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고 나는 집을 떠나는데
2005년
변화
엄마 머리에서는 머리카락이 다시 자랐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검은 머리카락 대신에 회색빛이 도는 거의 백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이 났는데 그 길이가 이제는 제법 길어져서 산발이 진 머리를 손질을 해야 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엄마는 항상 외출할 일이 생기면 꼭 모자를 쓰셨다. 전에는 항암제로 머리카락이 다 빠진 민머리가 부끄러웠다면 이제는 당신의 나이에 비해 백발로 자란 머리카락을 남들 앞에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불편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같은 여자로서, 그리고 자식으로서도 엄마의 그런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원하는 계절에 맞는 스타일의 모자를 아무 말 없이 구해다 드리기도 했다. 치료를 마친 그 해의 이듬해로 달력이 바뀌면서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고 어떤 날에는 엄마가 언제 그렇게 힘든 치료를 받았던 사람인가, 지금 백혈병 치료를 마치고 관해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인가를 망각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었는데 그것은 이제 처음 그 놀랍고도 낯선 사건에 대해 우리들 각자는 면역이 된 상태로 엄마 자신조차도 집안일의 작은 소일거리는 무엇이라도 해 보려고 하셨고 나도 이제는 엄마의 밥상을 따로 보며 굳이 이중으로 식사준비를 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 알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직 엄마한테는 모든 것에 대해 각별히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유의사항들이 많았음에도 그냥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려고 하는 것 같은 행동들을 지켜보게 되면서 나는 이제까지 엄마의 치료를 쭉 같이 해온 한 사람으로서 불안한 마음에 지나친 잔소리까지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에게 무척 미안해 하셨는데 주눅이 든 엄마의 모습은 오히려 나를 더 괴롭히며 이따금씩 ‘내가 엄마의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해 냈구나.’ 하던 어설픈 자부심에 더 큰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렇게 엄마와 나 사이, 아버지와 엄마 사이, 그리고 아버지와 나 사이의 미묘한 갈등은 서로에게 엇갈린 감정으로 기울어지게 되면서 마음을 조금씩 닫히게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햇수로는 3년째이며 아직도 미래가 창창했던 딸자식이 언제까지나 시골에서 이렇게 머물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라며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엄마였고 나와 아버지도 물론 그런 생각들을 막연히 하고는 있었지만 선뜻 내놓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속으로만 고민하고 있던 상황에서 엄마가 대신하여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병원에 있을 때 옥상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던 한강에 조정 경기에서 쓰이는 보트와도 비슷한 모양의 배에 앉아서 노를 젓는 사람들을 구경하고는 했었는데 보통은 일정한 속도가 없이 자유롭게 노를 젓거나 아예 손에서 노를 놓고 물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겨두고 한가로이 떠가는 모습이었다. 운이 좋은 날에는 정말로 조정 보트 경기가 있는 것도 구경할 수가 있었는데 선수들은 일제히 박자를 맞추고 슬라이드가 장착된 의자에 앉아 온 몸 전체를 사용하여 있는 힘껏 노를 젓는다는 느낌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나에게도 그 힘이 전달될 정도로 박진감이 넘쳐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정말로 신기한 구경거리라고 생각하다가 또 어떤 날은 문득 특이한 점을 발견하기도 했었다. 선수들이 모두 한 몸처럼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노를 젓기는 했으나 계속 노를 젓는 것이 아니라 그 간격에는 일정한 시간동안의 휴식이 있었는데도 보트의 속도는 줄어드는 느낌이 없이 쭉쭉 계속 앞으로 뻗어 나간다는 것이었다. 오래전에 어떤 책에서 읽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이 났는데 그것은 마치 군대식으로 노를 젓는 방법으로 노를 젓지 않을 때는 관성에 의해 배가 앞으로 나가간다는 것이었다. 그쪽에는 일체의 상식도 없던 나에게는 손을 놓고 있어도 보트가 계속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물리적으로 매우 타당한 현상이기는 하나 무척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비단 사람의 일은 어떠하던가. 사람도 몸에 익숙해지거나 일단 환경에 적응을 마치게 되면 타성에 젖어 특별히 어떤 노력을 하지 않게 되더라도 그 생활을 그럭저럭 유지할 수가 있다. 하지만 사람한테는 타성에 젖는다는 것처럼 무서운 것도 없는 법이다. 엄마의 병 수발과 집안의 소소한 일들에 나는 이미 선수와도 같았고 지금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일말의 변화된 모습이라도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가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골에서의 겨울은 마치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 세상이 정적 그 자체였다. 농부는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를 하루 중에는 새벽부터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를 마치 반드시 해야 할 특별한 소명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바쁘게 서두르지는 않더라도 어떤 일이든 조용히 꾸준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만일 누군가가 큰돈을 벌어보고자 하는 생각으로 농사를 시작한다면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싶다. 비록 농부는 아니지만 이제까지 농부의 자식으로 살아왔던 나는 농사를 짓는 것은 꾸준하고 무던한 미덕을 가진 사람만이 지켜내고 견뎌내고 이뤄낼 수 있는 것이며 어떤 유혹이라도 뿌리칠 수 있는 중심이 잡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힘으로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섭리에 따라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경솔하고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은 훌륭한 농부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1년의 열 달을 쉼 없이 보낸 사람들은 추위의 정점이 되는 한 겨울 두 달 동안을 휴식의 기간으로 지내는데 특히 우리 동네의 엄마 아버지 연배의 사람들은 각자 일정량의 곡식을 내고 청년회관에서 거의 하루의 삼시 세끼를 같이 해먹고 그동안의 이야기도 나누면서 그렇게 한 겨울을 보내셨다. 도시의 생활이 삭막한 이유가 개인적인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 동네는 공동체로서 아직도 옛 모습의 전형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편이었는데 동네 사람들의 크고 작은 경조사를 마치 내 집안의 일처럼 여기며 함께 참여하고 도우려는 의식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고 그래서 이런 겨울동안의 생활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컨디션이 좋아지고는 있었지만 아직 생활 전반에 제약이 많았으므로 겨울 공동체 모임에도 그다지 참석을 하지 못하실 줄만 알고 있었을 때다. 아버지는 우리 집 바로 옆에 붙어 있던 텃밭의 절반을 마을 청년회관 사무실을 짓는데 아무런 조건도 없이 내 놓으시면서 그 해 초겨울 간편한 조립식 건축물이 그 텃밭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번 일을 두고 엄마는 아버지에게 ‘당신같이 욕심도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핀잔을 주셨지만 나는 그것이 한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동네 분들과 어울릴만한 여건을 만들기 위한 아버지의 배려에서 나온 것임을, 마치 속도 없는 사람처럼 제 땅을 마을에 기부하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하셨던 이유가 전부다 엄마를 위한 결정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엄마 당신도 아버지의 깊은 속뜻이야 왜 몰랐겠냐만 이 모든 손해가 모두다 당신이 아픈 것 때문에 감수해야만 했던 이유였음에 매우 미안해 하셨던 마음 탓이었으리라.
어쨌든 나는 그 겨울 두 달 동안 엄마와 아버지의 점심식사 준비에 조금은 해방될 수 있었고 그것은 내가 읍내 작은 도서관을 다닐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친구가 다녀갔던 그 날 밤, 내가 만일 인생의 독립을 위해 반드시 직업을 찾아야 하다면 지금 내 여건에서 가장 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경찰관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도서관에 다닌다는 핑계로 거의 2년 동안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내년의 첫 시험을 목표로 만일에 결과가 나쁘게 온다면 그 길은 더 이상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돌리겠다는 마음이 저 깊숙이 굳어져 있었다. 만일에 이 사건의 결말을 놓고 내 인생의 중간 평가를 내려 보자면 내 나이 스물일곱이 되던 봄의 일은 인생 전체에서 몇 번 오지 않을 기막힌 기억의 정점이 되고도 남을 만하며 아마 내 평생을 두고도 오랫동안 잊지 못할 사건으로 남으리라 장담한다.
3월, 이제 봄이 왔다고 저마다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아직 날씨는 겨울에 가까웠기에 필기시험장에서 나오는 내 몸은 부르르 떨렸다. 아마도 긴장을 했던 탓에 더 그렇게 느꼈으리라.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걷다가 시험장부터 계속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고 아주 잠깐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몇 마디 주고받을 기회가 되었다. 방금 전 나와 똑같은 시험을 본 수험생이었고 우리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첫 마디가 시험에 관한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시험은 잘 보셨어요?”
“아, 예. 그냥 뭐,.......”
나는 별로 많은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에 대답을 대충 얼버무렸다. 그런데 그 여자는 꽤나 적극적인 성격으로 다른 말로 계속 내게 말을 시키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최종 합격자가 6명밖에는 안되니 엄청나게 경쟁이 치열하겠어요.”
나는 공무원 시험에서 몇 백대 일이라고 떠드는 경쟁률은 사실 조금은 과장된 수치이며 설령 부풀린 숫자가 아니더라도 시험을 다른 사람들 보다 무조건 잘 보면 합격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던 내게 그 경쟁률이란 처음부터 관심 밖의 일이기도 했다.
“그러게요. 그런데 시험은 잘 보셨어요?”
“아니요. 시험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공부를 더 하고 봐야 될 것 같아요. 그런데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나는 내 나이를 대답하고 나이를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갈 길이 이쪽이라며 말하고는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고민 때문에 필기시험의 난이도와 경쟁률 따위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정말로 운이 좋아서 필기시험에 합격한다고 하더라도 내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던 체력검정이 남아있는데 그것이 필기시험 합격자를 발표하고 정확히 닷새 뒤에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별달리 더 어떤 노력을 해서 나의 체력이 좋아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아까 만났던 여자의 말대로 이번시험도 상당히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수험생들에 비해 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최종합격자의 1.5배수에 들 수 있을지도 확신이 안 섰기 때문이었다. 필기시험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 5일 동안 나는 유난히 말을 더 아끼게 되었고 낮 동안에도 집에 머물러 있기는 했으나 일 년 전 엄마가 막 퇴원하셨던 때와 거의 변함이 없던 마을 풍경에 동화되어 특별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현이야! 잘했다. 필기시험에 붙었어. 솔직히 시험에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했어.”
당일 날 오빠의 전화로 필기시험 합격 소식을 들었지만 그 기쁨의 순간도 잠시 남은 체력검정을 어떻게 봐야 할지에 대한 걱정이 커다란 바위처럼 내 앞을 가로막는 기분이 들었다. 3월의 봄바람이 코끝을 찡하게 불던 날 아직 이른 반팔과 반바지 차림으로 시험장소로 갔고 거기에는 아홉 명의 여자들이 각자의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그 중에 필기시험 날 만났던 여자는 없었다. 윗몸일으키기와 제자리멀리뛰기, 그리고 100미터를 측정하는 세 종목의 체력 검정 중에서 언제나 나를 주저앉혔던 것은 100미터 달리기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미 출발선에만 서 있더라도 지난날의 쓰라린 경험들이 생각나서 겁부터 났고 출발을 알리는 총포소리는 더욱 더 심각한 공포에 빠져들게 했다. 그 상황의 나는 정말로 굶어 죽기 직전의 고양이가 쥐약을 먹고 비틀 거리는 쥐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잡아먹고 나서 배를 불리고 죽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그대로 굶어 죽어버릴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는 경우와 같이 두 가지의 결말이 전부 다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선택권이 남아 있는 고양이의 신세보다 못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100미터라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터져버려서 죽을 것처럼 가슴은 벌렁벌렁 거리고 호흡까지 가빠지고 있었는데 내가 이 자리에서 그냥 깨끗하게 포기하고 나머지 인생을 큰 의미 없이 살 것인가 아니면 뛴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성공의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 것을 뛰어 보기라도 하고서 실패하여 더욱 더 좌절하는 나를 보면서 우울하게 남은 삶을 살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것과 비슷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굶어 죽기 직전의 고양이와 뷔리당의 당나귀, 그리고 100미터 달리기를 막 코앞에 둔 나 자신 이렇게 셋을 두고 비교해 보더라도 그 중 그래도 가장 희망적인 경우는 나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최대한 진정시켰다. 비웃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그 당시 내 최대의 적은 100미터 달리기의 초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이제는 그 100미터 달리기만 남은 상태다. 잠깐 대기시간이 길어 진 사이 어떤 여자가 나를 알아보고 아는 체를 했다. 물론 처음 보는 여자였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우습기도 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미 경찰관 공개채용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필기시험은 합격하는데 계속 100미터 달리기에서 0.3초가 모자라 떨어지는 바보 같은 아이라는 믿기 어려운 풍문의 장본인’이었는데 그 여자 말이 그 소문의 여자가 갑자기 사라져 최근 2년 동안 아무도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 말은 그냥 내가 다른 진로를 선택해서 이쪽을 떠났거나 아니면 이제는 필기시험마저도 합격하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는데 이번 필기시험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보았고 오늘은 오른쪽 가슴에 단 내 수험표의 이름을 보고 나임을 알고 아는 체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와 같이 공부하다가 현재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어떤 선배한테 내 이름이 이번 필기시험 합격자 명단에 있다고 말하니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만일에 그 여자애가 체력 검정 시험을 통과하면 최종합격자는 여섯 명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다섯 명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 만큼 나의 필기시험 성적은 월등하게 높아서 별로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에게 그런 말이 어떤 초인적인 힘을 가져다주었는지는 모른다. 아니 그 보다 2년 전과 비교해 보면 모든 면에서 상황은 달라져 있었고 만일에 이것이 아니라면 나는 또 다시 어떤 암울한 상태에 빠져 지내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몸도 성치 않던 엄마가 불공을 드리겠다고 새벽바람을 맞으면서 산성까지 올라가 부처님께 절을 하고 계시지 않던가.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들렸고 나는 정말로 길다고 느껴지는 시간을 달리고 또 달렸다. 결승 라인을 지나서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내쉬느라 상체를 수그리고 양쪽 무릎에 두 손을 올린 채로 고개를 돌려 초시계를 들고 있는 시험 감독관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의 눈은 동시에 마주쳤고 감독관은 아주 잠깐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가 싶었는데 곧 두 눈에 힘을 주고 침까지 튀기면서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아주 선명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19.93초. 통과!’
‘된 거야? 정말로 내가 이걸 통과한 거야?’속으로 끊임없이 나에게 물어보면서 채점관석에 앉아 있는 안면이 있던 지방청 교육계장 입가의 엷은 미소를 보고서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내가 체력 검정에 통과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 남은 면접과 직무적성검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면접은 일대일 개별면접과 세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단체면접으로 진행이 되었고 면접관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에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절차를 다 마무리 지었던 나는 이제 최종합격자 명단이 발표되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이제 한 고비를 넘겼으니 제법 가벼운 마음을 먹을 만도 했지만 만일에 내가 최종합격자 명단에 들지 못한다면 두 달 전의 결심대로 이제는 모든 것을 접어 버리고 다른 길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럴 줄 알았다면 토익성적의 가산점만을 믿고 잠자코 있을 것이 아니라 급속으로 다른 자격증이라도 따서 가산점 만점을 채웠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들기도 했다.
최종합격자가 발표되기로 예정이 되었던 날, 나는 새벽부터 집안의 모든 일거리를 다 해놓고 직접 확인을 해보고 싶다며 다니던 읍내 도서관으로 나와 버렸다. 사실은 두 가지 이유였다. 첫 번째는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내 두 눈으로 직접 최종합격자 명단을 보고 싶어서였고 또 하나는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따라오는 좌절과 슬픔의 모습을 누구한테도 보여주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오로지 나 혼자만 있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이유에서였다.
발표 공지가 예정되어 있던 시간은 오전 10시, 도서관 컴퓨터실에 30분 전부터 계속 지방청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면서 초조하게 앉아있었다. 마우스를 잡은 오른손바닥에 땀까지 나는 것으로 보아 잠시 뒤 있게 될 공지가 내 인생 전체를 두고 볼 때 얼마나 중요하고 커다란 기점이 될지 짐작할 만 했다. 이렇게까지 애간장을 태우는 일이었다면 차라리 다른 사람을 통해 연락을 받는 편이 훨씬 낫겠구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기 때문이었다. 해당 홈페이지 공지사항은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접속을 하는 바람에 느리게 로딩되었고 모니터 정 중앙에서 빙글 빙글 돌아가고 있는 모래시계를 보고 있자니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접속이 안 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시골 도서관 컴퓨터의 성능이 떨어지는 탓도 있었으리라. 벽시계의 바늘이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는데도 나는 공지사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시계바늘 중에 가장 날씬하고 키가 큰 초침은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자리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만한 이유가 없다는 듯 미련 없이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계속 흘러갔다.
전화벨이 울린다. 아! 오빠의 전화다. 오빠가 나에게 지금 전화를 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 소식을 듣지 않아도 대충 결과를 예감할 수 있었다.
“응, 도서관인데 컴퓨터가 안 열려.”
“합격이야! 정말로 고생했다.”
오빠의 한 마디는 지금까지 온 전신을 뻣뻣하게 만들며 철사처럼 굳어있던 모세혈관들이 다시 살 속으로 깊숙이 녹아 들어가는 것 같이 느껴졌고 온 몸을 마비시키던 긴장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버리는 것 같이 힘이 풀려버려 땅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보면 과거란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라서 그것이 아무리 길고 힘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기억들을 회상해 볼 때는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을 거의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매일 매일 전투적으로 살아왔다. 합격자 명단에 정확하게 써져 있던 내 이름 석 자를 본 그 순간, 지나간 시간들은 찰나의 빛으로 눈앞을 스쳐지나가 버렸고 이제 그 시간이 무척 지루하고 견뎌내기 힘들었다기보다는 그저 한 나절의 낮잠보다도 쉽고 가벼운 짧은 순간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나에게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것을 해 내려고 쉽게 올 수 있는 길을 참 멀리도 돌아왔다고 냉소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과거란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이 소용이 없을지는 모르나 항상 그 사람의 현재를 대변하고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결과가 좋지 않았더라도 지나온 시간들에 내렸던 나의 결정과 행동들을 후회하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재의 나의 모습은 그 어떤 누구라도 나만큼, 나처럼, 이렇게까지 오기에는 그다지 쉽고 가벼운 길만은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져 있던 시간들을 나는 몇 배 이상으로 노력하며 살았고 그래서 누릴 수 있었던 결과라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한치 앞도 모르는 미래를 두고 볼 때 나에게 또 다른 역경이 온다 해도 충분히 맞서낼 용기와 지혜를 배울 수 있었기에.
나는 이렇게 해서 계절이 회색빛을 벗어버리고 예쁜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할 때인 5월, 경찰학교 교육생으로 입교하게 되면서 집을 떠나왔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 번째 변화라고 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던 독립의 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