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만의가정-아들셋]
제12편. 장애인 주차 구역

"엄마도 장애인만큼 힘들잖아~~"

by 김현이


단우를 황급히 데려다 주고 바쁜걸음으로 내 신발끝을 쳐다보며 걷다 점점 좁혀지는 자동차로 시선이 옮겨가면서 나는 잠깐 밤사이 술에 취한 사람이 전면 유리에 작은 휴지조각을 흩뿌려 놓았다는 생각에 성급한 화가 났었다. 더 가까이 가서 보자 최근 내 마음이 너무 급해진 게 아닌지 찰나의 반성을 하게 되면서 그것은 휴지조각이 아니라 밤사이 영하의 기온을 견뎌내지 못했던 하늘에 붙어 있지 못한 구름 조각들이 잠시 내 자동차를 침대로 사용한 흔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담하지 못하게 차창문틈 사이에도 그 작은 눈발은 마치 누울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라도 했던 눈치 빠른 아이처럼 등이 굽은 새우모양으로 소심하게 누워 있었다. 길게 생각할 여유도 없이 아이들 둘을 뒷 좌석에 태우고 창문 네개와 심지어 천정에 나있는 창문까지 모두 열어재친 채 차내의 실내 환기를 명목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멀리 날아갈 것으로 여겼던 눈발들은 예상밖으로 차 실내로 날아 들어왔고 그 바람에 아이들과 나는 동시에 "아~! 차가워." 의식없는 말들을 뱉었다.


작년 가을과 겨울을 너무 힘겹게 보냈기 때문에 3월의 봄소식이 어느해 보다는 반가운 나였기에 최근 들이닥친 꽃샘추위는 정말로 초대하지 않는 낯선이처럼 어색하고 피하고 싶은 대상이다. 그래도 겨울이라는 녀석은 후발주자인 봄에게 그 자리를 선뜻 내어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모양이었던 건지 아니면 이미 찾아온 신입격인 봄이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있는 것인지 구별할 수는 없었으나 3월의 꽃샘추위는 멋내고 싶은 아가씨한테도 옷을 가볍고 입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놀고 싶은 아이한테도 귀찮은 존재인 것은 명백하다. 그래도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봄이 코 앞에 와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아빠의 경비부서 발령으로 주말에도 출근을 해야하는 경우가 더 잦아졌다. 이미 아이 셋을 데리고 다니는 것에 어려운 상황들이 많다는 것을 시행착오를 통해서 내 나름의 노하우-특별히 방법이랄것은 아니라 어쩌면 시간 보내기의 융통을 배웠다고 하는 쪽에 가깝지만-를 겸비하기도 했지만 그 보다도 아이들에게 했던 약속을 꼭 지켜주겠다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내 의지가 항상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일요일에 도서관으로 놀러 가자고 주중에 말을 해 왔으니 그 말의 반이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대충 점심을 먹이고 서둘어 도서관으로 차를 몰았다. 예상대로 주차공간은 없었고 마침 막내가 잠이 들어서 내가 주차할 공간을 차안에서 살피는 사이 큰 두아이들에게 먼저 도서관 영화관으로 가 있으라고 했다. 도서관에 오고싶었던 마음이 컸던지 엄마말에 어떤 의심도 없이 아이들이 차에서 내려서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나는 잠시 교차되는 차를 비켜주기 위해 장애인 주차구역에 비상등을 켜고 서 있었다. 30초 정도가 흘렀을까, 어떤 생각할 시간의 여유도 되지 않은 동안에 정우가 운전석쪽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엄마!! 왜 안들어와.. 빨리 들어와.."

"정우야 아직 주차를 못했어. 들어가서 영화 보고 있으면 바로 들어갈게.

선우 혼자 있잖아. 얼른 들어가."

"그냥 여기에 대면 되잖아. 여기에 대.."

"안돼 정우야! 여기는 장애인 주차 구역이야."


아까보다 더 다급한 정우는

"엄마도 우리때문에 장애인만큼 힘들잖아. 그러니까 여기애 대~~~!!!"


나는 한참을 큰 소리로 웃었다. 얼마만에 이렇게 큰 소리로 웃었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았지만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의식하지 않고 심지어 이제 막 잠들기 시작한 단우가 깰까봐 걱정하는 조바심도 없이 그냥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마침 누가 도서관 주차장을 빠져나갔고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그 자리에 차를 주차할 수가 있었다.


한 낮의 태양이 창으로 들여보내는 빛이 제법 강해서 아이에게 충분한 이불이 되겠구나 생각 들었고 오히려 복사열로 차내가 너무 더워질 것을 염려하여 앞 좌석 창문을 5미리미터 정도 열여 둔 채 차문을 잠그고 내렸다. 아이들이 아무리 아홉살, 일곱살이래도 저희들끼리 놔두기엔 불안했고 차 안에 아이를 혼자두기에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두 아이에게 엄마는 동생이 잠이 깰때까지 차에서 있을거라고 어떻해든 이 안에서만 있으라며 최대한 안전하게 놀 것을 몇번 당부하고 다시 차로 돌아갔다. 단 몇분간의 공백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아이가 혼자 깨서 울고 있는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어서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시간 조차도 참을 수가 없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차안은 단우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숨에서 나는 비릿한 단 내음으로 따뜻한 공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가 두 팔로 만세를 부르며 평온하게 잠자는 모습을 재차 확인하고 나는 챙겨간 책을 꺼내들었다. 고개를 너무 오래 숙인채로 있는게 뻐근해서 거북목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가 차안 미러를 통해 보이는 뒤편 벽면의 장애인주차구역 표지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러다가 정우란 녀석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점점 아들을 키운다는 것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일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과연 내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잘, 말 그대로 다른 수식어가 필요없이, 잘 자란 어른으로 키워낼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누려보는 고요함이었고 그래서 내 생각은 빨리 흘러갔고 정우의 입장으로 정우가 겪었던 일들에 내 감정까지 이입이 되다보니 점점 더 가속이 붙어 지나갔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일까.. 정우가 지금 아홉 살이 되었으니 지금의 나이를 딱 반으로 접은 나이쯤 됐을 것이다. 선우가 이제막 걸음을 떼고 아장아장 걸을 때 였으니까. 그때도 나는 여전한 워킹맘이었고 아이들 유치원 여름방학을 친정집에 보내도록 하기위해 엄마가 두 아이들 돌봐주던 때였다. 당시 교대근무를 했던 아이들 아빠가 방학이 끝날시기에 맞춰 데리러 간다고 연락이 되어 있던 터였고, 열흘가까이 엄마아빠를 보지 못했던 아이들은 아무리 외할머니의 사랑이 깊었어도 엄마에게서 얻는 포근함이 그리웠을 것이다. 아빠가 데리러 온다는 말을 듣고 네 살밖에 안됐던 정우는 얼마나 기다렸을까.. 점심때쯤이면 도착했어야 할 아빠는 오지 않고 산에 갔다가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그래서 애초엔 저녁이 지나서야 도착이 예정되어 있었던 아빠를 아침부터 시골집 마당을 벗어나 큰 시내옆에 놓여 있던 평상 앉아 있다 다시 집으로 오기를 온 종일 반복했다고 했다. 당연히 미리 전화를 하지 않고 예상보다 늦게 오는 사위가 괘씸하게 여겨지셨던 아빠가 아이들 아빠를 나무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 작은 정우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아빠가 미웠다기 보다는 아빠에 대한 할아버지의 꾸지람이 더 야속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정우가 온종일 앉아서 기다렸다는 그 평상옆에는 단풍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 단풍나무는 내가 스무살이 되기 전에 아빠가 심어놓은 나무로 사람으로 치자면 그때 정우와 동년배쯤으로 해가 바로 머리 위에 떠 있을 때는 엄마의 마티즈 승용차 한대를 세울 정도의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의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점점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단풍나무의 그림자가 동쪽으로 목을 길게 뻗게 된 것처럼 작고 동그랗던 정우의 마음도 왜 아빠는 오지 않으실까 설마 오지 않는 건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단풍나무 그림자 따라 점점 길어지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정우는 나를 찾아온 첫 번째 아들이다. 처음이라는 것은 개척자에게와도 같이 미지에 대한 기대와 설렘과 불안함이 공존한다는 것도 안다. 그러기에 시행착오 한번 겪지 못한 엄마는 모든면에서 서툴지만 온갖 열정으로 모든 노력을 쏟아 붇는 사랑을 주기도 하는 존재다. 현재 아들만 키우는 내게 딸을 더 낳아보라는 주변인의 충고를 가끔씩 듣지만 나는 그런 말을 건성으로 무시하지도 주의깊게 듣지도 않는다. 나에게는 딸이 없었기 때문에 딸들은 어떤 과정으로 성장해 나가는지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정우는 잠들기전에 항상 " 엄마 고마워요, 사랑해요, 나 잠들면 자요.." 말하고 내 볼에 뽀뽀도 해 준다. 사실 나는 딸로 커왔고 딸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흔히들 '딸은 나중에 엄마의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 좋은거다, 엄마와 교감이 잘 되고 공감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테니 아들보다는 딸이 좋을것이다.'라는 상투적인 말들을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거기에 걸맞게 성장하지도 그렇다고 현재 내가 엄마와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여건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받는 입맞춤보다 더 많은 입맞춤을 해주리라. 아이는 엄마인 나의 사랑을 알 필요가 있고 내 아이가 그것을 알고 성장한다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정우는 이제 아홉살이다. 아이는 점점 자라고 있고, 나는 하루하루 아이를 조금씩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곧 아이를 놓아주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임을 배워가고 있다. 특히, 어쩌면 이 과정은 딸보다 아들일 경우에 더 혹독한 일이 될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세 번의 출산을 경험하면서도 나는 단 한번도 어떻게 해서든 도망쳐야 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아직도 미미하고 부족하고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화도 내지만 내가 지켜오고 있는 아름다운 아이들이 나를 나보다 더 큰 또 하나의 무언가에 닻을 내릴 수 있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엄마가 주는 사랑을 마치 숨을 쉴 때 공기의 고마움을 일일이 표현하지 않는 듯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엄마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인생이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진정 큰 기쁨으로 거두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어쩌면 나도 그 일을 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난 가을부터 겨울 동안의 몇 번의 상처와 좌절을 맛보면서 나는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것이 더 쉽게 느껴졌다. 비록 내가 속한 둘레의 원 밖에서 나를 바라봤을때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것은, 돌이켜보면, 짧지 않은 내 삶의 한 부분에서 참으로 놀라운 과정이었고 혹독한 내면의 성찰을 통해서 비약적인 성장을 했기 때문이다. 봄이 턱밑까지 와 있는 지금, 여전히 나는 전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 내가 삶의 방식을 바꾼것도 나의 생활패턴이 변한 것도 아니며 다만, 나 스스로부터 내 자신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일들이 많아졌고 그로인해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또한 내 관심의 대상을 바꾸다 보니 한 곳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지 않아도 되게 되면서 내 본래의 참을성도 되돌아 왔고 자연스럽게 나의 좋은 습관들도 되 살아나서 내 삶의 지향점을 약간은 수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인해 나는 또다시 생산적인 사람으로서 살아가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나라는 엄마는 여전히 "사랑해"라는 말에는 서툴고 다정함이 부족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내 마음을 행동으로 어떻게 보여줄지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특별히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다만, 내 아이들이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먼 훗날 내 몫으로 남겨져 있을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오래된 미래를 상상하며 단상에 빠져 본다. 정우가 낳아온 아이 - 내 첫 손자,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지금의 정우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나의 모습을....



회사 출입문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가 해 넘어가는 서쪽 능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찬 공기를 쐬니 느슨하게 풀려서 막연했던 생각들이 점점 그 경계를 또렷하게 나뉘고 정돈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회사 주차장에도 여전히 장애인 주차구역 표지와 그 만큼의 공간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주차장엔 꼭 필요한 구역이고 필수적인 구성 요건이다. 내 머리카락이 다 희어져 할머니가 되어서도 운전을 하게 되고 주차를 할 수 있다면 도서관 주차장에서 정우가 내게 했던 그 말은 평생 기억속에서 상기될 것이다. 늬엿늬엿 넘어가는 해를 보면서 내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이 악물로 달렸던 지난 시절을 잠시 화상하다가 이제는 내가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살아가야겠다는 의지가 담긴 생각을 해 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만의가정-아들셋] 제11편. 돈가스 튀기는 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