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봄은 지금쯤 약 8부 능선을 넘은 것 같은 날씨다. 사실대로 말하면, 지난 며칠간은 봄이 걷기를 거부하고 정상까지 나 있는 산책로를 오토바이라도 타고 올라서 이미 여름에게 바통을 건넨 듯한 날씨가 지속됐었다. 5월 중순임에도 기상청의 일기예보는 한 낮의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어섰다고 했을 정도로 그 만큼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음을 실감했었다. 어긋남 없이 새벽 5시가 조금 넘어선 시간에 깨어나 베란다 창문부터 열어 본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찡하게 한다.
그릇의 절반이 약간 넘도록 담아서 미리 식혀 놓은 누릉지를 티스푼 보다 1.5배 큰 사이즈의 숟가락과 함께 삼각형 모양으로 차려 놓는다. 그리고 라디오를 켜놓고 잠들기 전 덮어 줬던 이불에 배를 깔고 지그재그로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운다.
"얘들아~! 오늘은 금요일!
오늘만 열심히 보내면 이틀 동안은 신나게 놀 수 있어~ 얼른 일어나~!"
라디오, 그리고 남편의 것을 합친 휴대폰 2대가 우리집에 있는 유일한 전자기계다. 라디오를 켜는 행동은 뉴스 끝자락에 나오는 일기예보에 집중하고자 하는 것과 시계를 봐가며 시간을 확인할 여유가 부족한 아침에 라디오는 친절하게도 중간 중간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기 때문에 어느새 습관이 되 버린 내 아침 패턴이다. 또한 감기에 걸렸다며 평소보다 잠긴 목소리의 김00 앵커의 사과 인사말부터 출발한 7시 뉴스의 8시 10분전 일기예보까지 이르면 오늘 아침은 평소보다 준비가 빨랐는지 아니면 조금 서둘러야 애들 등교 시간에 댈 수 있는지 가늠해 볼 수 가 있기도 해서다. 몇 년 전만 해도 일기예보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미세먼지 지수는 내가 가장 집중해서 듣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집을 나설 때 창문을 열어서 온 종일 환기를 해도 될 지 판단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1층까지 아이들과 나를 내려준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마치 시력이 나빴던 사람이 안경을 극세사 천으로 닦고 고쳐 쓴 듯 시야가 멀고 넓어졌음을 단 번에 느낄 수 있다. 눈이 부시다.
사무실 입구, 이중으로 된 유리문을 열고 막 들어서려는 순간 두 계단 높이의 바닥까지 연결된 슬로프 이동로 끝 난간에 묶여있는 개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반쯤 열린 문에서 손을 떼고 다시 개한테로 몇 발자국 옮겨간다. 유기견으로 신고 된 개임이 틀림없다. 나는 밝은 누런빛의 털이 온몸으로 뒤 덮여 있고 막 털갈이를 시작했는지 길이가 들쑥날쑥한 털 사이로 뭉쳐진 흙먼지 덩어리가 매달려 있고 코 사이 턱까지 길게 나 있는 눈물자국에 어딘지 아파 보이는 리트리버를 닮은 개한테 말을 건다. '너 어디에서 왔니? 밥은 먹었어?' 등을 돌리고 사무실에 혼자 앉아 계시는 팀장님께 "저 개는 언제 들어온 개래요?" 인사말을 건넨다.
금요일 오전 나절은 각 부서에서 취합 받는 보고서류를 제때 맞춰 보내줘야 하기 때문에 조금은 부산을 떨어야 한다. 그래도 내 타고난 근성은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장점으로 발현되어서 목요일 오후가 되면 미리 작성해야 될 내용을 메모형식으로 해 두기 때문에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준비한 대로 쓰면 별 문제가 없다. 마음이 급해진다. 개한테 먹을 물이라도 좀 떠다 주고 싶은데 계속 전화가 오고 외부인들이 찾아든다. 벌써 10시를 훌쩍 넘기고 그제 서야 개한테 나가볼 짬이 났다.
청사 준공식 때 들어 온 대형 화분에 물을 줄 요량으로 사뒀던 빨강 색 자루바가지에 물을 받아서 나가는데 그 개는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의 아래턱부터 꼬리 끝까지 완전히 밀착시켜 엎드려서는 몸집 크기에 비해 조금은 비정상적으로 작은 눈동자의 흰자위가 보이게 굴리며 나를 쳐다본다. 색맹에 가까운 색약을 타고난 개한테 빨간색이 그래도 자극이 되었던 것일까. 순식간에 벌떡 일어나서는 꼬리까지 흔들면서 내게 친근함을 표시한다. 분홍빛의 길 다란 혀로 수차례 물을 삼키는 가 했더니 이번에는 머리는 빼고 어깨부터 배를 깔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나도 키를 낮춰 쪼그리고 앉아서 개와 눈을 맞추고서 '기운이 없냐, 배는 안 고프냐, 파출소에는 컵라면 밖에는 없는데 그건 너한테 줄만한 게 못된다. 그리고 쇠 목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주인이 있어 보이는데 어쩌다 집을 잃어버린 것이냐.' 하고 계속 개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한다. 북풍에 밀려난 미세먼지가 걷힌 하늘이 마치 수채화 그림 같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떠 있는 구름도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으며 둥글게 잘 말린 솜사탕 모양들이다. 저 멀리 올라가고 있는 아파트 건축현장에 보이는 크레인 끝자락에 걸린 구름 두 개가 손에 잡힐 듯 말듯 보이는 속도로 흘러가는 것이 마치 장난하는 어린애 유희를 보는 듯하다. 다시 개를 바라보니 어릴 적 항상 집 앞에 네 다리를 곧게 펴고 서서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내게 셀 수도 없을 만큼의 꼬리를 흔들면서 낮은 목소리로 '멍멍' 인사하던 누렁이 덕구 얼굴이 스쳤다. 10여분쯤 그렇게 개와 마주 앉아서 있다가 일어서는데 파출소 주차장으로 덮개를 씌운 봉고차 한대가 들어온다. 속으로 '꽃 배달 하는 차 같은데....'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서는 아저씨께서 "김현이씨가 계신가요?" 나는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호명 받았을 때 느꼈던 긴장감으로 반 쯤 일어서서 "전데요?" 대답한다. 멍석으로나 짤법한 직물로 얽키설키 엮인 타워형 배 모양의 바구니에 여러 가지 색깔의 장미꽃과 카네이션과 이름 모르는 갖가지 꽃들이 빽빽하게 들어 앉아 있는 꽃송이들 사이를 눈으로 헤치며 가지런히 묶인 테이프 리본을 찾아낸다.
"축! 생 일 - 대전경찰청 서우회 선배 일동"
서우회! - 이 한 단어에 일순간 모든 시간은 정지되고 내가 경찰교육생이던 2005년 시절로, 준공식 때 지방청장님의 증품이던 전자 시계판의 모든 숫자들이 마치 영화 속 특수효과의 한 장면처럼 빠른 속도로 온 몸을 뒤집기를 수십 번 수백 번을 하고 나서는 나를 그 때로 데려다 놓은 듯 했다. 교육생이던 김현이 - 당시 충남청 소속의 서대전 지구대로 두 차례 실습을 나간다. 내가 합류했던 팀에는 우연히 같은 대학을 나오신 선배님 두 분이 계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그 분들에게 관심을 받을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어쩌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성품을 가지신 선배님들이 나를 진짜 대단한 후배로 만들어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꽃바구니를 무릎위에 올려놓고 직원들 쏟아 내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만 눌린 무게 몇 배 이상의 집중된 시선 탓에 조금은 정신이 몽롱하다. 역시 주변의 입 속에서 나오는 말도 "대단하시네."다. 그 말뜻은 생일날 큼지막한 꽃바구니를 받는 나를 두고서 하는 말이 아님을 안다. 그렇다. 서우회 선배님들 특히,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선배님은 정말 대단하시다.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이렇게 고급스럽고 화려한 꽃바구니를 받으며 언제 이런 생일 축하를 받아 보나 싶은 마음보단 그분들께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가 싶어서 아무래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어떻게 고마움의 표시를 할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 써보자. 부족하지만 글로 남겨 보자. 그래서 선배님들께 보내드리자.'
2006년 3월 10일 나는 6개월의 교육을 끝내고 정식으로 경찰관이 된다. 경찰관은 특히 그 직업을 논할 때 ‘투신’한다는 단어로 그 입직을 과격하게 표현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직업적인 특성에서 오는 것으로 경찰관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소신 없이 섣불리 경찰관이 되고자 했다가는 도중에 그만둘 수도 있을 정도로 힘든 일이 많으며 남다른 사명감과 투철한 직업의식을 바탕으로 보통은 30여 년간을 보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경찰관은 단순 직업을 말하는 job가 아니라 천직을 말하는 calling라고 해야 옳다고 단언한다. 2005년 가을, 경찰학교 졸업의 막바지 과정으로 현장 실습을 나오게 되는데 지금 대전청(충남청 일부의 전신) 산하 중부서에 속한 서대전지구대로 배정이 되었고 낯선 그곳에서 1, 2차로 나눠 약 6주간의 실습기간을 보내게 된다. 서우회란 서대전지구대에 함께 근무한 직원들 간의 작은 모임을 말하는 것으로 나는 선배님들의 배려로 자동 서우회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시작 전에 고백하건대, 제목을 '서우회의 추억'이라고 故 신영복 교수님의 '청구회의 추억'에서 본 따 왔음을 말이다.
변명을 해 보자면 이렇다. 20대 초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신영복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대출해 갈 생각도 없이 높다란 책장들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서 온 종일 식음을 전폐하고 읽었던, 대단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으로 수년간을 지나다가 몇 해 전 아이들과의 그런 만남을 [청구회의 추억]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이 되었을 때 작은 골방에서 한 글자도 놓칠세라 누구에게 들킬까 조심스런 심정으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정확히 내가 태어나기 10년 전 1969년 육군교도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 중이던 때 화장실 뒤처리 종이에 절박하게 기록해 두었던 것을 그 부분만을 따로 출간하게 됐던 것인데 나는 어쩌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이야기를 보고 감정 이입을 일으켜 눈물을 흘리는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에 욕심을 내어 본 것이다. 누군가 [서우회의 추억]을 읽고서 나처럼 감정이 이입되어 눈물 찡하고 따뜻한 우정을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해서다. 그리고 그 정도의 이유라면 아마도 하늘에 계신 교수님께서도 당신의 열혈 팬인 나를 여유롭게 눈감아 주시리라..
충북 충주에 있는 중앙경찰학교는 강원도와 인접하는 지역에 있기도 하지만 적보산자락에 있어서 4계절이 유난히 뚜렷하게 구분되는 곳이기도 하다. 대신 겨울이 유난히 길다 싶을 정도로 겨울 내내 많은 눈이 내리고 한 번 쌓인 눈은 겨울이 다 가도록 녹지 않을 추위가 지속된다. 3월 초순- 졸업식이 있던 날도 치마 정복의 옷차림 탓인지 몹시 추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흔한 일은 아니리라. 지금까지 300회에 가까운 졸업생을 배출했어도 실습 나갔던 곳의 선배님들이 후배의 졸업식을 축하하기 위해서 직접 졸업식장까지 꽃다발을 사들고 2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한 걸음에 달려왔던 경우가 과연 열 번이나 될까. 한 번은 실습을 끝내고 다시 평소의 교육 생활 중 군대식 내무반을 쓰던 생활실 동기들의 부러움을 한 번에 받게 해 주신적도 있다. [빨강머리 앤]의 집, 그린게이블즈와 꼭 같은 모양의 상자에 열 가지도 넘는 사탕과 초콜렛을 한 가득 담아서 택배로 보내주셨던 것이다. 그 날 밤 우리 생활실의 16명의 동기들은 각자의 모포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탕과 초콜릿을 녹이고 깨물고 했는지 모른다.
나는 선배님들의 소망과는 반대로 대전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경찰서로 발령을 받게 된다. 발령 받고 한 달쯤 됐을까. 서우회 회원들은 회장님의 제안을 한 분도 어김없이 나, 초짜 김현이 순경을 응원해 주시려고 1박 2일간의 야유회를 오셨다. 그날 밤 우리들은 방 두개를 잡아 놓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당시 유일한 여성 멤버였던 나를 배려하시며 택시를 불러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갈 수 있도록 해 주셨고 사실 나는 멀리까지 내려와 주신 회원 분들께 죄송하고 고마움에 몸둘바를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서너 달의 시간이 흘렀고 졸업식까지 와 주셨던 선배님 두 분은 당시 서천의 홍원항에서 전어 축제가 한창이던 여름 날, 경찰서 앞까지 나를 데리러 오신다. 우리 셋은 같은 차를 타고 한 시간 거리에 있던 홍원항에 가서 집 나간 며느리도 들어오게 한다는 전어로 만든 갖가지 음식이 차려진 둥그런 플라스틱 테이블에 둘러앉아 불어오는 비릿한 해풍을 맡으며 갈매기 나는 마치 바닷물을 비추는 듯 한 거울 같은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었다. 나는 A4 크기의 1/4 정도하는 면적의 종이 박스에 담겨 있던 와인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내가 그 박스를 버리지 못하고 뚜껑을 받침으로 해서 머리핀 보관용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그 때 선배님이 들고 오신 와인이 그 흔한 유럽에서 나는 와인이 아니라 안데스 산자락에서 온 칠레산임을, 박스의 색이 검정색임을 기억이나 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지금에 와서야 실토하는 건, 내가 태어나서 딱 한번 생선회를 먹었다면 아마 그 날의 전어회일 것이다. 나는 사실 생선회를 먹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익지 않은 고기류의 음식은 아예 먹지를 않는다. 그 날의 나의 감정을 지배했던 것은 전혀 맛보지 않던 음식까지도 기꺼이 웃는 얼굴로 삼킬 수 있었음을 그것이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비번을 마다않고 아무것도 아닌 후배한테 오실 수 있는 그런 여유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행위라고 여겼고 설령 내가 먹지 못하는 음식의 메뉴 따위는 거부할 여지가 없는 하찮은 꺼리밖에는 되지 않았던 것임을.
그 후에도 선배님은 내게 책 한 권씩을 소포를 보내오셨다. 그 책속에는 항상 10제곱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메모지에 직접 쓰신 종이가 끼어 있었고 나는 내가 그 소포를 받은 날 우체국 소포담당자에게 메모지를 한 장 빌려 난간에 살짝 몸을 기대고 서 있는 선배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 메모지 맨 밑에 받은 시간까지 적어 두고 책갈피의 용도로 썼다. 그것도 어느 정도 틀린 상상이 아니었다는 것은 메모지의 뒷면에 눌린 글씨 자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꾹꾹 눌러 쓰인 글씨가 아니라 지지대의 힘이 약해서 손목에 힘을 빼고 다소 부드럽게 써진 글씨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그런 소포를 받는 나를 보고 혹시 소포를 보내는 사람이 애인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보내 주신 책들은 대부분 선한 사람들만 볼 법한 것들이었고 읽는 도중에 나쁜 생각이 들지 않고 도저히 나쁜 생각을 할 수 없게끔 하는 내용들과 지나침이 없었던 선배님의 메모지 속의 편안한 글씨체 속에서 충분히 따뜻한 인품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파출소에 묶여 있던 그 개가 이 역시 선배님이 보내셨던 [말리와 나]에 나왔던 그 리트리버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그래, 네가 괜히 우리 파출소로 온 게 아니었구나, 내 생일인 줄 알고서 그리고 내가 뜻밖의 선물을 받을 줄 알고서 이렇게 기억을 상기시켜 주려고 찾아온 개로구나.' 다소 억지스럽고 과장된 추리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꽉 찬 30대의 마지막을 보내는 생일날에만 있을 법한 그 만큼의 특별한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오로지 내 합리화라고 하기 엔 무리가 없고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선배님한테서 받았던 특별한 선물은 단연 노트북이다. 노트북의 금전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한테 선물의 의미란 결코 계산적으로 평가될 수 없는 것임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선배님은 당신이 쓰시던 다소 시대에 떨어진 듯 한 노트북을 주셨다. 이유는 그랬다. 나에게 그 노트북을 줌으로써 작문의 습작을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을 주는 것이라는 그 자체를 선물해 주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교육기간을 마칠 무렵,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본이 없던 영문문고 - [Always wear clean underwear]를 서툰 영어실력으로 번역을 하고 직접 포켓북 사이즈의 책으로 만들어서 선물로 드렸던 것이 선배님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내게는 컴퓨터가 없었고 그 작업의 대부분을 대학교의 공용 컴퓨터실과 공공도서관의 컴퓨터를 사용해서 했었고 그마저도 어려울 때는 PC방까지 가서 번역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 노트북은 내가 돌아다니며 길거리에 시간을 버리는 일을 없도록 도움을 주었고 가장 크게는 나만의 작은 공간에서 오로지 그 세계에 몰입할 수 있던 집중력을 선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7년, 내가 경찰학교를 졸업한 이후 벌써 11년이 지났다. 그 사이 서우회는 계속 이어져 왔지만 나는 서우회의 모임에서 완전히 배제 되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김없이 들어오는 모임 공지 문자에 답장 한 번 보낸 적도, 한 번도 월례 모임에 나가지도 못했고 그 10년 동안 세 아들의 출산과 양육과 휴직을 반복해 가면서 내 자신을 챙길만한 여유도 가져보지 못했었기에 시간이 이렇게나 훌쩍 흘렀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낮에 경찰서로 출장을 나오면서 1층 로비에 들어 선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의자 두 개를 차지하고서 들었던 가방을 내려 놓고 마실 커피를 주문하려고 계산대 앞에 서 있다. 몇 달 전에 바뀐 카페 점원은 전에 있던 직원과 전혀 딴판이다. 외모에서 풍겨지는 인상은 훨씬 더 호감이 가게 생겼으나 말투에서 부터 손님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 등 외모를 뺀 나머지가 전 직원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어느 땐 한마디 해주고 싶을 정도로 매너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왜 저런 사람을 채용해서 저 자리에서 부리고 있는지 경무과장님께 '혹시 쟤가 밧줄을 타고 들어왔나요?' 여쭙고 싶을 정도다. 1분도 안 되어 나온 차를 들고 가방옆 자리에 앉았다. 정복 입은 경찰관, 사복 입은 경찰관, 경찰관이 아닌 사복 입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벌써 다 식어버린 커피를 잔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 완전히 들이켜고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10여 분간의 쉼 사이 나는 10년이라는 시간을 마치 시험 보기 전 요약 노트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처럼 이런 저런 기억들을 떠올렸다.
나는 10년간을 매일 매일 달리고 있었다. 그 매일 매일의 하루는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결국의 종착점인 잠드는 시간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것이 오로지 그 사이의 깨어 있는 시간의 유일한 목적인 사람같이 살았다. 정오가 지나가고 해가 지고 어둠이 오면 이제 거의 내 종착점까지 왔다는 생각에 고무되어 조금만 더 달리면 된다 싶은 생각에 더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이것이 내 일상의 반복이고 이런 매일 매일이 1년이 되었고 결국은 10년이라는 시간까지 끌고 와서 30대 절반의 후반을 가득 채웠던 반복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어느 지점의 순간에서 결코 타고 올라가 뛰어넘을 수 없는 내 키를 훌쩍 넘어버리는 밋밋한 담벼락에 부딪히고 말았다. 고개만 쳐들고 담벼락을 보면 하늘과 맞닿은 담벼락의 꼭대기 실루엣만 희미하게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등을 돌려 고개를 숙이고 넘을 수 없는 벽에 기대어 주저 앉아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을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온 이 길이 거의 만점에 가까운 방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벽의 존재는 그동안의 방식과 행동이 정령 여기까지만 맞는 것이고 이제부터는 다른 식으로의 길을 찾아봐야만 한다는 무언의 경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잠드는 지점이 아득하게 멀리 있는 곳에 있을 때도 그것을 단축시켰다는 만족을 하면서 한 지점, 한 지점을 지나칠 수 있을까, 나는 불혹을 코앞에 둔 이 시점에서 그동안 걷고 있다고 뛰기도 했다고 자신해 왔지만 그 매일 매일을 제자리걸음만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 였던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심한 두통에 괴로웠다. 로비 현관에서 내게 거수경례를 하는 의경을 뒤로 하는데 어쩐지 내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낀다. 그것은 안도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항상 바쁘게 재촉하던 걸음을 멈추고 오랜만에 주위를 천천히 구경할 수 있는 여유마저 생겼다.
거의 1년 째 직산사거리는 지하 차도를 뚫는다는 입체화 사업을 명목으로 1번 국도를 오가는 사람들을 조급하게 만든다. 시간대를 상관없이 불을 켜지 않아도 되는 낮 시간동안에는 항상 차가 막힌다. 오늘 따라 그 사실이 반갑다.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아 좀 전까지만 해도 있던 두통이 말끔히 사라진 듯하다. 시간을 아무리 달려도 변하지 않는 것, 계절을 돌고 돌아도 변치 않는 사실 - 아마도 그것을 서우회 회원 분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았으며 그것이 그 분들만의 특별한 우정이고 암묵적으로 합의된 연대 의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단, 내 기억력이 여기까지 만은 아님을, 어떤 회식 날 지방청 앞 5거리 도로변에 있던 어느 고층 건물 7층의 라이브카페에서 등 떠밀려 얼떨결에 불렀던 보보의 '늦은 후회'가 사실은 전 부터 내 애창곡이 아니라 그 날 이후부터 내 18번이 됐음을, 5월은 이제 그 소임을 끝내면서 6월에게 더 짙은 푸르름을 당부하는 것과 같이, 서른과 마흔 살의 경계에서 언제 어디서든 나 자신은 그대로 나 일수 있음을 흔들리지 않는 본연의 나로 변함이 없음을 서우회는 언제나 마음속에 살아 있을 것임을 그래서 마냥 섭섭해만은 하지 않아도 됨으로 답례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