겠는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았다면 아버지와 오빠의 결단이 쉽게 이해되었고 나 역시 그런 상황에서는 오로지 그 결정밖에 내리지 못했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한 번씩 나를 보면 ‘네가 엄마를 살렸구나.’하셨지만 엄마의 치료에 있어서 나의 역할이란 단지 형식에 그치는 것뿐이었고 사실은 그 밭이 엄마를 살려낸 장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치료가 잘 되었고 그 밭은 이제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백혈병에 걸리게 된 것도, 그 밭을 팔아치워야만 했던 것도 전부다 누구의 의지대로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받아들여야만 했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었다.
냇가 옆에는 여름의 정점에서 마냥 자란 잡풀들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맨 종아리로 헤집고 돌아다니려니 물을 잔득 머금어 드세진 줄기들은 모양 그대로의 생채기를 내 버렸다. 나는 따가움도 잊은 채로 돌담으로 쌓인 벽으로 둘러싸인 이삼십 미터 정도의 폭이 되는 규모의 저수지 난간에 쪼그리고 앉아서 허리까지 물이 차는 곳까지 들어가서 통발을 놓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저수지 수면에 열기가 한 번 더 식은 채로 불어왔기 때문에 바람을 맞는 것만으로도 더위는 고사하고 시원함마저 느낄 수가 있었고 그늘진 곳을 찾아갈 것도 없이 내리쬐는 햇볕아래 앉아만 있어도 그냥 괜찮았다. 올해는 평년보다 비가 잦았던 탓으로 수위는 높아졌지만 맑아진 물속은 제법 깊숙한 곳까지 보였는데 아버지는 지금 민물 새우를 잡기 위해서 통발을 놓고 계신 거였다. 나는 최대한 물이 잘름거리는 데까지 가까이 내려와 앉아 있었고 엄마는 둑의 맨 위쪽에 모자를 쓴 채로 앉아 계셨다. 바람이 만든 가벼운 물결에 일렁이는 수면에는 푸른빛의 하늘과 구름이 같이 흔들려 비치고 있었고 저 멀리 산과 맞닿은 저수지가 끝나는 가장자리는 마치 종이 한 장을 정확하게 접어서 만들어내는 미술 기법인 데칼코마니를 연상케 하 듯 똑같은 풍경이 그대로 물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물 가장자리에서 멀어질수록 푸른빛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 깊이를 가늠해볼 요량으로 손에 잡히는 돌멩이를 집어 던지기도 했는데 통발을 놓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따금씩 고개를 돌려 엄마를 확인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걸음을 옮기실 때마다 퍼지던 가벼운 물결에 바짝 마른 돌멩이는 물속에 몸을 담갔다가 뺐다가하기를 반복했다. 통발속의 새우는 한 끼로 먹을 매운탕과 튀김을 할 만큼의 정도였고 소쿠리에 담긴 몸이 투명한 새우들은 마치 이제는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 신세를 알기라도 하듯 겁을 먹은 것처럼 굽은 등 모양 그대로 팔딱팔딱 뛰었지만 그다지 애처롭게 보이지는 않았었다. 그것은 내 감정이 메말라 버려서 그렇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냥 민물 새우 자체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하는 쪽으로 생각해야 맞을 것이다. 또 어떤 날에는 마을을 지나는 냇가를 쭉 따라서 민물고기를 잡기도 했는데 너무 어린 나이부터 자신의 취미가 무엇인지 조차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생계만을 위해 살아왔던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통발을 놓아 물고기를 잡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특별히 해야 될 농사일과 일거리가 없던 날에는 거의 이렇게 아버지는 엄마와 나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물고기를 잡았는데 나는 물속에서 작은 돌덩이들을 떠들러가면서 고둥을 잡아다 된장으로 간을 해서 국을 끓여내기도 했었다. 그것은 별달리 양념을 하지 않더라도 시원한 국물을 내는 미묘한 생물체였다. 또 아버지한테는 벌꿀 색 그물로 된 투망이 있었는데 면적이 넓은 곳에 한 번씩 투망을 던져 끌어올리는 물고기를 빼내서 쇠로된 손잡이가 달린 플라스틱 통에 옮겨 담는 일도 내 몫의 일부였다. 잡아온 물고기를 손질하고 매운탕을 끓이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었고 아버지는 보통의 음식솜씨를 가진 여자들도 못 따라갈 정도로 손맛이 매우 좋았다. 나는 비록 민물고기를 잘 먹지 않았지만 이런 일들이 아버지와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아버지를 더 이해할 수 있었고 더 측은하게 만들었던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들처럼 이전에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던 존경심과 자식으로서 지녔던 마땅한 마음을 뛰어 넘어 정말로 아버지는 특별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 꼬마였을 때에도 이렇게 거의 항상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때는 겁도 없이 아버지가 잡아낸 물고기의 볼록한 배를 꾹 누르면 부레가 배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아도 잔인하다는 생각보다는 물고기 몸속에 하얗고 작은 풍선이 들어있는 것이 마냥 신기했었고 그러다 냇가 옆 바짝 마른 돌덩이에 앉아서 그냥 아버지의 모습을 멍하니 보거나 아버지가 사온 봉지과자를 뜯어먹기도 했었다. 한번은 내 동무들 중에 꽤나 개구쟁이였던 녀석이 아버지의 투망을 몰래 가져갔다가 동네 방죽에 빠뜨려버렸던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사실을 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내가 얼마나 혼이 나게 될까 하고 며칠 동안을 얼마나 걱정 속에서 지냈었는지 모른다. 다행이 그 녀석은 나에게 자기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면서 한번만 용서 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해 왔었고 아버지는 투망이 없어진 사실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묻지 않으시고 며칠 뒤에 새 투망을 구해가지고 오시면서 그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아도 아버지는 아마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지만 나의 불안한 심리와 내 친구 녀석의 호기심을 그냥 너그럽게 이해하시고 넘어가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투망은 그 무게가 상당해서 열 살도 안 된 꼬마에게는 어른처럼 그물이 넓게 퍼지도록 던질만한 힘이 없는 것이 당연했고 사내였던 내 친구가 얼마나 투망이 던져보고 싶었을지 그 심정을 이해해 주신 거였다. 사실 여자인 내가 보아도 아버지가 어깨에 차곡차곡 투망의 그물을 쌓아 올리고 물가를 살살 걷는 모습은 마치 고대 로마시대 사람처럼 튜닉을 입은 모습이었고 한 번 던져진 그물은 넓은 텐트처럼 둥근 모양으로 퍼져 나가 동그란 모양으로 공평하게 떨어졌는데 항상 나조차도 그 모습과 기술에 놀라움과 호기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사내애들에겐 어떠하였을까.
" 현이야, 내일은 아빠랑 물고기 잡으러 가자."
아버지는 어깨에 벌꿀 색 그물 투망을 둘러매고 힘차게 던졌다가 다시 쓸어 모아다 물가에 손잡이가 달린 자주색 플라스틱 양동이를 들고 서서 기다리고 있는 내 앞에 내려놓는다. 그 모습은 마치 물고기의 육질을 더 맛있게 하려고 노예의 시체를 먹이며 뱀장어를 양식했을 정도로 어류를 좋아했던 고대 로마 사람이 우리 동네까지 와서 민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물에 몸을 꽉 낀 채 미처 도망가지 못한 나같이 느린 물고기들이 투망 안에서 파닥거린다. 나는 물고기 몸에서 피가 나지 않도록 한 마리씩 조심스럽게 양동이에 옮긴다. 아빠는 다시 투망을 가지런히 정돈하여 어깨에 올리고 앞장서고 그 뒤를 내가 따라가다가 걷기가 힘들 때는 평평한 돌멩이에 주저앉아서 반짝이는 냇물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저수지의 수면은 고요한 반면, 냇물은 마치 별이 뜬 밤하늘처럼 빛을 내고 있다. 그 어린 꼬마가 보기엔 똑같은 물인데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서 색깔도 그 성격이 180도로 변하는 물이 변덕쟁이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지금 그 순간 너무 강렬한 햇볕 탓인지 졸음이 쏟아지면서 모든 생각이 사라지기도 했다. 그저 평소에 감지되지 않던 내 제육감만이 더 또렷하게 신호를 보내오고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마치 내 몸이 둘로 나뉘어져서 하나는 무릎 중간 정도 깊이의 물에 서 있는 아빠를, 아직 잠기기 않은 절반의 맨다리에 빛으로 반사 되어 시시각각 변하는 무늬들을 무심코 바라보는 한가로운 내 자신과 그물에서 물고기를 빼어 양동이에 열심히 옮기는 것을 즐기는 또 다른 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냇가에서 투망을 던져 물고기를 잡는 아버지의 모습과 그 주변의 풍경은 20년 전과 비교해 보아도 그다지 많이 변한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서른 살이 가까운 나이가 되어 있고 아버지의 모습도 전에 그 젊은 얼굴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둘이 아니라 거의 항상 엄마가 동참해 있었고 그런 탓으로 아버지와 우리는 먼 거리를 이동하지 못하고 엄마가 앉아서 쉴 수 있을 만한 지점이나 따라서 걷기 가까운 거리 만큼만을 이동했다. 여름내 냇가에서 잡힌 물고기들의 절반은 다시 물속으로 되돌아갔지만 아버지와 나, 그리고 엄마는 그때 그 시절로는 절대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름도 내년에 어김없이 다시 올 테지만 어떤 모습으로 오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 인 것처럼.
외래
내가 사는 무주에서 서울까지 직통으로 가는 버스는 오전 중간과 오후 나절 이렇게 하루에 단 두 대의 배차뿐이었다. 서울까지는 고속버스로 세 시간 거리에 있었으므로 외래 시간인 11시까지 맞추려면 그날만큼은 새벽밥을 먹고 평소보다 두 세 시간이 빠른 하루를 시작해야만 했다. 그마저도 우리는 중간 지점인 대전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과 그 와중에 버려지는 시간까지 계산해 본다면 외래를 한 번 다녀오는 것도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퇴원 이후로 처음에는 한 달 동안은 일주일에 한 번씩, 그 다음엔 2주일에 한 번씩 피검사를 받으러 외래를 다녀왔고 이제 오늘 외래 검사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온다면 엄마의 주치의는 ‘앞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만 오도록 하세요.’라는 진단을 추가로 내려야 할 의무가 예정되어 있는 특별한 외래 진료 날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버스표를 사기 위해 매표소로 가셨고 엄마는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로 등받이가 없는 플라스틱의자에 나와 같이 앉아 계셨다.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나갔을까. 아빠는 버스표 대신에 택시 승강장이 있는 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버스의 좌석이 두 개 밖에 남지 않아서 택시기사와 일종의 거래를 하고 서울 병원까지 왕복비용으로 10만원을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언뜻 듣기에는 한 번에 나가는 그 금액이 마치 큰 과소비라도 하는 것처럼 버스표 값에 비해 표면적으로는 상당한 금액이었지만 세 사람의 왕복 버스요금과 서울 터미널에서 병원까지의 택시비를 감안해 본다면 그다지 큰 액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버스를 타고 내리거나 또 택시를 잡기 위해 길거리를 걸어 나가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편안하게 다녀온다는 생각을 한다면 사실 아빠가 그 개인택시 아저씨와의 흥정에서 손해를 보신 것만은 아니었고 사실 시골에서 하루 종일 운행을 한다 해도 많아야 그 수입이 5~6만 원 정도에 불과했던 그 아저씨한테도 손해는 아니었기에 양쪽 모두에게 특별히 납득이 될 만한 거래였음에도 엄마는 버스를 타도되는데 왜 굳이 그 비싼 택시를 대절했느냐면서 아버지를 나무라셨다. 엄마는 이미 당신 때문에 가족 모두가 희생을 하고 있다는 죄의식을 갖고 계셨고 하다못해 택시비로 10만원을 쓴다는 사실조차 큰 죄를 짓는 걸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뿐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알고 계셨지만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는 엄마에게 그만 듣기 싫은 소리까지 하셨던 것이다. 병원까지 택시를 타고 가니 시간이 단축된다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타고 내리고 기다리고 하는 불편함이 없어서 좋았다. 가는 내내 택시 운전기사 아저씨와 아버지와의 몇 마디 대화를 빼고는 우리 모두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복사열 탓에 몸이 나른해지기도 했었지만 그보다 나는 피로감을 먼저 느끼고 잠이 들었다 깼다가를 반복하는 사이에 택시는 병원까지 거의 다 도착해 있었다.
출입문의 차량 차단기가 자동으로 올라갔고 지난 일 년 동안을 제 집 드나들었던 병원 입구에서 우리 세 사람은 모두 내렸다. 1층 검사실에서 먼저 피를 뽑고 결과를 보려면 빨라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으므로 우리들은 택시 기사 아저씨와 같이 점심을 먹고 기다리기로 했다. 지하 1층에 병원 구내식당이 있었는데 식당 내에도 직원전용과 외부인이 따로 들어가는 식으로 구별이 되어 있었다. 음식의 메뉴는 마치 고속도로 휴게소의 식당처럼 한식 중식 양식 이렇게 종류별로 구분이 되어 특별히 못 들어본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것이 없을 만큼 종류가 다양했다. 아버지와 택시 운전기사는 육개장을 드셨고 엄마는 짜장면이 드시고 싶다고 하여서 나도 같이 그것을 먹기로 했다. 식당은 주문을 먼저 하고 식사를 끝낸 손님들이 일어난 자리를 순번대로 기다렸다가 앉아서 먹는 식으로 운영이 될 만큼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니 특별히 음식의 맛과 질이나 종업원의 친절함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장사는 잘 되는 것으로 보였고 음식의 맛도 특별히 꼬집을 만큼의 흠은 없었지만 그동안 엄마 때문에 음식을 할 때 감미료를 거의 섞지 않던 내 입맛에는 특유의 조미료 냄새가 강하게 풍길 뿐이었다. 오후 1시 30분, 오후 진료의 첫 번째 순번에 엄마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엄마의 주치의인 M교수는 큰 키에 비해 마른 체형으로 그 대학병원의 혈액종약내과 특진의사로 인정받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얼굴은 거의 항상 창백한 편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언제나 생각을 짐작해 볼 수 없는 무표정함과 공중 한 곳 어딘가에 무심코 던진 시선 탓으로 환자와는 거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과 이제는 그것이 그 사람만의 개성으로까지 보였다는 것과 언제나 목소리의 톤에도 거의 높낮이가 없이 미사여구를 뺀 사실만을 말했던 매우 건조한 사람인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동안 잘하고 계셨네요. 이제는 한 달에 한 번씩만 오도록 하세요.”
담당 간호사가 다음 번 외래 날짜를 확인해 주었고 큰 봉지가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양의 약을 타가지고 올라올 때 타고 왔던 그 택시로 다시 집으로 내려왔다. 이번 외래도 성공이었다. 아니 엄마의 항암치료는 아직까지는 성공인 셈이다. 신부전으로 정기검진을 보셨던 엄마는 항상 당신의 신장 기능에 대해 의사선생님께 물어 보았는데 그때마다 그 주치의는 아주 간단명료하고도 이해하기 쉽게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셨다. 솔직히 그 대답은 나나 엄마에게 무척 성의 없는 태도로 보였는데 사실 엄마는 신장의 한쪽이 이미 제 기능을 못한지 오래된 상태였었고 초음파상으로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한 개의 신장만 갖고 사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머지 한쪽마저 나빠지는 것을 언제나 걱정하셨는데 이제는 신장의 기능보다는 더 큰 장벽이 엄마를 가로막고 계셨던 것이다. 하기야 그것도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건대 혈액종양내과 전문의에게 신장내과에서나 물어볼 법한 질문을 한 것으로 그것은 같은 경찰관이지만 수사경력이 전혀 없는 경찰관에게 복잡한 경제사범의 조사과정을 물어보는 것과 같이 질문을 받은 그 경찰관은 상대방에게 직업적인 책임과 의무감에서 아주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사실만을 대답해 줄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한 경우였으리라.
똑같은 하루의 일과가 반복되는 날들이 늘어갈수록 시간은 더 빨리 흘러가는 것 같이 느껴졌다. 집 앞을 지나다니는 경운기 짐칸에는 봄철의 두엄대신 고추를 딴 가마니, 탈곡이 끝난 볏가마니가 차지하고 있었고 이미 수확을 마친 밭두렁에서는 콩이며 고춧대, 들깨단의 잔가지를 거둬들여 밭을 청소하느라 태우는 하얀 연기 기둥이 하늘로 올라가 구름처럼 엷게 흩어지는 것이 보였고 가볍게 불어오는 서풍은 고소한 연기냄새를 집 마당까지 안고 들어왔다. 햇살이 무척 좋은 날에는 멀건 블랙커피가 넘치기 직전까지 담긴 머그잔을 들고 냇가 옆에 있던 아담한 단풍나무 아래 있던 평상에 나가 앉아 있기도 했었는데 모든 것이 별로 변함이 없었던 일상의 풍경이 그런 날에는 유난히 더 아름답고 특별하게 보이기도 했었다. 동산을 가득 채운 참나무는 한 번씩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도토리 열매를 우수수 하고 한꺼번에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가벼운 바람에는 바짝 마른 잎사귀들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 몸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날려 보내고 있었다. 이제 비닐포장이 씌워진 밭고랑에 쪼갠 마늘을 심으면 올해의 농사는 거의 마무리 지어지는 것으로 시골 동네의 사람들, 가축들, 그리고 산속의 나무들과 들판은 겨울을 견뎌낼 준비를 마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별히 월동준비라는 말이 있는 것은 겨울이 1년이라는 기간의 4분의 1밖에는 차지하지 않더라도 그 기간이 다른 계절에 비해 참아내기 힘든 시기임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이 겨울이 지나가고 나면 코앞에 삼심대가 와 있을 테고 나는 사회의 어떤 곳에도 내가 들어가서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없어질 것이다. 나는 특별히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므로 나를 받아줄 곳은 없으리라. 엄마의 건강이 좋아지는 것이 눈에 보일수록 나는 또 다시 나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고 내면의 불안한 감정들은 한 번씩 불쑥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그런 나의 표정과 행동과 말투에서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다른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또 다른 갈등의 출발이 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나도 모르게 터지는 재채기와 같은 것으로 숨기려고 해도 숨길수가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 엄마가 아픈 것을 알았을 때는 엄마가 살 수 있다면 내 남은 목숨의 절반이라도 아니 내 생명이라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간절한 마음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엄마가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갖고 제법 잘 지내고 계신다고 여기니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도 간사한 것인가를 느끼며 그런 내 자신을 얼마나 비난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 미래는 불안하게 다가왔고 그렇게 되면서 나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어 갔다.
내 어릴 적 친구 하나가 문병을 삼아 우리 집에 왔었다. 그 친구는 엄마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도 나를 찾아와서는 약간의 돈이 든 봉투를 주고 갔었는데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왔다가 내가 집에 와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얼굴이나 볼까하고 잠깐 들렀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 친구한테 그 이전의 일로도 언젠가는 꼭 갚아야 할 큰 빚을 진 것으로 여기며 매우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고 이렇게 집까지 찾아와 주기까지 한 것에 진심으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더라도 그 친구와의 연관된 추억거리들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많은 편이기도 했다. 이 작은 시골 동네에서도 내 친구들의 부모들은 모두 다 나름 많이 배우고 꽤나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인지 자식 교육에 대해서도 남다른 열정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서 열 명이 채 안 되던 친구들은 도회지로 나가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초등학교도 같이 졸업하지 못했고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시골에 남았던 친구는 문병을 왔던 그 친구와 나, 이렇게 둘 뿐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마저도 서울에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에 방학 중에는 언제나 친척집에 가서 한 달을 넘게 지내다 왔고 거의 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없던 나와는 달리 비교적 많이 세련되고 아는 것이 많은 친구였었다. 이제 우리들이 삼십을 가까이 바라보는 때가 되었는데 공부 한 번 잘 시켜보겠다는 마음으로 도회지로 빠져나갔던 그 친구들은 사실 별달리 내세울만한 직업을 가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고 문병을 온 그 친구는 결혼을 일찍 해 버린 탓에 돌쟁이 아들까지 키우는 애 엄마였었다. 하기야 지금의 나를 보더라도 별 볼일이 없는 것은 매 한가지였다. 솔직히 나는 친구들에 비해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겨울 방학 전에 공부를 가장 잘했던 학생한테 주던 종합우수상은 거의 다 내 차지였지만 친구들이 하나 둘 씩 도시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나에게는 가난한 집에 산다는 아이라는 열등감과 질투심으로 토라져 있을 때도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시골에 있던 중학교였지만 전교 10등 안에 들었던 아이들은 도시권 이름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는 쉽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되었고 나는 중학교 때에도 줄곧 1등을 했었지만 엄마와 아버지는 고등학교까지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시지 않으셨다. 인근 시골에 있던 제법 공부하기로 입소문이 나 있던 기숙학교로 3년 장학생 – 3년 내내 일체의 돈을 내지 않는 조건 – 으로 진학을 했으면 하는 뜻으로 말씀하셨고 그 당시 특별한 꿈이 없었던 나 또한 그냥 부모님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면서 고등학교마저도 시골에 남아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에 비해 사춘기가 늦게 찾아왔던 나는 불행하게도 거의 고등학교 3년 동안 마음을 못 잡고 생활 전반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반항아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적은 내 기분에 따라 좌우되었는데 정신을 조금이라도 차렸을 때는 정말로 전교 1등까지 하여서 선생님을 안심시켜 드리다가도 또 마음이 힘들었던 날에는 10등 밖까지 밀려나기도 했으므로 그다지 성실한 모범생은 아닌 걸로 여겼을 것이다. 사실 기숙사의 시설은 매우 열악해서 한 겨울에도 세면장에서 더운물을 쓰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 무척이나 싫었던 나는 차라리 학교 세면장으로 올라가 찬물에 머리를 감는 것이 더 편했고 시험기간에도 다른 친구들이 시험범위에 해당하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외우고 있을 때도 보란 듯이 소설책을 읽기도 했는데 그런 기이한 행동은 친구들에게 혹은 선생님들에게도 나는 괴짜로 취급되고도 남을 만 했다. 그때 당시 나는 헤르만 헤세에 거의 사로잡히다시피 하여 지냈었는데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왠지 나와 비슷한 면이 많다고 느꼈지만 결국 내 지능에 비해 지나친 자만심으로 쓸데없이 허영만 가득 차 있던 학생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 밖에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에는 대학교마저도 고3 담임이 원서를 써주는 곳으로 아무 관심에도 없는 그럭저럭한 대학의 학과로 진학을 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까지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한다면 그 기간은 바로 엄마와 함께 병원에서 지냈던 시간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30년을 가까이 살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히 잘못된 행동을 저질러서 부모님 속을 썩혀드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예의바르게 행동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착한 아이였다. 또 학교에서는 어떠했던가. 물론 한 번씩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과 말로 선생님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적은 있었으나 학창시절 내내 거의 공부를 잘 했으므로 모범생 축에 끼어 있었고 책임감도 강했던 편이라 선생님들은 나에게 특별한 직책을 맡겨 주면서 믿음을 심어주기도 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본 나는 이렇게 거의 문제가 없는 바른 생활의 사람이었는데 정작 나의 내면의 생활은 불건전한 생활을 꿈꾸기도 했으며 어떤 경우엔 행동으로 옮기기 직전까지 나쁜 마음을 먹기도 하고 가끔씩 어떤 사람들한테는 입에도 담지 못한 욕을 턱까지 실행에 옮긴 적도 있었던 속물에 가까웠던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잠깐씩 양심의 가책만 들었을 뿐 그런 내가 틀린 것이라고 여기고 특별히 반성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발병 이후로 나는 사실 많이 양심적인 사람에 가깝게 변했고 속으로라도 도리에 어긋나거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겠다는 그런 생각조차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영적인 기운이 아무리 하찮은 생각의 일부라도 정말로 현실로 실현시켜버릴 것 같은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의 내가 오히려 어릴 때의 나 보다 더 심약한 사람이 되었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이제야 조금씩 정상적인 삶의 궤로도 들어오게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친구가 엄마의 문병을 다녀간 그날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천정에 매달린 형광등 스위치 줄을 잡아당겨 불을 켰다. 몇 번 깜박거리던 등은 흰색에 가까운 빛으로 작은 방을 가득 채웠고 갑자기 밝아진 탓에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생이 되기 전부터 오빠가 쓰던 책꽂이를 살펴보았다. 색이 누렇게 바랜 책들이 질서 없이 꽂혀 있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수레바퀴 아래서>를 꺼내들었다. 먼지를 털어내려고 넘기는 책장들은 순식간에 가벼운 바람과 케케묵은 종이 곰팡이 냄새를 풍기면서 만화영화의 속사처럼 변해갔다. 그날 밤 나는 별로 두껍지 않은 그 책을 거의 우리 집 수탉이 세 번 울 때까지 다 읽었고 중간 중간 몇 차례 울기까지 하면서 온 체력을 소진해 버렸지만 집 밖으로 나왔을 때 맛 본 늦가을 새벽의 차갑고 신선한 그 공기가 나에게 생기 있는 에너지를 불어 넣어 주는 듯 했고 그 어느 때보다 내 자신이 정신적으로 충만하고 밝은 의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달이 넘어간 산 능선 지점에는 어둠대신 투명에 가까운 푸른빛이 산 뒤에서 노랗게 번져나오고 있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보았다. 그 빛이 거의 2년 만에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나의 앞날을 비추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