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 - , 고장 난 시계라도 내가 맞춰 놓기에 따라 하루에 두 번은 정확하게 맞는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이 거리는 정오와도 같이 골목의 그림자 외엔 어둠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자정에도 대낮의 정오가 공존하듯 정반합이란 마음먹고 둘러본다면 우리가 숨 쉬는 공간 어느 곳에서라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얼마나 역설적이던가. 전형적인 현모양처에게는 불성실한 남편이 존재하며 반대로 성실한 남편에게는 조금은 타락한 그의 아내가 있음으로 해서 정과 반의 현상이 같은 공간에서 합으로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단, 누구 쪽의 입장에 서서 보느냐에 따라 그 정과 반의 입장이 달리 보인다는 것 뿐. 역지사지(易地思之) - 사실 이 사자성의 본래 의미는 그 놈의 행동들을 역으로 이용해서 나도 함께 지랄을 떨어줘야 사람들은 그 게 지 자신 일인 줄 알아먹는다는 뜻으로 풀어줘야 보다 현대적이며 세련된 느낌까지 들면서 뭔가 있어 보이는 마치 '신조어' 와도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오른쪽 재킷 칼라에 ‘쥐-드레곤’이라는 명찰을 달고 희번덕거리는 반짝이가 붙은 옷을 걸친 채 아래턱과 양쪽 볼 언저리에 여드름을 짜낸 흉터가 있은 것으로 보아 스무 살이 갓 넘었을 법한 앳된 얼굴로 평균 이하의 키를 가진 자그마한 남자 녀석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건들거리는 태도로 인사를 하며 따라 붙는다. 저 놈이 나한테도 호객행위를 할까? 이렇게 화장끼도 숫기도 없는 차림의 나에게도 과연 접근할 수 있을까?
“저 누나! 여기 물 좋아요. 에이~ 한 번 들어가 보라니깐. 어서요~”
저 놈이 하고 있는 행동은 분명히 경범죄 처벌법 제1조로 두고 있는 [호객행위]로써 내가 112로 신고만 한다면 저 놈을 고용한 사장 놈의 오늘 장사를 허탕으로 할 수 있거나 저 어린놈의 일당을 수포로 돌릴 수도 있을 만한 권한이 있다. 나보고 누나라고 부른다. 누나라고 불러서 나를 불러 세운다. 도대체 물이 좋다는 게 무슨 뜻일까? 순간, 강한 호기심에 이끌려 내 제육감이 자극을 받은 듯 맥박이 빨라지고 지나치게 낮은 내 혈압을 정상인의 수치까지 끌어올려 놓은 듯 현기증이 사라진다.
나는 남동생이 없다. 이제까지 나이 먹도록 남자들이 없는 집단 속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유난히 독창적인 수줍음과 무관심한 성격으로 인하여 수컷들과의 무리에서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누나’라도 불릴 만한 기회나 사건이 내게는 흔치 않았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저 놈이, 그것도 가슴에 연예인 비슷한 명찰까지 찬 어린 남자가 나를 누나라고 불러 세운다. 이것은 누가 봐도 그 놈의 온도 없는 밍밍한 낚시질에 불과하지만 ‘누나’라고 불러준 것에 대한 친근함과 뜻 모를 고마움까지 느끼며 왠지 내가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기라도 한다면 무례한 행동을 저질러 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내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한다. 지금 이 순간 크리스마스트리로나 장식해도 좋을 법한 형형색색의 꼬마전구로 치장된 저 좁은 문을 당당히 밀고 들어가서 좋은 물 구경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나는 마흔을 코앞에 둔 아줌마, 여성적인 섹시함이라고는 아이 셋을 출산함을 끝으로 8년째 아이 오줌똥 기저귀에 함께 싸서 내다 버린 지 오래되어서 진한 화장과 야한 옷차림도 소박함과 순진함으로 승화시켜 버리고 마는, 코미디 프로의 소재꺼리 정도의 수준까지 끌어내릴 수 있는 남다른 편안함을 주무를 수 있는 능력의 마흔 살 아줌마다. 그렇다고 나의 몸매가 입으면 옷 모양대로 그대로 드러나는 100% 폴리에스테르의 통짜 옷만이 가능한 그런 수준은 아닐지라도 이미 외모에서 풍겨지는 인상에서 나는 ‘놀 줄 아는 여자가 아니다.’는 이미지가 낙인찍혀 있다. 40년 동안 살면서 성인기로 그 시절의 절반을 채웠음에도 그 흔한(?) 나이트클럽에 가 본적이 없는 보기 드문 촌뜨기 아줌마다. 그런 내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어울리지도 않는 어색한 옷차림을 하고서 여기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일까. 편의점을 끼고 도는 모퉁이 그늘 속에서 엉덩이가 겨우 덮이는 길이의 치마를 입고 10 센티미터가 넘는 구두 굽 높이 탓에 균형을 잃어 몸의 절반이상을 벽에 의지한 채로 우웩거리며 오바이트를 하고 있는 젊은 여자가 보인다. 이미 거리상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치 그 토사물이 내 종아리 언저리에 튀어 버린 듯 그 역겨운 냄새와 형체가 오버랩 되면서 나마저 이 거리에 구역질이 나온다. 역겨운 시궁창 냄새도 그것에 비하면 양반이다.
오늘도 점심을 걸렀다. 아이 아픈데 병원 데리고 갈 시간이 없어서 상사 눈치 살피다가 점심시간에 병원을 데리고 다녔다. 그러던 시간들이 한번, 두 번씩 계속 쌓이면서 동료들과의 함께하는 점심의 횟수는 줄어가고 ‘김 반장은 오늘도 아이 병원 데리고 가느라......’ 가 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게 되면서 이젠 아예 내가 빠진 점심시간이 참석하는 시간보다 자연스럽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거르거나 아예 혼자서 샌드위치로, 햄버거로 때우는 식의 점심이 더 편하게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면서 나는 워킹맘으로서 또 한 번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내가 쌓은 벽에서 탈출하려고 다른 쪽에서는 맘에도 없는 더 많은 노력으로 다른 쪽의 벽을 허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며칠째 아이가 먹은 대로 토하고 설사를 해대는 통에 한동안 뜸했던 병원 출입을 다시 하고 있다. 일하는 엄마가 가장 힘들 때가 아픈 아이를 떼어 내고 출근을 해서 내 아이의 병이 자라면서 으레 누구나가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크는 것이라고 먼저 너스레를 떨면서 아이로 인해 비워지는 시간과 공간이 업무에 방해되는 요소가 전혀 아님을 아이가 아픈 것은 사소한 것이며 직장에서는 오로지 일에만 열중할 수 있는 동등한 직장인임을 알리기에 열변에 가까운 지나친 역설을 토해낸다. 고작 10킬로그램 정도 밖에 나가지 않는 아이 몸무게가 단 며칠사이 1킬로그램이나 빠질 정도로 먹은 대로 토하고 설사하고 그렇게 밝고 활발하던 아이가 차분하고 얌전한 아이로 변해버린 것을 지켜보는 엄마로서 아이에 대한 신경을 의식적으로 닫은 채 사무실 문을 무의식적으로 닫고 책상에 앉아 있는 동안 얼마나 일에 열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닌 척 웃는 얼굴로 남자 놈들의 얼굴과 이야기 하고 있자니 내 이중적인 위선에 염증이 난다. 화장실 세면대 거울 앞에서 수도꼭지를 틀어 놓고 손을 닦다가 대칭형으로 비춰진 거울 속의 뒤틀려 버린 내 또 다른 허상인 가짜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제야 아이에게 조금의 속죄를 한 듯 한 기분이 든다.
그날 밤, 결국에 나는 그 클럽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게 결정내림으로 인하여 나는 우리나라에 몇 안 될 법한 여태 한번 나이트클럽에도 못 가본 순진무구함과 거리가 아주 멀어진 마흔 살의 아줌마로서 순진한 척 하려는 20대 초반의 아가씨를 따라하려다가 창피만 당한 꼴이 된 기분이다. 그건 마치 몸에 맞지도 않는 스판끼 전혀 없는 100% 천연 섬유로 된 원피스에 억지로 몸을 끼워 입으려다 옆구리 솔기가 뜯어져 버린 지도 모르고 거리를 으스대며 활보한 것과 같으며, 엉덩이까지 올 나간 스타킹을 신은 채 자신이 조롱거리가 된 줄도 모르고 공식 포럼에서 학술 발표를 마친 젠 체하는 젊잖고 품위 있는 정장차림의 여류 사화학 박사의 뒤태를 보는 것과도 같으며, 남색 슈트를 잘 차려입은 신사가 바지 앞지퍼를 잠그지 않아서 걸음을 걸을 때마다 그 구멍 사이로 누런 빛 사각팬티가 보일락 말락 하는 것과 도 같으며, 발에 맞지도 않는 신데렐라 구두를 억지도 신어 보겠다고 만인 앞에서 호언장담하며 유리 구두에 비집고 나오는 퉁퉁한 발등의 살을 억지로 틀어 쑤셔 넣다가 결국엔 유리 구두에 난 금 때문에 발뒤꿈치를 베이고 피를 본 경우와 같이 아픔을 웃음으로 무마해보려는 부끄러운 상황이다.
남편은 다섯 시간 동안 클럽이 마치는 시간 때까지 마치 고삐 풀린 말처럼 쉬지 않고 춤만 춘다는 H아저씨와 같이 나이트클럽에 동행해 주었다고 했다. 본인은 줄 곧 테이블에 앉아서 구경만 한다고 변명한다. 나는 클럽 내부를 모른다. TV 드라마에서 한 번씩 등장하는 장면으로 구경한 것이 전부다. 그래서 테이블에 앉아서 구경만 한다는 남편을 상상할 수가 없다. 구경한다는 것이 무대에서 미친 듯이 춤만 춘다는 동행한 아저씨를 두고서 하는 말은 아님을 잘 알고 있지만 도대체 춤추는 그 곳에서 구경할 수 있는 게 어떤 것들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남편을 이해하기 위하여 나이트클럽 문 앞에서 서성이는 나를 상상해 보았고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매번 동생들 먼저 챙기느라 성장기 때 제대로 먹지 못해서 제 키로 다 못 자란 소년 가장의 손님 삐끼행위를 그려보았고 억지로 참고 마흔 살 먹은 나를 두고 ‘누나’라고 부르며 구역질을 느꼈을 법한 그 희번덕거리는 재킷의 어린 남자애를 상상해 봤지만 결국엔 내 남편도 그 어린 남자애의 심정도 이해할 수가 없다. 오히려 화려한 조명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대한민국 전형적인 아줌마의 내 모습만 확인한 꼴이 되어서 상실감만이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든다. 처음부터 나의 지나친 무지함에서 오는 편견으로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책마저 든다. 젊은 시절, 한창 때를 제대로 놀아보지 못한 데서 오는 후회, 나이에 맞춰 즐기지 못하고 때를 놓쳐버린 내 인생을 즐길 의무에 대한 나태함으로 인하여 구속된 책임감, 이 모든 게 결국은 내 탓으로 내 잘못으로 귀결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의 그런 행동을 두고 내가 ‘미쳤어.’라고 말한 것에 그가 짜증을 부린 것일까.
처녀 적부터 유난한 빈혈을 타고 났다. 저혈압 환자임을 표시라도 하 듯 누런 낯빛이 도는 회백의 창백함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고 제대로 화장 한 번 해보지 않던 내 20대의 시절의 민낯은 어딘가 아파보이는 환자처럼 눈가엔 늘 그늘이 져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그 흔한 4대4 미팅, 한명의 주선자로 만나게 되는 일대일 소개팅을 해 본 기억이 없다. 그 흔한 남자친구를 사겨본 적도 없다. 솔직히 나를 만나보자고 설레발치던 놈들이 한 둘 있긴 했었지만 군대 갔다가 복학한 놈들을 다시 교정에서 봤을 땐 모두 한참 어려 보이는 외모의 땅딸막한 여자애의 옆구리에 팔을 휘감고 다니며 촌스러워 보이는 연인관계를 연출하고 있었다.
‘내가 저런 쉬운 놈들의 대시를 그 때 우습게보길 잘했지.’
생각하며 여전히 화장끼 없는 고등학생 차림의 내 모습에 근거 없는 만족감으로 내 식대로의 멋대로인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며 또 다른 나만의 세계에 빠진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3학년 대학교 축제 날, 내가 좋아하던 박기영이 초대가수로 왔던 날 밤, 나와 유일하게 어울리던 단짝 친구와 공연을 보고서 앰프소리가 잠잠해질 자정이 넘어선 무렵 가로등 불 빛 아래 만개하던 수천 송이의 벚꽃나무 조명 밑 벤취에 앉아서 고등학생 때부터 만났다는 지금은 군대에 간 그 친구의 남자친구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는 소개팅도 많이 했고 미팅도 누구보다 잘 나갔던 애다. 그렇게나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고 그럼에도 그렇게 흔해빠진 여자애처럼 행동했다는 것에 이해할 수 없는 의문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흔히 요즘 아이라면 그렇게 지내는 것인가.’
친구는 감정에 사로잡혔는지 둘은 갈 데까지 간 깊은 관계이며 몇 살 많은 남자친구가 제대하면 곧 결혼하자고까지 했다는 속사정도 이야기했다. 당시 내 나이 스물두 살, 지나치게 뿌리깊이 자리 잡고 있던 내 고집, 내 첫 정, 내 첫 사랑은 내가 결혼하게 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처음으로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고리타분하게 지배하던 그 고정 관념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내게 충격으로 다가온 고백들이었다. 축제가 끝나고 과에서는 몇몇의 새로운 커플들이 나타났다. 그 커플들 중 가장 놀라움을 주었던 사람은 축제기간동안 과에서 운영하던 주점에서 이벤트로 내걸었던 게임에서 한 살 차이나는 사람과 즉석에서 병맥주를 스트레이트로 러브 샷 하고 30분 동안 키스를 하는 사람에게 그날 술을 무조건 공짜로 제공한다는 조건에서 100% 만족이 되어 한 살 어린 후배와 그 날 밤 이후부터 커플이 됐다는 내 같은 학번 여자애였다. 내 기억력이 맞는다면 우리 과의 동기들과 후배들을 다 합친 200여명의 사람들에게 19금 영화와 같은 수많은 연출 장면을 보여주고 믿기 힘들지만 믿어버리고 싶은 무구한 소문을 남겨두고서 한 달 만에 깨져 버렸다. 그런 식의 사랑이 내가 스무 살 초반에 보았던 대부분의 사랑이었다. 오히려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내놓고 마음대로 미팅과 소개팅을 즐겼던 내 단짝의 그 친구가 벚꽃 쏟아지던 5월의 늦은 여름 밤 했던 이야기들, 아직 남아있던 봄밤의 한기 탓에 작은 두 어깨 아련하게 떨리던 그날 밤, 내 마음까지도 아스라이 떨리게 했던 그 고백들, 어쩌면 그 친구가 진정으로 스무 살 청춘의 순정을 다 바친 사랑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그 흔하던 만남과 헤어짐으로 울고 웃던 친구들을 내 식대로 무시하면서 이다음에 나는 꼭 완벽한 사랑을 할 것을 꿈꿔 왔었다. 결혼 한지 10년이 된 지금 그 때 내가 무시하면서 하등 취급하던 아이들이 지금의 나를 보면서 그 때 그렇게 콧대 높게 굴던 나를 두고서, 사실 하나도 잘 난 것도 없으면서 그렇게 고고한 척 하더니 하면서 혀를 차며 비웃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지고 만다. 영미는 두 번째로 오래 사귄 그 아저씨, 내가 속으로 그렇게 헤어지기를 바랐던 그 아저씨와는 어떻게 됐을까. 지금 결혼은 했을까.......
그렇게 완벽함으로 만들어 냈다고 자부했던 나의 결혼 생활은 남들이 보는 것처럼 평범하고 행복하기만 하며 나는 과연 내가 이뤄 낸 가족에 만족하며 살고 있던 것일까 생각해 본다. 내가 보는 우리 집 다섯 층 아래 살고 있는 나와 비슷한 조건의 아줌마 - 마주치는 얼굴이 항상 대부분을 웃고 있는 아줌마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만족함으로 살고 있을까. 그래서 내가 모르는 어두운 면은 없고 마냥 행복한 그 얼굴 모습대로 둘 사이는 좋기만 한 걸까. 궁금했다. 내 또래의 아줌마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그저 아이들 양육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한 불만 밖에는 힘든 게 없을까.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적어도 누구보다 질긴 참을성을 가장 큰 장점으로 알고 사는 여자다. 위기상황에서도 그 어떤 여자들보다 잘 참아내고 견뎌낼 수 있는 한계치가 거의 최고 수준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에 무너짐을 반복하게 되면서 그 나마 남아있던 장점도 이젠 오히려 질질 끌기만 하는 무딘 감성의 소유자와 같이 단점처럼 변질되어 버렸고 남달리 풋풋했던 스무 살의 내 애정관은 이미 퇴색되어져 버린 낡아빠진 구시대적 발상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마치 막 나온 대학수능시험 성적표를 손에 쥔 수험생과 같다. 불안하게 떨리는 심정- 꼭 그것과 비견될 만하며 그리고 이미 나는 아이를 셋이나 낳은 여자가 아니던가. 귀에 익은 피아노 선율이 거실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나는 혼잣말도 잘 한다.
“저 음악 슬프지 않니?”
분명히 혼잣말을 한 것인데......
“그건 엄마가 아는 노래니까 슬픈 거야.”
아이의 말은 언제나 어른의 해묵은 감정을 일깨워 준다. 저 음악 안에 나만의 우울했던 잔상의 감정이 깃든 시절이 있었기에 내 귀에는 슬프게 들리는 것이다. 마흔 살이 다된 여자라는 사람에게 있는 감수성이라는 것이 아홉 살 밖에 먹지 않은 아이의 즉흥적인 감정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이제까지 그래도 아직은 감정이 메마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내 착각 이었던가 뜻밖의 공허함과 마주치게 된다. 이 낯선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성인이 된 이후부터 마치 남자에 대한 결벽증이 있던 사람처럼 사랑을 지나치게 아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얀 목련꽃은 피어있는 절정의 순간에는 그 순수함의 극치에 몸이 떨릴 정도지만 그 순백의 순결이 쇠할 때는 보기 싫은 더러운 갈색에 오염되고 얼룩져서 흉물로 변해버린다. 난 목련꽃이길 바랬던가. 돌이켜보니 차라리 들길에서 자유롭게 피어나는 민들레꽃처럼 쉽게 떠돌다 몸 닿은 자리 아무 곳에나 뿌리내려서 강인한 생명력이 있는 들꽃으로 피었더라면 떠남조차도 그 홀씨처럼 홀가분하여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조금은 편안하게 해 주었을지 모르리라. 나는 사랑을 지나치게 절약하면서 살아왔다. 그것이 내 발등을 내리 찧고 있으며 빛에서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그림자처럼 그 고통을 감당하기가 벅차서 아예 어둠속으로 갇혀 버리려고 발버둥치는 건지 모르리라.
첫 날 나가는 모임이니 나름대로 삶에 찌들어 버린 듯 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생각이 들어서 다른 날 보다 단정해 보이는 검은 색 정장을 골라 입었다. 이젠 어디를 나가도 민낯으로 다니기엔 내 얼굴은 이미 멜라닌 색소의 과다 침투로 군데군데 얼룩이 져있고 고질병인 저혈압으로 인해 잿빛 얼굴이 인상을 더 어둡게 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썬크림으로 라도 얼굴 준비를 해야 밖을 나다닐 수 있다. 거울 속에 보이는 내 얼굴이 썬크림 탓인지 회반죽같이 더 창백하고 어딘가 아파 보인다. 내가 갖고 있는 가장 짙은 붉은색 립스틱을 입술에 발라본다. 한결 나아진 듯 하다.
키가 나지막한 시골의 초등학교 교문에나 맞을 법한 녹이 슨 절반과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초록색 철문이 반쯤 접혀 있는 정문을 통과해서 오래된 향나무로 둘레가 쳐진 주차장 맨 가장자리 자리에 차를 세운다. 자동차 실내에 장착되어 있는 전자시계를 본다. 10:19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10월 19일! 10년 전 내가 결혼하던 날짜를 시계가 상기시켜 주고 있는 듯 하다. 모임은 30분부터 시작이니 10여 분간의 여유가 남아있다. 순간 쓴 웃음이 난다. 결혼 10년차 되던 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전 남편과 남남이 되던 날도 공교롭게 10월 19일이었다. 무르익은 가을햇살이 지나치게 내리쬐어 시력을 잃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너무나도 환한 대낮의 풍경을, 올려다 보이는 법원의 높다란 첨탑 시계의 날짜가 정확히 바로 그날임을 알려주던 전자식 붉은 색 글자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을 살고 이혼을 했는데 오늘 첫 모임까지 10분이 남았다는 게 왠지 기분 좋게 만 다가오지 않는다. 괜한 숫자 놀음에 놀아날지 말자. 괜한 것에 억지로 인연을 끌어다 맞춰가며 살아오느라 그동안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었단 말인가. 물에 빠졌다 나온 강아지가 제 몸 털 듯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낸다.
오늘 내가 참석하기로 한 모임은 ‘아이모’라는 명칭의 모임이다. ‘아이를 혼자서 키우는 이혼한 사람들 모임’ 정도로 말한다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으리라. 차에서 몸을 내리고 들어갈 건물을 바라본다. 4층 높이의 옛날식 회백색 타일을 붙여 만든, 중앙 현관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정확히 반으로 나뉜 정확한 무게 중심을 갖춘 균형 잡힌 건물, 마치 시골의 종합병원이 연상될 만한 자그마한 건물이다. 204호실! 예상대로 엘리베이터는 없다.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 내려 밟으며 높아지는 고도에 따라 낮아지는 기압 탓에 현기증이 점점 몰려온다. 하는 수 없이 난간을 붙들고 서서 정신을 똑바로 가다듬어 본다. 어림잡아 2층까지 다다르는 밟아야 하는 계단의 개수가 줄어들수록 마치 위기상황에서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비되는 사자에게 쫒기는 한 마리의 영양처럼 심장이 두 근 반 세근 반 방망이질 치면서 평소답지 않게 등허리에 식은땀까지 나는 것 같다.
첫 모임의 일반적인 절차가 그러하듯 주관자의 주도하에 모임의 의도와 방향을 설명 듣고 신입 멤버들의 첫 소개부터 시작이 된다. 행사장에서 쓸법한 푹신한 솜이 들어 있는 좌석과 등받이가 갈색의 가죽재질로 싸여진 접이식 의자를 둥글게 놓고 한 사람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아주 짧은 시간, 눈으로 사람들의 외모를 훑어본다. 나이를 짐작해 보건대 올해 딱 마흔 살이 된 나는 이 모임 연령대의 평균값을 차지할 법한 뒤죽박죽 다양한 높낮이의 나이 때의 사람들 틈 속에 섞여 있고 모임의 전부는 모두다 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이 모임에 가입을 결심한 것도 어쩌면 이것 때문인지 모른다. 비슷한 아픔을 겪고 여건이 비슷한 여자들이라면 마음을 쉽게 열고 공감대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적어도 이혼녀라는 꼬리표를 삐딱한 편견으로 바라보지는 않을 테니 나를 측은하게 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그렇다고 나를 이상하게 오해하지도 않을 그런 진솔한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일말의 기대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 신입회원은 두 명, 나보다 다소 어려보이거나 동갑내기 정도인 듯 한 여자의 소개가 먼저 진행되었다. 여덟 살 딸아이 한명을 키우고 있으며 남편과의 이혼 사유는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남편의 외도 때문이었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결혼을 어린나이에 했던 모양이다. J는 막 서른을 넘긴 나이였고 내가 스무 살 초반 한창 순결에 대해 고집하던 때에 이혼한 전남편을 만나서 세상이 그게 다 인줄 알고 살아왔지만 반복되는 외도로 인한 고통은 아이가 어릴 때만 참아낼 수 있는 사유였다고 하면서 본인을 위해서하기 보다는 점점 생각이 자라면서 눈치를 보게 되는 딸아이의 인생을 위해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충분히 공감이 됐다. 내가 이혼을 결심하게 된 것도 커가는 아이들이 눈치 보는 아이로 자라게 되면서 자존감 낮은 어른으로 크게 될까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대답하는 식으로 소개는 진행되었다. 내 차례다. 나는 최대한의 감정의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하리라 생각한다.
“이혼은 어떻게 하시게 된 거에요?”
내 대답은 간단하다. 남편의 외도 때문도 폭력 행위도 아니라 더 이상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곁에 있어줄 의미가 없어서 이혼했다고 말했다. 이기적인 발언인가? 그러면 아이들에게 아빠의 존재란 무의미하단 말이던가. 나는 거짓말을 한 것과 같은 죄책감이 든다. 사실 진짜 이유는 남편의 무관심 탓 이였다. 아이들과 나에 대한 무관심, 본인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심, 변하길 기다려주고 지켜보았어도 도저히 나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던 마치 몸에 밴 나쁜 습관처럼 굳어져 버린 그의 엉망진창의 생활들 – 내 이혼의 본연의 이유는 바로 가족에 대한 남편의 무관심이었다. 사실 그를 사랑하는지도 사랑하지 않는지 조차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남편의 불성실한 태도에 점점 질려만 가고 있었던 나였고 더 이상을 두고 볼 수 없다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어떻게 되죠?”
나는 사내 아이 셋을 데리고 나왔다. 남편의 무관심이 커질수록 아이들을 전부로 여기게 되는 마음이 내가 의지하는 상대로서 점점 더 그 존재의 의미가 커졌던 것이다.
“열 살, 여덟 살, 다섯 살 이렇게 키우고 있어요. 그리고 올해 딱 마흔 살이 되었습니다.”
“어머나! 아이를 셋씩이나 낳았는데 어쩌면 그렇게 날씬할 수 있어요? 누가 마흔 살이라고 보겠어! Miss라고 해도 믿겠어요. 아내가 이렇게 예쁜데 남편은 어디에 한눈을 팔고 살았대요?”
매 달 정기적인 모임과 일시적 특별 모임 외에 한 달에 대략 두 번 정도의 모임이 있다는 선임자들의 말을 듣고 어색한 첫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등을 돌리고 자동차 후미가 향나무 가시에 찔리며 공격당하듯 움푹 들어가 조수석 쪽 주차선을 반쯤이나 먹은 사선 모양으로 주차된 자동차 쪽으로 걸어갔다. 차를 엉망으로 댄 것으로 보아 나도 낯선 사람들의 새로운 만남에 적잖이 긴장을 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땅 끝 마을인 전라도 해남 땅, 내가 이곳에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고자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뿐 이었다. 내겐 이 곳 말고도 태어난 고향도 있었다. 그 곳으로 갔더라면 분명히 부모의 그늘아래서 적어도 내 세 아이들의 안위 걱정을 지금보다는 조금 덜 하면서 내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허락받은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가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내 늙은 부모에게 이혼한 딸자식의 자식들까지 건사하게 하면서 당신의 자식이 반평생 남은여생을 시골 촌구석에서 촌 여자가 되어가면서 늙어가는 모습은 죽어도 보여드리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이혼한 사실을 여태까지 숨기고 38선 휴전선에서 가장 먼 육지인 이곳 해남으로 내려온 이유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한 번은 바닥까지 고꾸라진 내 마흔의 기점에서 인생의 내리막길의 시작이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 진실 된, 나 자신을 속이는 무엇 하나의 걸림돌 없이 살아나가고 싶었던 욕망이 컸던 이유였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지지와 한 몸에 받던 응원에서 오는 부감감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순전히 내 자신만을 생각했던 진짜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인생의 가장 큰 의미를 주는 세 아이들에게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진정 자율적인 자아를 가진 성인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그런 환경을 부여해 주고 싶었다. 신영복 교수의 친필 현판으로 도서관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송지면의 송지분교를 내 세 아이의 두 번째 학교로 정해준 이유였다.
며칠 전 중앙지 1면 기사 전면을 장식한 [사라져 가는 아이들]이라는 머리기사를 보고 많은 다소 충격적인 사실에 많은 생각을 했었다. 내용은 과거 30년 전과 비교하여 볼 때 수적으로 턱없이 부족하게 된 학생 수를 비교 사진으로 실어 인구가 점차 줄어가는 현 세태에 경각심을 일깨워 주며 곧 1,2년 안에 우리나라도 과거 일본의 선례처럼 인구 절벽에 부딪치게 되면서 각종 사회문제가 양산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와도 같은 기사였다. 펼쳐진 신문을 타블로이드판 사이즈로 접어두고서 잠시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갈수록 문 닫는 학교 수가 많아지는 판에 송도분교는 매년 그 학생 수가 늘어가는 추세라고 알고 있었다. 현 세태의 일반적인 흐름을 거스른 곳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특별함이 있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학년의 특별한 구분이 없이 전 교생이 함께하는 체험 형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학교로서 이미 폐교 위기를 겪었던 이곳을 전남 교육청에서도 특화된 학교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후원을 해오고 있다고 들었고 내 결정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아빠 없는 아이들이라는 손가락질 상처를 가장 적게 받으며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 곳 송지면에서 학교 가장 가까운 곳에 우리 네 식구가 살 수 있는 작은 빌라에서 자리를 잡은 지도 이제 두 달이 넘었다. 오히려 이 동네는 내가 나고 자랐던 고향보다도 몇 배는 시골동네 인 듯 보이지만 누군가 했던 말도 내 결정의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인심은 후해져서 자연스레 여유가 생기며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각박해짐의 압력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생활이 힘들어지게 된다던 같은 회사에 다니던 어떤 선배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직까지는 아이들도 나에게도 특별한 어려움을 줄 만한 장애물이 없다. 그리고 내달 복직도 하고 출근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점차적으로 나아지리라 기대한다. 사실 아직 어린 둘째와 막내는 현실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여기에 한두 달 쯤 놀러온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눈치다. 속 깊은 큰 아이가 정말로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오히려 나를 부빌 언덕으로 여겨야 할 아이에게 내가 더 많은 의지를 하고 믿음을 주면서 전쟁 같던 반년의 시간동안에 정상적인 성숙 과정을 뛰어 넘고 몇 년 치의 성장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해주었다는 것에 갚을 수 없는 미안함이 남아 있었다. 분명히 상처를 받았으리라.
마흔 살을 두고 말할 때 누구를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 위치가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스무 살에 마흔 살 먹은 여자들을 보고서 창피함을 모르는 뻔뻔함의 대명사이며 뽀글거리는 머리와 펑퍼짐한 촌스러운 옷차림에서 김칫국 냄새가 나는 그런 여자쯤으로만 여겼던 것이 이미 착오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흔 살은 서른의 초반에서 바라볼 때는 제발 오지 않기를 바라던 시기였었다. 삼십대가 된 것도 늙어가는 구나 생각에 지배당했었는데 내가 마흔 살이 되다니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가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내 자신이 마흔 살이 되고 보니 여자의 마흔은 그렇게 젊지만은 않을지라도 그렇다고 반드시 늙은 나이에 속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모든 걸 내려놓고 꿈을 포기할 만한 때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마흔 살에 등단했던 소설가 박경리를 보고 이미 충분한 자극을 받지 않았던가. 오히려 서른보다는 한 평생 동안의 인생의 중심에 서서 새로운 꿈을 꿀 수도 있는 ‘환기’의 계기가 되는 시기이며 어느 때 보다 세련되고 우아해 질 수 있는 시점이기도 했다. 스무 살에는 내 경력의 아무것도 없었으며, 삼십대는 그저 그런 꼴찌에서 머무는 이제 막 사회에서 경력을 쌓은 지 얼마 되지 않던 피라미에 불과했던 시기였다. 사십대가 되어야 비로소 내 본연의 꿈이 무엇인지 서른의 10년 간의 망설임 가득한 고민을 이제는 두 팔 걷어 부치고 실천에 옮겨 볼 수도 있는 진취적일 수 있게 됐다는 것은 마치 이제까지의 삶이 직선에 가까운 경로만 왔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부채 살에 가까운 여러 갈래 모양의 가볼만한 길이 나 있음을, 마흔의 10년은 남은 인생 후반 30년의 시작으로 본다면 다가 올 오십대를 위한 가슴 뛰는 플랫폼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혼녀란 실패한 여자의 삶이 아니다. 이혼이라는 하나의 다리를 건너왔을 뿐이고 평범하지 않은 단지 조금은 특별한 선택을 내린 현명하고 분별력 있는 여자일 뿐이며 그리고 나라는 여자는 이혼이라는 것이 결코 내 이상을 펼치며 인생을 꾸려나갈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내 스스로가 증명해 낼 능력이 충분한 여자이다. 남편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나쁜 여자는 아니었다. 단지 우리는 서로에게 맞지 않은 옷을 걸친 사람들처럼 어울리지 못했고 화합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혼하는 사람들 모두는 후크 선장의 애꾸눈보다도 못한 좁은 시야를 갖고 있는 것 뿐이다. 대낮의 밝은 빛이 오히려 사물의 실체를 똑바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시야를 방해하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지 못해서 상대방의 장점을 결점으로 밖에는 볼 수 없었던 눈뜬 병신들, 단지 장님과도 같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와 나도 너무 밝은 빛 아래서는 눈 뜬 병신들이었으니까. 이제는 반쪽 하늘에 그럼처럼 박혀 있을 회색 빛 구름으로 언제나 눈 언저리에 그늘이 져 있을 것이니 다시는 햇볕아래의 눈 뜬 봉사가 되는 바보는 되지 않을 것이리라.
경박한 기계음에 온 몸의 털들이 놀라서 뻗히고 모든 땀구멍들이 열린 듯한 한기에 소름이 끼친다.
'띡띡띡띡띡띡. 띠리리리릭~!'
모두 다 똑같은 높이의 소리 같겠지만 정확히 5음계 안에서 여러 옥타브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리로써 우리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음만 들어도 특정 숫자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의 익숙한 소음이다. 남편이 현관문을 경계로 아이들의 숨과 어둠으로 아늑하게 차 있는 집 안으로 몸을 들여 놓는다.누구나가 입에서 쉽게 내뱉어버릴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나 또한 차마 말하기 어려웠던 '이혼'이라는 두 글자가 어둠속에서 번호키 소음과 함께 흩어져 버렸다. 나는 꿈을 꾸었던 것일까. 분명히 깨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잠이 들었었던 것일까. 마치 권태기를 겪고 있는 연인들이 그 애정을 확인하기 위하거나 오랜시간 함께한 애인의 익숙함에서 오는 무관심에 대한 자극을 주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우리 그만 헤어져'를 한쪽에서 선언해리는 것과 같은 심정이였단 말이던가.
거실에 봐 둔 잠자리를 무시하고 새우등을 하고 있는 내 뒤로 와서 몸을 누인다. 이불속에 갑자기 든 한기에 아이가 잠버릇처럼 몸을 돌려 눕는다. 내 등 뒤에 배를 바짝 붙이고는 오른팔로 아랫배를 살포시 껴안는다. 나는 여태까지 자는 척 한걸 고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밖에 이불 펴놨어. 나가서 편하게 자."
"오랜만에 좀 안고 있자."
그동안 무언가 풀리지 않은 불만 탓이었던지 이해할 수 없는 언찮음 때문이었는지 아랫배를 덮고 있는 남편의 손을 치우며
"얼른 나가서 자. 내일 새벽에 또 나가야 하잖아."
마치 아이들보다도 말 잘 듣는 이 얼마나 '순한 양' 같은가.
"나 잔다. 잘 자."
그 외마디를 뒤로 1초가 지났을까. 드르렁 드르렁 코 고는 소리에 집안의 정적은 이미 저 멀리 창문 밖으로 유배당한 듯 우렁차게 요동친다. 나는 천정을 바라보며 똑바로 눕는다. 깨져버린 정적에 잔득 긴장했던 솜털들이 다시 수그러들고 열려있던 땀구멍들이 닫히며 조용히 숨죽인다. 그러니까 이제 나는 비로소 온갖 부담에서 벗어난 듯 혹은 아픈 추억을 기억 속 저편으로 날려 버린 듯 홀가분한 몸이 되고 지나간 유희를 떠올리며 미소 짓는 사람처럼 흐믓함마저 느끼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