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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이 Nov 13. 2024

제 3부

제복을 입게 되고

2005

입교


   산자락을 따라 나 있는 2차로의 도로를 거의 30분이 넘도록 오르막길만을 계속 올라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마을의 집들이 가장 작아지는 정점부터는 길이 심하게 오른쪽으로 굽은 도로를 벗어나니 가파른 내리막길만이 계속 되었는데 올라갈 때 걸린 것보다 삼분의 일은 단축된 시간밖에는 걸리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도로 양쪽으로는 수풀이 우거져 있었고 산 속에 띄엄띄엄 여름을 알리는 전령사인 이팝나무가 뿌연 꽃가루를 흩날리고 있어서 그런지 산언저리의 공기는 그다지 맑아 보이지는 않은 날씨였다. 이미 제철을 맞은 나무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으로 나뭇잎을 물들여 놓아서 그런지 산들은 더 힘 있고 웅장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태백산맥이 품은 소백산 자락의 위엄과 섬세함이 공존하는 그야말로 험준하단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사람의 존재가 한낮 티끌에 여겨질 만큼 주변 풍경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산 정상부터 둥글게 회전하면서 완전히 평지까지 내려온 우리들은 차멀미로 인해 약간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어지러움을 느꼈다. 아버지는 내가 사는 시골 읍내만큼이나 작은 규모의 동네로 들어가 입교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으므로 점심을 먹을 요량으로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지만 집에서부터 거의 네 시간이 넘도록 차 안에만 있던 터라 우리들은 전신이 뻣뻣하게 굳은 것처럼 무기력하게 한참동안을 그냥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내릴 때는 상승하는 아스팔트 복사열에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 초여름 무더위는 낯선 곳에서 실감할 수 있는 어색함으로 누가 보더라도 우리를 생전 처음 와 본 동네에서 길 잃은 아이처럼 만들어 놓았다. 태양열에 달궈진 아스팔트 복사열은 오히려 뜨거운 햇볕보다 더 땅위를 걷는 우리의 발걸음을 무겁게 잡아당겼다. 나에게 다가올 일련의 시간들을 마치 암시라도 해 주는 듯 무섭게 내리쬐는 햇볕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경찰학교 앞에 점점 모여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또 다른 세계로 막 들어가려고 문턱에 서 있는 사람처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다짐과 굳은 의지로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교육생들은 마치 장기간 여행이라도 떠나온 사람처럼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미인대회에 라도 나가는 사람처럼 자기가 최대한 낼 수 있는 멋으로 진한 화장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주말에 외박이 있었기 때문에 책가방에는 간단한 세면도구와 필기구만을 챙겨왔기에 짐 가방은 간단하고 가벼웠다. 엄마는 정문 앞까지 나를 배웅하면서도 내내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는데 아마도 당신 때문에 막내딸이 먼 길을 돌아와야 했고 최종합격을 하고 입교하기 전까지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에도 집안 살림을 하면서 어디 콧바람이라도 쐬러 다녀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교 정문에서부터 하늘과 맞닿아 시선이 끝나는 곳까지는 계속 오르막길로 이어져 있었다. 함께 동행한 사람들은 정문 입구에서 모두들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제 각자 당부의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헤어지는 모습에서는 그다지 기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기야 아주 잠시 동안의 헤어짐이라 하더라도 이별이 어디 즐거웠던 경우가 있었겠는가. 이별이란 언제나 슬픔위에 존재하는 모습인 것이다. 아버지는 나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계셨으므로 그저 몸 잘 챙기라는 말씀밖에는 별달리 당부와 같은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얼굴은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내가 떠나와도 분명히 아버지가 그 자리를 잘 채워주시고 훌륭하게 책임을 다 하실 테지만 그냥 이 순간만큼은 엄마에게서 도망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속에서 죄책감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고 더 돌봐드려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견뎌내기 힘들었으며 무엇보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별의 순간이란 길어지면서 마음이 더 아프게 되는 것이며 짧으면 짧을수록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 나는 그런 부모님을 뒤로하고 경찰학교 정문을 통과해 당당히 들어갔다.      

   교육생 입교를 알리는 표지판 안내는 있었지만 사람들이 계속 걸어가는 방향을 따라서 그 일행에 동참하여 걸었다. 학교는 규모가 매우 크고 말끔하게 정돈된 느낌이었는데 특히 경치는 한눈에 보아도 매우 빼어날 정도로 어느 한 곳 빠지는 곳이 없었다. 나는 건물 외벽에 ‘무궁화관’이라고 양각으로 표시 되어 있는 ㄱ자 모양의 빨간 벽돌로 된 5층 건물로 들어갔다. 그 곳엔 이미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맞도록 각이 진 말투를 쓰는 여자 생활지도관 두 사람이 우리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명찰과 생필품 몇 가지를 나눠주고 계셨는데 그 행동이 정말로 절도있고 규칙적이라서 내 행동까지도 나도 모르는 사이 경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게 되었지만 생활지도관들이 우리들의 군기를 잡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딱딱하게 행동을 했던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몸에 밴 습관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것은 곧 우리들도 교육기간의 대부분을 그런 군대식대로 교육받고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수칙 중 하나, 입교 때 받은 두 개의 명찰을 하루 24시간 내내 가슴에 부착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고 말투 또한 군인처럼 ‘~다. ~까?’식으로 해야 생활태도에서 감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앞으로 내가 지내게 될 315생활실로 들어갔다.      

   복도 양쪽에는 학창시절의 교실처럼 신발장이 있었고 문은 앞으로 잡아 당겨서 여는 나무로 된 문이었다. 생활실 내부에는 먼저 와 있는 동기들이 각자의 배정된 관물대 앞에서 개인 소지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문 입구 맞은 편 정면으로 큰 창이 나 있었고 그 아래 겨울철을 대비하여 세운 것인지 라디에이터 히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만 보더라도 이 건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부는 텔레비전에서나 보았던 꼭 그대로 군대의 내무반 모습의 전형이었다. 양쪽으로 허벅지 높이의 나무로 된 침상이 있었고 바닥은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무로 짜진 관물대가 양쪽 벽에 일렬로 붙어 있었는데 내가 쓰게 될 관물대는 7번으로 그 자리는 입구에서 왼쪽으로 창문 쪽에서 두 번째 자리였다. 어색하게 고개를 수그리며 인사를 하고 나는 내 자리로 갔다. 내가 7번을 부여받은 것은 행운의 번호를 우연히 차지하게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원초적이고 단순한 원칙이었는데 생활실내 열여섯 명 중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했을 때 내가 일곱 번째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날 밤, 나는 나무로 된 내무반 침상위에 내가 앞으로 쓰게 될 7번 관물대 쪽으로 다리를 뻗고 누웠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는 것으로 보아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불편한 잠자리와 어색한 공간 때문이거나 또 다른 이유로 잠들지 못하고 있을 테지만 어리게는 스물다섯 살부터  서른 살이 넘는 사람까지 우리의 나이는 전부다 같지는 않았지만 각자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닥쳐올 생활들에 대한 기대와 불안한 마음에 복잡한 상태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지금 떠나 온 곳에 남겨진 가족들과 그동안 자유롭게 지냈던 시절들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나도 고향집, 내가 머물던 작은 방, 낡은 책꽂이와 앉은뱅이책상이 있던 초라했지만 나만의 유일한 방이 벌써부터 그리워지고 있었으므로. 열여섯 명의 생활실 동기들 중에 나이가 딱 중간이라서 7번 관물대의 주인이 된 나는 저들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 한 번씩 고른 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느라 내는 숨소리는 희미한 한숨처럼 들리기도 했는데 우리들 모두는 서로에게 일러두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일이라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잠을 자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어둠속에서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으므로 우리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곳에서는 잠을 자야하는 것도 내일의 할 일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과 같다는 듯이.        

   삭! 삭! 삭! 누에가 뽕잎 사이사이를 기어 다니는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힌다. 나는 누에 선반이 양쪽으로 진열되어 있는 한 가운데 통로에 서서 누에들이 회색빛의 굵은 몸을 꿈틀거리면서 기어 다니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막 복숭아나무 밭에서 따온 뽕잎을 누에 선반에 깔아주고는 누에들이 잎사귀 가장자리부터 뾰족한 입을 바쁘게 오물거리면서 갉아먹는 모습을 구경하느라 그렇게 넋을 놓고 서 있었다. 내 손가락크기보다도 길고 굵은 누에 한 마리가 가느다란 뽕나무 나뭇가지를 마치 외줄타기라도 하 듯 아슬아슬하게 기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에 몸집에 비해 가늘고 긴 나뭇가지는 귀찮은 듯 누에를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누에는 벌러덩 뒤집혀서는 배를 전부다 드러내 놓고 돌기처럼 생기다 만 다리들을 빠르게 움직여서 마치 약점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재빨리 몸을 뒤집었다. 나는 누에 방에 들어갈 때마다 언제나 이 문제를 두고 갈등했었다. 누에를 세 마리만 산채로 먹으면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선 가 읽었던 것이 항상 이 방에만 들어오면 생각이 나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갈등하기 시작한다. 정말로 누에를 먹으면 천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입속에서 터트리지 않고 목구멍으로 바로 삼켜버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내 이빨로 저 누에의 얇고 부드러운 피부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툭 하고 터져버려서 입 안 전체에 흐믈흐믈한 누에의 살점과 찝찔한 액체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저절로 진저리가 났다. 그래도 세 마리만 삼키면 천재가 될 수 있다는데 설마 아주 잠깐은 기절을 할지는 모르나 누에를 먹는다고 죽기야 하겠는가. 나는 이제 마음의 준비가 다 됐다는 듯 아까 데굴거리던 등치가 큰 놈 꼬리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입을 크게 벌린 채로 천정을 바라보았다. 눈이 감기기 직전에 나는 정말로 점처럼 까만 눈의 누에가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가련한 눈빛을 보고야 말았다. 두 눈이 아주 조금 반짝였기 때문에 나는 누에의 눈에 눈물이 핑 돈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태껏, 누에를 먹고서 천재가 되었다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본적도 없었던 내가 그 터무니없는 말만을 믿고 그동안 몇 번이나 이런 바보 같은 행동을 반복했던 것인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누에를 뽕 잎 위에다 조심스럽게 올려 주었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누에를 먹을 뻔 하지 않았는가. 저절로 웃음이 났다. 그것은 분명히 순진하고 천진난만하여 어리석기까지 했던 내 생각에 대한 조소와 실험 정신에 대한 칭찬이 반씩 섞인 웃음이었으리라. 그리고 천재는 거의 대부분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다는 어른들이 만들어 낸 사회의 논리에 대한 반성의 웃음이었으리라.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기에 나는 어둡고 눅눅하며 오래 머물기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더운 누에 방을 빠져나왔다.      

   너무나 기가 막혔던 것인지 나는 잠을 자면서도 실제로 웃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기분에 눈이 떠졌는데 손목에 차고 있는 전자시계의 불빛을 밝혀보니 곧 기상을 알리는 벨이 울릴 시간이 돼있었다. 나는 왜 하필 입교 첫날 밤 누에 꿈을 꾼 것인가. 솔직히 지금 나는 천재가 되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군대식의 생활에 조금 겁을 먹고 선반 식으로 키우며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답답한 느낌이 들었던 누에에게 그 시절 어렴풋이 품었던 동정심이 이렇게 꿈으로 나타나게 된 것인가. 시끄러운 벨소리에 생활 실에 누워있던 우리들은 마치 이미 잠이 깨어 있어 기상벨 소리가 울리기만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일제히 일어나서 모포로 된 국방색 침구를 최대한 각이 지도록 정리하고 대열을 맞춰 대운동장으로 집결했다.      

   새벽 6시, 우리 동기들 말고도 학교에는 이미 교육을 받고 있었던 다른 기수의 교육생들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전부다 모인 대운동장은 조금은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학교에서 맞는 새벽공기는 낯선 탓이었는지 여름인데도 차가웠는데 공기 중에 먼지하나 섞여있지 않은 맑은 공기라는 것을 첫 숨을 마시고도 단번에 느낄 수가 있었다. 공기가 맑아서 그런 것인지 3킬로미터 거리의 구보에도 나는 지치지 않았다.      

   입교 후 맞이하는 첫 날은 근무복을 맞추기 위해 신체사이즈를 측정하느라 반나절이 지나갔고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제식훈련 위주의 교육만 있었기 때문에 기성복으로 미리 배부된 기동복과 기동화를 착용하면 되었다. 그 날 오후 우리는 그 차림대로 대운동장에 집결하여 엄숙하게 진행되는 입교식에 참석하였고 입교식을 마친 다음부터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군기를 잡기 위한 모든 훈련의 기본은 제식훈련과 단체기합이었다. 교관은 특별한 잘못이 없더라도 수시로 단체 기합을 주었는데 그 중의 최고는 단연 선착순이었다. 모든 신체활동을 실력보다는 강단으로 버텨내던 내게 선착순이라는 기합은 정말로 좌절 그 자체였다. 그것들을 우리는 운동장의 흙먼지를 일으키며 며칠 동안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적으로 훈련했다. 지휘 검열관의 통과 심사가 끝나면 또 창검과 방패술을 익혔다. 이 모든 훈련들은 연약한 아가씨들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것들이었지만 우리는 아가씨들이 아닌 경찰관이 되기 전 마땅히 거쳐야 하는 과정에서 꼭 배워야 하는 훈련을 받는 교육생이었으므로 누구하나 낙오하는 사람 없이 그 모든 훈련을 완수했다. 그렇게 4주 동안을 마치 입대라도 한 훈련병처럼 뙤약볕 아래에서 뒹굴었기 때문에 적어도 내 경우에는 입교하기 전과 비교해 보았을 때 피부는 갈색에 가깝게 타 있었고 거울 속에 보이는 얼굴은 눈에 확연하게 띌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보이던 창백한 모습과는 반대로 몸은 단련되어 있어서 내 자신이 많이 건강해졌다는 사실과 단체식의 수련생활을 통해서 얻은 규율과 습관으로 내 정신세계 또한 한 층 더 밝아진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한 달 만에 스스로가 변화된 모습을 보았고 입교 후 처음으로 외박을 나와서 엄마와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학교생활


   2년 전, 가을, 서울 병원 12인 무균 실     

   “혹시 보호자 중에 ‘김현이씨’라고 계신가요?”


   그 순간 저마다 한가로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누군가를 찾는 사람한테로 시선이 집중되었고 나는 혹시 나를 찾는 것인지 하고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계속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무도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자 이번에는,     

   “충주 중앙경찰학교에서 등기를 받기로 되어 있는 분이 안 계신가요?”     

   아! 그제야 나는 정말로 그 사람이 찾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 사람 쪽으로 걸어 나갔다.      

   “혹시 저한테 온 편지 같은데 좀 봐도 될까요?”

   “네, 김현이 씨가 맞으신가요?”

   “네, 제 이름이 김현이 맞아요.”     

   등기를 들고 무균 실까지 올라 온 사람은 병원 원무과에서 근무하는 직원처럼 보였고 행동이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비정상적으로 친절한 태도로 보아 이제 막 일을 시작한지가 얼마 되지 않는 신입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나는 검은 색 서류철에 꽂아온 수령인 란에 내 이름 사인을 해 주고 그 등기를 건네받았다. 황갈색 서류봉투에 제법 두툼한 것이 들어 있었는데 양쪽 끝으로 붙인 테이프를 뜯어내고 봉투 안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100여장이 넘는 헌혈증서가 들어있었는데 어떤 신분을 증명하기라도 하 듯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채취한 혈액의 종류와 양이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는 분명한 헌혈증이었다. 나도 전에 대학교에 막 들어와서 친구를 따라 헌혈을 딱 한 번 해본 적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전혈은 하지 못하고 혈장만을 걸러낸 성분헌혈이었고 그 뒤로 몇 차례 더 헌혈을 하겠다고 헌혈 집을 찾아갔었지만 그때마다 피가 떠오른다는 이유로 매번 퇴짜를 맞고 말았던 것이 새삼 떠올랐다. 함께 들어있던 편지 한 장을 펼쳐 보았다. 학교 자유게시판에 헌혈증을 다급하게 찾는 글을 읽고 교육생들한테 모은 헌혈 증서를 나에게 보내주시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남자 교육생을 지도하는 생활지도관으로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며 현재 적보산 – 학교의 위치는 충주시 수안보면에 위치한 적보산 자락에 있었다. - 은 가을 정취를 물씬 풍기는 풍경이라고 간략히 설명하신 뒤에 어머니의 빠른 쾌유를 빈다는 짤막하게 써진 편지를 읽었다. 사실 백혈병 환자로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몸속에는 언제나 피가 부족했기 때문에 건강한 성인의 젊은 남성에게서 채취한 피를 수혈 받는 일이 거의 일상화된 치료가 되었었다. 그 비용이 치료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헌혈 증서를 가져오면 그만큼의 병원비를 제하여 준다는 것을 알았고 그 때 나는 무척 절박한 심정으로 학교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당시 사정을 이야기하며 헌혈 증서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던 것이 기억났다. 그냥 가볍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었던 그 내용에 진심으로 마음을 모아 이렇게 100장이 넘는 헌혈증을 보내주신 그분의 마음 씀씀이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고 선 뜻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헌혈증을 기부해준 사람들한테도 뜻 모를 미안함까지 느꼈던 것이다. 나는 그 분께 헌혈 증서에 대하여 잘 받아보았다는 감사의 뜻을 담은 간단한 편지로 답장을 보내드렸다. 그것이 이름만 알고 있었던 그 분과의 인연은 끝이 나는 걸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점점 나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상당히 많았던 수량의 헌혈증은 12인 무균 실 환자들에게도 나눠 드릴 수 있게 되면서 그 분의 선행으로 최대한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어떤 환자는 적혈구를 수혈 받느라 검붉은 피 주머니를 매달고 다녔고 또 어떤 사람은 혈소판 수혈을 받느라 오줌색깔의 피 주머니를 매달고 다녔다. 이렇게 환자들이 달고 있었던 몇 가지 종류의 링거액 중에는 자기에게 부족한 성분의 피 주머니가 거의 항상 같이 매달려 있었고 그것마저도 돈으로 환산되는 약의 종류로 취급되었던 것이었다.      

   이제 학교생활도 중반으로 접어들게 되면서 육체를 혹사시켜야 하는 고된 훈련만 받았던 것이 아니라 비록 교육생을 의미하는 계급장을 차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제 몸에 맞는 경찰관 제복을 입고 왼손에는 서류가방 모양의 책가방을 들고서 4열  종대로 학과출장을 나가는 모습은 내가 보더라도 매우 뿌듯하고 멋있는 모습이었다. 수업시간은 주로 경찰관이 실무에서 알아야 하는 이론과 실습을 병행하면서 진행되었고 비록 전 후반 학기로 나뉘어 시험이 있었지만 적어도 솔직히 나의 경우에는 시험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아름다운 학교 풍경 안에서 내가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고 읽고 싶었던 책은 언제라도 학교의 도서관으로 찾아가서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지난 시간동안 내가 처한 여건 때문에 조금은 힘들고 암울하게 보냈던 날들은 이제는 완전히 지나가 버리고 앞으로 내게 다가올 날들은 밝은 희망이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나가 버린 과거도 빛으로 밝아오는 미래도 아닌 지금 현재 그 순간이라고 느끼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만끽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내 기억을 스쳐지나가던 한 사람, 2년 전 병원으로 헌혈증을 보내주셨던 그 분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그 분의 연락처를 찾아낼 까 고민하던 중 그 때 받았던 주소로 다시 편지를 보내야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 학교에는 우리 동기 말고도 다른 기수들이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가슴에 단 명찰의 색으로 기수의 구분이 되었었다. 물론 남자 교육생들도 있었으므로 거의 대부분 미혼이며 가장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할 시기였으므로 남자교육생들은 여자들에게 여자교육생들은 남자들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었지만 자칫 서로에게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누거나 사적인 마주침을 생활지도관들의 눈에 띄었다면 적절한 해명을 하지 못했을 경우 생활태도 감점을 받기까지 했을 정도로 통제는 엄격했었다. 어떻게 보면 왜 젊은 남녀가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자유롭게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도록 통제를 했을까 이해를 못할 수도 있을 테지만 교육기간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졸업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그분들의 목표이고 소임이라는 생각을 해보면 그렇게 수긍하지 못할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의 경우에도 남자 교육생을 아무나 붙들고 혹시 생활지도관 중에 이런 이름을 쓰시는 분이 아직도 계시느냐고 쉽게 물어볼 수가 없었고 편지를 보내는 편이 오히려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해 가을이 깊어가던 오후 나절, 적보산 나무들이 단풍으로 온통 붉게 물들었을 무렵 나는 오른손에 빨간색의 편지 봉투를 들고서 무궁화관에서부터 학생회관까지 연결되어 있는 피우로를 따라서 끝까지 걸어가 그 지점에 서 있던 빨간 우체통에다 그 편지를 넣었고 편지의 수신인이던 분은 우체통이 서 있는 바로 옆 건물인 수범관의 생활지도관으로 아직도 계시며 충주시내에 있던 우편집중국에서 빨간 우편 소인 도장을 몸에 찍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 빨간 편지 봉투를 받아 보고서는 달 빛 가득하던 늦은 가을밤 저녁 점호를 끝내고 소등을 마친 무궁화관 생활지도관을 통해 허락을 구하고 나를 불러내셨고 우리는 그날 밤 가로등 빛 아래 반짝이던 단풍나무 아래에서 처음으로 만날 수가 있었다. 생활지도관은 교육생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그 분은 나를 보자마자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 반갑다는 인사를 하셨고 나는 난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부끄러움에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학교에서의 보내는 시간은 점점 빨리 지나갔다. 지도관님을 만나 뵙기는 했지만 갑을 반으로 나뉘어 근무를 하셨던 터라 이틀에 한 번씩 학과출장을 나갈 때 그것도 어쩌다 한 번씩 잠깐 동안 스쳐지나가는 모습만 뵙는 것이 전부였고 그 후부터 나는 거의 일주일에 몇 번씩 학생회관 앞 우체통에 편지를 넣기 시작했고 그 편지가 다시 학교로 되돌아오도록 수신인을 쓰면서 편지 속에서만큼은 지도관님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지도관님에 대해 그 당시 어떤 사적인 마음을 가졌었느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예’혹은‘아니요’라고 쉽게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 감정의 형태는 젊은 남녀가 난생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아보기 직전에 느낄 수 있는 두려움이 뒤섞인 혼란의 감정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저 은혜를 입은 사람이 상대방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식의 고마움도 아니었다. 당시 지도관님께서는 아름다운 처와 아이 둘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막 불혹을 넘기신 연배이셨고 나는 스물일곱 살로 아직 연애한번 안한 순진한 아가씨였다. 거꾸로 돌려서 바라본다면 당시에는 무엇 하나 나를 가로막을 것은 없었으며 얼마든지 내 마음을 내 감정대로 표현한다고 해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도관님에 대한 나의 마음은 보통의 문제가 될 수 있는 가벼운 농담으로 이야기하며 넘어갈 수 있었던 흔한 남녀 관계가 아니라 그저 그 분의 존재가 그 당시 나에게는 삶의 활력소이자 기쁨 그 자체로 다가왔다고 말한다면 그래도 가장 솔직한 대답이 될 것이리라. 나는 지도관님이 근무하시는 날을 기다렸고 어떻게 해서든 우연이라도 만들어 내서 그분이 교정을 한가로이 산책하시는 모습이라도 한 번 더 볼 수 있기를 바랬다. 그 분을 기다린다는 것은 내가 학교생활을 하루 씩 더 앞질러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나는 그날을 살고 있으면서도 현재라는 소중한 시간을 오히려 방해물로 여기며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오늘을 뛰어넘어가고 있었지만 그 분에 대한 나의 생각과 행동은 그렇게 경솔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어쩌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주저하게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졸업식이 있던 전날 밤 수범관 앞에서 만난 지도관님은 나에게 내 이름의 이니셜이 새겨진 열쇠고리를 졸업선물이라며 건네주셨고 나는 학교를 졸업한 후 거의 일 년이 지나간 뒤에 한 번 더 모습을 뵐 수가 있었지만 우리들의 만남은 그것이 전부였었다. 하지만 나는 내 행동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당시 나는 내 마음을 보여드리고 싶었던 욕망을 그때의 최고의 순간에 가장 순수한 방식으로 감사함을 표현했고 전하였으므로.      


계속된 학교생활과 졸업     


   학교생활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나는 여름이 막 시작했던 6월에 입교하여 3월에 졸업이 예정되어 있었던 기수로 학교에서 경험 할 있었던 최고 정점의 날씨인 더위와 추위의 끝을 다 보았던 셈인데 날씨로 인해 학교생활이 가장 불편해지기 시작했던 시절은 아이러니하게도 몸이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한 교육생활의 후반기부터였다. 그곳의 겨울은 시작부터 끊임없이 많은 눈이 내렸는데 한번 내려 쌓인 눈은 이듬해 봄이 되기 전까지 거의 녹지 않을 만큼 추운 날씨만 지속되었다. 여전히 새벽기상과 운동장 구보는 계속 되었지만 그런 교칙과 생활들이 나의 학교생활을 방해하지는 않았지만 단 한 가지 그곳의 추위만큼은 정말로 견뎌내기 힘들 만큼 나를 가장 괴롭히는 존재였다. 왜냐하면 체력단련의 일환으로 무도 종목 한 가지를 필수로 수강해야 했는데 가느다란 팔다리와 가벼운 체구를 가진 나에게 유도라는 종목은 정말로 따라가기 힘든 과목이었다. 무엇보다 한 겨울 추위에서 속옷에 도복 한 겹만 입은 채로 거의 바깥과 다름없는 체육관에서 두 시간씩 수업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수십 차례 낙법과 앞구르기 뒤구르기를 반복하더라도 체온은 올라갈 기미조차 없었고 여전한 고질병이던 빈혈이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낙법을 한 번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라도 어지럼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또한 상대 선수와 한판 겨루기에서 업어치기를 당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로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무거운 공기가 나를 짓눌렀고 무도 수업이 있을 때마다 내 몸에는 검푸른 멍 자국이 한 두 개씩 늘어나기 시작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업무의 특성상 근무 시 권총을 휴대하게끔 되어 있었던 경찰관이 되려면 사격 훈련을 받고 일정 점수 이상을 통과해야만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었는데 사격장은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고 실제로 권총을 쏜다는 사실만으로도 겁이 났었지만 사격훈련이 예정되어 있었던 날에는 내복을 두 겹으로 껴입었을 정도로 나는 추위에 매우 취약했다. 그것은 나의 지나치게 마른 몸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저혈압과 낮은 적혈구 수가 빈혈을 더 악화시켰기 때문에 날씨가 추운 날에는 빈혈증세가 더 나빠지면서 평소보다 두통이 심해졌고 현기증이라도 나는 날에는 사격장에서만 존재하는 특별한 불안과 부상에 대한 위험이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10미터 떨어진 거리에 직접 표적지를 붙이고 38구경의 권총 레버를 돌려가면서 실탄을 장전한 뒤 가늠쇠 가늠좌의 간격과 수평을 유치한 채로 그 순간만큼은 호흡을 멈추고 방아쇠를 약 2~3초 동안 당기게 되면 총알이 발사되는 것인데 그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 안 되며 숨을 참고 있는 사이 무의식중에 총알이 발사되어 나가야 표적지의 중앙지점에 총알이 박히게 된다는 것이 38권총 사격의 기본 원리였다. 총알은 탄피를 남겨놓고 맨 몸으로 날아가면서 눈앞에 섬광과도 같은 불꽃을 내뿜었는데 마치 초소형 로켓이 발사되는 것처럼 까만 기름때와 화약 잔재를 증거물로 남긴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 영하의 추위에서 장갑을 벗고 맨 손으로 사격을 해도 손이 시려 운 것을 느끼지 못한 정도로 사격이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닌 교본적인 기술과 침착성과 집중력이 훨씬 더 중요한 관건이었으므로 점수는 꽤 좋은 편이었고 어떤 날에는 마치 전에 총을 잡아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표적지 중앙의 검은 색 10점에 거의 다 맞추기도 했었다.      

   어떤 성과가 보였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오히려 무도훈련 보다는 사격훈련이 있었던 날이 그나마 위안으로 느껴지기도 했었다. 실제로 교육생 중에 사격장에서 훈련도중에 왼손 엄지손가락에 부상을 당했던 동기는 그 기수의 졸업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퇴교하였는데 다음 회의 기수의 훈련에 입교를 하여 처음부터 다시 그 순서대로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고 했었다. 그만큼 졸업이 가까워 올수록 부상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고 그렇게 길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겨울도 점점 우리 곁에서 물러나면서 졸업의 단 일주일만을 남겨놓고야 말았다.      

   이렇듯 시간이란 아무리 안달해도 우리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의 능력대로 맡은 바 소임을 행하면서 사람들과의 약속을 변함없이 지켜가는 것이 시간의 존재 이유이며 세상의 무엇도 그 것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순간 잠깐의 현실을 못 견뎌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게 생각되기도 했다. 200여 년 전 오스카 와일드는 삶의 순리를 간파하고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흘러가버린 과거는 아무리 힘든 시간이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찬란했을지라도 지나고 보면 한낮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이미 경험해 보았던 내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의 겨울은 추위가 매서운 만큼의 빼어난 경치를 뽐내었는데 그것은 그곳에서 겨울을 지나는 사람들을 이중으로 괴롭히는 일이었다. 추위 때문에 실내에서 계속 머물고 싶은 욕구와 멋진 설경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접 두 눈으로 만져보고 싶었던 두 가지의 욕망으로 매번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자유시간이 허락되었던 날에는 아예 작정을 하고 눈만 살짝 내놓은 차림으로 사격장이 있는 중턱을 넘어서 학교가 차지하고 있는 최고의 정점까지 올라갔었는데 쌓인 눈 탓에 걸을 때마다 무릎 높이까지 발이 빠졌고 걷는데 평지에서보다 몇 배의 힘을 줘야 했기 때문에 두꺼운 옷 안은 몸이 발산해 낸 열로 이미 후끈하게 달아올라 있었으므로 그다지 추위가 느끼지도 않았었다. 무엇보다 그 멋진 설경을 한 군데라도 더 눈에 담아 두려고 열심히 눈을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추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아주 사소한 방해꾼에 불과했다.      

   내가 경찰학교의 교육생이 되어서 이런 경치를 공짜로 마음 놓고 구경할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게 느껴질 정도로 학교의 전경은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경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산과 지붕과 운동장은 마치 솜이불을 덮고 잠이 든 것처럼 고요해 보였는데 한편으로는 등허리에 두껍게 쌓인 눈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서 어떤 날에는 그 고요함이 막연한 정적처럼 기분을 낮게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이제 코앞으로 다가 온 졸업과 그 후에 펼쳐지게 될 또 다른 새로운 생활에 대한 조바심과 두려움처럼 쌓인 눈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동기생들은 각자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나는 정말로 인생을 열심히 누구보다 의미 있도록 잘 살아야겠다며 다짐했고 그것은 겨울방학이 끝나가는 아이처럼 게으르게 흘려버린 방학생활에 대한 아쉬움과 개학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이 섞인 마음과 많이 닮은 것이었다. 솔직히 학교생활의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생활지도관들이 우리에게 허용해 주는 자유가 많아지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생활도 나태해졌던 것이 사실이었고 그러면서 나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나 느껴보았던 성취감이 주는 기쁨을 또 한 번 경험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되 살아나기 시작했던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졸업까지는 아직 한 달이라는 여유가 있었고 그 해의 내 나이는 이제 스물여덟이 되어 있었다. 학창시절 취미로 한 장 두 장씩 번역을 했던 것을 이제는 아예  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한 권의 책을 번역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아직은 우리나라에 번역본이 없었던 동화책 느낌이 드는 수필집을 구해 갖고 있지 않았었던가.      

   <Always Wear Clean Underwear. ; And Other Ways Parents Say “I Love You”> 책 제목이 이랬다. 그래서 나는 <‘사랑해’를 돌려 말하는 방법들> 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100쪽이 넘는 영문문고 번역을 시작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내 남은 학교생활은 활기를 되찾았고 분주해졌다. 저녁 점호가 끝나고 소등이 되면 다른 동기생들에게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책과 연필과 공책을 들고 화장실로 나와서 변기를 의자 삼아 자정이 넘어가도록 번역을 했고 학과 수업시간에도 앞자리의 동기와 자리를 바꿔가면서 일부러 교수님 시선의 사각지대에서 번역을 했고 점심시간에도 저녁 식사 시간 후 청소시간이 되기 전까지의 자유시간에도 나는 계속 번역을 했다. 그 일은 누군가의 생각을 내가 다시 옮겨 쓰는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혀 새로운 의미로 나에게 교훈을 주는 훌륭한 작업이었고 작업의 끝이 보일 무렵에는 정말로 또 한 가지의 일을 해 냈다는 성취감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이런 나를 생각한다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괴짜로 여기며 비웃을 지도 모른다. 화장실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저녁 점호가 끝나기 전 그 날의 청소상태 점검을 받았는데 화장실 변기, 세면기 바닥에 물이 한 방울이라도 발견되었던 날은 밤새도록 토끼걸음으로 기합을 받았을 정도로 여느 집 안방만큼 깨끗한 상태였고 물론 학과 수업시간 동안 배우는 내용은 졸업시험과도 직결되었지만 나에게는 졸업 성적의 고하는 문제가 되지 않았었고 순조롭게 졸업을 하기 만 하면 된다는 태도를 가진 조금은 불성실한 학생이었으며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교육생으로서의 생활 태도에 감점을 받을 만한 교칙은 아니며 그저 개인적인 목표의 문제였으므로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졸업하기 전 주 마지막 외박을 나가서 번역본의 제본을 20부 맡겼고 졸업식 전날 밤 동기인의 축제가 끝나고 평소처럼 저녁 점호가 없이 자유롭게 잠자리에 들었던 학교에서의 마지막 날 밤, 함께 목욕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면서 힘이 들 때는 의지가 되어 주고 서로를 위로해 주었던 생활실 동기들에게 짤막한 쪽지와 함께 그 번역본을 나눠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일부러 내 이름의 이니셜을 새긴 열쇠고리를 만들어다 졸업선물로 주셨던 지도관님께 금녀의 구역이던 수범관으로 직접 찾아가서 지도관실 한 가운데 놓인 석유난로에 뜨거워진 두 손으로 직접 그 책을 건네 드렸다. 지도관님은 여자 교육생이 남자 생활관에 그것도 지도관실에 들어온 것은 개교 이래 아마도 내가 처음일 것이라며 나를 웃겨주셨지만 나는 전혀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보통의 인간이란 이와 같은 상태에서는 자기의 기분을 상대방에게 표현하고자 하는 본능에 가까운 분위기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인데 그날 밤 나는 지도관님의 표정에서 일부러 나를 더 어린애 취급을 하시면서 우리의 관계를 지도관과 교육생으로 명확하게 구별하시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나의 충동적인 본능이 돌발행동이라도 저지르게 될 까봐 특별히 더 신경을 써야만 했었던 것이다. 만일 시간이 어느 특정 한 사람에게만 거꾸로 흘러갈 수 있어서 지도관님이 여전히 미혼인 채로 계셨더라도 내가 그저 가벼운 거수경례로만 작별인사를 했을지 자신할 수는 없다. 나는 번역 속에 역자 주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삽입하면서 어설프지만 책을 한 권 만들어냈고 어쩌면 그것을 그렇게도 지도관님께 드리고 싶었는지도, 나만의 특별한 의미를 비록 그것이 남들이 보아 유치하게 보일지라도 그렇게 전해 드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날, 이제 나는 정식으로 대한민국 여자경찰관만이 누릴 수 있는 정복을 입고 황금색 실로 장신된 모자를 쓸 자격을 갖추고서 군기가 바짝 들어간 신입으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마음속에 품고 대운동장 한 가운데 줄을 맞춰 서서 경찰청장님과 학교장님과 여러 교수님들, 그리고 생활지도관님들을 모셔 놓고 졸업식을 거행하며 교육생활의 막을 내렸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많은 가족들 사이에 함께 계셨던 엄마와 아버지를 모시고 그 복장을 그대로 입은 채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며칠 후면 이제 나는 정말로 대한민국의 경찰관으로서의 정식 근무를 시작해야 했고 그 곳이 어디일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꿈에서 조차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또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그곳으로 떠나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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