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전 시간, 그 날 따라 유난히도 쿵쿵거리면서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아이들에게 몇 번씩의 주의를 주고 환기시켜줘 가면서 발바닥 단속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막 11시를 넘어가려는 그 시간, 딱히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짧게 끊어지는 울림-"띵동!" 소리에 마치 올 것이 왔다는 것처럼 내 심장도 문같은 종소리를 낸다. 아랫층에 사는 사람이 층간소음 문제를 호소하기 위해서 작정하고 찾아 온 것이 틀림없다. 나는 눈빛으로 아이들 아빠의 등을 떠민다.
"아 네, 그래요...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무조건 참지 마시고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무조건 조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남편이 이렇게 무조건 조아리며 사과를 하는 도중에 내 귀속에 아랫층 남자같은 불청객이 들어 앉는다. 아랫층 남자가 말하길, '벽에 못질을 하고 낮에도 쿵광거리는 소리때문에 부모님이 시끄러워서 도대체가 참을 수가 없다고 하신다.....'고.. 그 순간 나는 아니 언제 내가 벽에다 망치질을 하고 낮 동안에는 무조건 비어 있는 집에서 누가 들어 오길래 쿵쾅 쿵쾅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는 것인지 변명이라도 해서 한가로운 휴일 오전 시간을 방해한 아랫집 남자에게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들도록 해주고 싶었지만 남자로만 된 꼬마들이 살고 있는 집 안에서 발생하는 전형적인 소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쥐죽은 듯 문 뒤에 숨어 있기만 했었다. 더군다나 우리집엔 그런 녀석들이 셋이나 되지 않던가.
나라는 존재,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느 학교를 다녔고 지금은 내 직업이 무엇인지 등 자기 소개의 지극히 전형적인 요소를 생략하려고 한다. 이런 상투적인 것들이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굳이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기를 독자들이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성별로써는 여자이고, 국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건전한 사고방식에 어느 정도 잘 정립된 가치관을 지닌 채 살아가는 한 소박한 국민일 뿐이다. 평소의 나는 조용한 편이지만 내 관심사가 대화의 주제가 되는 상황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말이 많아 지는 수다쟁이기도 하며 내 DNA 유전자 46개 중 정확히 반쪽 23개를 물려준 아이 셋과 동거동락하고 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개성있는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특정 상황의 경계에서 관심이 쏠리는 쪽으로 일단 돌아서게 되면 무섭고 예리한 통찰력이 발현되면서 기꺼이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할 수 있는 열정을 잠재하고 있기도 해서 보통의 여자들과는 별개의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다. 성급한 결론을 내는 거 아니냐고 비난할 수 있지만 어쨌든 나는 상당히 규범적인 사람의 표본이며 모범적인 사람의 전형인 셈이다. 다만, 드러나는 모습에 비해서 그다지 모범적인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 모순된 인간이며 쉽게 비판하기 좋아하는 착함의 대비되는 역설적인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나는 항상 교양인이 되기를 열망한다. 내가 갈망하는 교양인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교양인'에 부합되는 인물이 아니라 순전히 내 주관적인 기준에 맞는 교양인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 조금은 특별하다고 치자면 그럴 수 있다. 나는 보통의 여자다. 마치 불길의 화려함만을 보고 불꽃인 줄 모르고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묻남자들의 유혹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무턱대고 온몸을 던지는 [경박한 여자]도 아니며,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사람이 한 번 더 뒤돌아 볼 정도로 미모를 갖춘 [예쁜 여자]도 아니다. 미인대회의 기준으로 해서 줄을 선다면 보통 이하 수준에 머물러 있어야 할 정도의 외모를 갖추고 있는 어쩌면 여자로서 자신감이 떨어지는 수준의 외모라고 말해야 정확할 지도 모른다. 마치 오랫동안 남자한테 퇴짜를 맞은데서 오는 상처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한테 고백을 할 때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굴욕적인 태도를 지닌 여자들의 공범자 수준 정도라고 말한다면 전달이 쉬울까? 아무튼 나는 다수의 여자들과 단체사진을 찍을라 치면 항상 맨 뒷줄로 물러나는 소극적인 행동을 하는 여자에 가깝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교양있는 여성은 어떤 여성을 말한다는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열망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쉽게 공감하는 사실이다. 육체와 정신이 마치 한 마리의 경주마처럼 강인한 여인, 그 내부에서부터는 타인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무한한 힘이 뿜어져 나오는 '포스'가 있는 여인- 마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한 입에 먹을 수 있고, 살아서 파닥거리는 송어 옆구리 살을 바로 빨간 초고추장에 담근 것을 안주삼아 술을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똥을 밟고 넘어졌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또한 호전적인 기개로 보란 듯 짝퉁 명품가방을 둘러매고 다닐 수 있는 그런 여자를, 한 여름은 알파카로 장식된 조끼를 입고 한 겨울에는 비들를 잔뜩 붙인 민소매 원피스를 보란 듯이 걸치고 의기양양한 태도로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교양을 갖춘 여자를 한 번쯤은 꿈꿔 보는 것이다. 나는 여자로서 그런 교양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여태껏 살아왔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상식에 걸맞는 여자라는 수식어가 붙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본연의 내 자신을 억눌러 감추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른 새벽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이른 시간 04시 10분이 막 지난 시간, 배란다로 나와 서서 지난 밤 일기예보가 맞는 지 확인해 보려고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웃긴 생각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지상주차장 내 승용차를 가로 막고 주차되어 있는 차 등짝에 침을 뱉어 정확히 맞힐 수도 있는 위치에 서 있는다. 고개를 들어서 서쪽 능선을 보니 마치 하늘과 땅이 붙어 있는 것 같다. 짙은 회색의 조금 더러워 보이는 구름이 우뚝솟은 산봉우리를 한 입 크게 베어 먹고 토해낸 토사물들이 함몰된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아 있다. 동이 틀때까지는 적어도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그 때 되면 그 토사물은 정말로 밤사이 기온하강탓으로 땅 가까이 가라 앉은 구름이 뱉어 버린 먼지 섞인 수증기- 새벽 안개임을 알 수 있으리라.
막내를 항상 왼쪽 팔베개로 재우다 보니 뽀로로가 그려진 요를 같이 깔고 자는 세 아이 엄마이면서 아침이면 어김없이 출근할 곳이 있는 어엿한 직장인, 그리고 항상 본연의 꿈을 꾸며 반드시 이뤄지기를 갈망하는 소녀같은 희망을 품은 여자, 사실 나는 평범한 여자들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여자이다. 솔직하게 고백하지만 바로 그런 것들이 내 삶을 지탱하는 지지기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게 일탈은 아이 셋 곤히 자는 시간에 방에서 나와 미처 끝내지 못한 겨울옷을 정리하거나 몰래 하드 하나를 꺼내 먹고 장난감 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책을 읽는 것 쯤이다. 아이들을 재우는 것이 일탈의 시작이며 깨우지 않는 것이 이 모든 외도의 지속이다. 아이가 깨어나면 나의 일탈도 같이 깨지는 것이다. 배란다 문이 열리고 정우가 고개를 내민다.
"엄마! 안자고 뭐해?"
'이번엔 단우가 아니라 너냐?' 큰 아이 등을 떠밀어 같이 안 방을 들어와 다시 누워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빛에 이기지 못한 어둠이 점점 후퇴하고 있는 게 보인다. 이제 눈을 뜨고 보니 새벽의 미명이 아이의 손 눈썹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래서 내가 언제나 그렇게 교양을 쌓기를 열망하며 살아가는 데도 이제는 더 이상 배울것이 없다고 선언하지 못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최선은 단 한 줄이라도 더 이상 써내려가기를 멈추는 것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원래 교양인이란 항상 그것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두고 말하며 순전히 그것만을 쌓겠다는 목적만으로 일생을 사는 사람인데 나에게는 애석하게도 그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회사로 이어지는 길 가에는 자그만 산비탈을 따라서 새 하얗다 못해 연녹색 빛을 발하는 배꽃밭이 둥글 넓쩍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 맘때 출근길에서 그것 만큼 훌륭한 눈요기도 없다. 계절의 흐름은 말이 없어도 온몸으로 직접 모든것을 보여주고 표현해 낸다. 겨울이 추위로써 그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이라면 봄은 부드러운 따스함으로 희망과 선량함의 대명사인 정직한 성직자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만물의 이치에는 또 다른 이면이 존재 하 듯 겨울이 봄은 반드시 온다는 기대를 심어주는 안내자라면 곧 시원함이 간절해지는 무더운 여름 볕이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는 심리적인 구속감을 주는 것 또한 봄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차분하게 견뎌내면서 그 어떤 순간에도 본연의 나로서 존재하는 법을 알기를 원한다. '꿋꿋하게 참고 견뎌라, 좋은 날은 그 다음에 오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려워하지 말라.. ', 푸쉬킨의 싯구와 그리고 '인내가 쓸 수록 수확의 열매는 달콤하리라.' 아침 출근 길, 지난 겨울 동안 꽁꽁 얼어 붙어 있으면서 그 꽃 피울 순간 만을 숨고르기 하며 기다렸을 산비탈 언덕의 배 꽃을 보고 나는 이런 훌륭한 옛 격언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