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습기를 머금은 데서 풍겨나는 해묵은 종이 곰팡이 냄새는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기분을 상하게 만들 수 도 있는 종류의 불쾌한 냄새일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기분을 한층 향상시킬 수 있는 그런 반가운 향기로써 다가왔던 날들이 있었다. 다니던 대학교에서 고등학생이나 들 법한 책가방을 메고 약 1시간 정도 걸어가면 낡은 책들이 무질서하게 쌓여있던 헌책방 골목이 있는 곳까지 닿을 수가 있었다. 어릴 적 동네에서 학교까지 왕복 20리길을 걸어서 다녔다고 하면 가끔씩 사람들은 내 외모에서 풍기는 나이를 짐작하고서 도대체 어느 산골동네에서 자랐길래 그 먼 길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느냐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본적이 많이 있다. 날이 춥거나 무척 더운 날을 제외하고는 나는 그렇게 내 걸음으로 지치지 않을 만큼의 거리는 걸어 다니곤 했었다.
“할아버지 또 새로 들어온 책 있어요?”
“응~ 왔다 간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배시시 웃음을 보여드리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찾아야 할 장소로 단 번에 걸어갔다. 그 축축한 종이 곰팡이 냄새는 어느 곳에서도 따라 낼 수 없는 헌 책방만이 전유할 수 있는 유일한 추억의 냄새였다.
출근길, 며칠 전 주문해 놓았던 책 한권을 들고서 500쪽의 가까운 책장을 바람을 일으키며 1 초 만에 넘겨보았다. 주로 누군가의 손을 거쳐 온 책들만을 사서 읽는 내가 그런 [중고책]을 대하는 특유의 방식이다. 일단 몇 해 전 도서정가제 시행으로 부담스러워진 책값에 대한 대응 방책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누군가의 손을 한 번 거쳐 온 책은 일단 책장을 넘기기기 쉬울 뿐만 아니라 정말로 운이 좋다면 내가 갈망하는 초판 인쇄본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하기야 나도 젊은 사람들이 한두 번 내지르는 ‘질렀다’의 표현에 적절한 상황과 같이 초판본의 책을 본래 정가의 몇 배의 값을 치르고 지르기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는 책 속에서 기차 승차권을 얻었다. 광명역에서 동대구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표였다. 숙소의 숙박계처럼 몇 호차의 몇 번 좌석, 출발시각과 도착시각, 그리고 알 수 없는 의미의 NO. 00-000000의 번호표, 이 차표의 주인은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동안 초조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던지 아니라면 생각보다 길어진 대기 시간 탓에 지루함을 표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붉은 색깔의 볼펜으로 구석구석에 복잡한 서명으로 된 낙서들이 있었다. 옆에서 곁눈질로만 보고 있던 남편이,
“언제 날짜 표야? 책속에 있었던 거야?”
10년전 9월 22일 08시 51분 발이었다. 이 책의 오래전 주인은 도착역에서 승차표 반납을 하지 않고 책갈피로 사용했던 것이라고 생각했고 더 이상의 복잡한 상상의 여지가 허락되지 않았던 출근길의 시간은 기차표와 같이 그렇게 과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한 시간이 넘도록 일어설 생각도 없이 내가 정한 구석에서 책을 보았다.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발이 절여 올 때가 돼서야 겨우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앉아서는 그제 서야 본격적으로 나만의 보물찾기를 시작했었다.
“당신을 도서관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저는 00대학 의예과 2학년 000입니다. 당신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저에게 생긴다면 내 생의 가장 큰 행운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00날 00시에 00찻집으로 나와 주십시오.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벌써 20여 년 전에 보았던 편지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정보는 이미 잊은 지 오래되었다. 다만 그 쪽지와도 같은 편지를 쓴 젊은 의대생의 심정은 고스란히 내게 남아 있는 듯 했다. 스물 한 살, 내가 자주 가던 그 헌책방 구석에서 발견한 낡은 책속에 끼워져 있던 그 편지는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에게 전달되었을까. 아니라면 쓰기만 해 놓고 그냥 책속에 끼워 놓았던 것을 잊어버린 것일까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그 당시 내 기분은 마치 내가 그 편지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인 냥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었던 기억이 난다. 그 날 나는 그 책을 가져오지 못했다. 편지는 그 책 사이에 그대로 꽂아서 내가 뽑은 책장 그 자리에 다시 처음대로 꽂아 놓았다. 그냥 그 책을 내 소유로 만든다는 것은 그 날의 젊은 청춘들의 추억을 내 것으로 훔쳐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냥 잠시 어떤 의도도 없이 아주 우연히 엿보게 된 것만으로도 약간의 죄책감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 편지는 책속에서 20년을 훌쩍 넘어버리는 시간동안 추억을 감추어 왔으며, 내가 그것을 본 이후로 또 다른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쳐 버렸으니 이미 반세기나 먼 지난 그 날의 초상이 오늘 아침 동대구행 열차표를 타고 내게로 빛의 속도보다도 더 빠른 시간을 달려 왔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의 시인이 되고자 했던 한스는 끝나가는 무렵 ‘젊은 날에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했고, 지금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나는 그 책을 무려 세 번이나 정독을 했지만 매번 그 문장과 맨 끝 문장에서 꼭 두 번을 울고 말았다. 이렇듯 감정이 상식보다 강하다는 것은 이제 내게는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어려움을 모르며 오로지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그렇게 여기까지 살아온 내게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내가 공유하는 시간과 공간을 잘 활용해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일까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가려는 삶이란 것이 과연 이런 모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가 지금 온통 불만 속에서 허덕이며 불행하게 살아 나가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 또한 나를 완성해 나가는 내 것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어제는 출장을 나갔다가 모처럼 평소에 참 괜찮다고 여기는 내 동무와 아주 잠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중간에 아끼는 후배가 커피 세잔을 가져와 좀처럼 갖지 못하는 한가로운 시간을 나누기도 했다. 나는 진심으로 잘하는 게 없다. 양쪽 옆으로 서 있는 동무와 후배는 이미 170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와 발달된 체격을 갖추고 있어서 어느 면으로 보아도 작고 작은 내 신체 사이즈는 위축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항상 외부의 시선에 부담을 느끼는 제복을 입어야 하는 지역경찰이었고 그 둘은 어엿한 상급부서의 직원들이라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으로 이미 경직되어 있는 분위기속에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이었다. 그런 나에게 그 두 사람은 내가 아들 셋을 둔 엄마같지 않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동무는 심지어 내가 아직 소녀감성같은 감수성이 풍부해서 글도 아주 잘 쓴다고 했다. 그 친구는 내가 쓴 글을 전혀 읽어볼 기회가 없었을 텐데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굳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후배는 나를 보고 항상 여전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들이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칭찬이라고 그렇게 진심으로 생각하고 싶어졌다. 아들 셋을 키우는 엄마는 체격이 남달리 커야하고 말투와 행동이 유난히 씩씩해야 하면서 거친 감성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게 맞는다면 나는 고정관념을 깨는 일부 소수에 속한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희소성이 있는 그런 존재란 말인가. 자족이었다.
만일에 사람들이 자신의 눈높이에서 조금만 고개를 들어 눈 위를 올려다본다면 건물 사이와 나무 사이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하늘빛 창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활짝 날개를 펴고 비행하는 수리의 수려한 비행도 함께. 이미 너와 나, 우리 모두는 이렇게 날씨의 변화로 오는 환경의 차이를 두고 불공편한 일이라고 불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웃어 줄 자세를 갖춘 사람들이다. 우리들이 숨 쉬고 살아나가고 있는 이 공간은 이미 그런 곳이었고, 그런 속에서 언제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과 조건으로 살아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어느 누구는 눈 아래만을 쳐다보았고 또 다른 누구는 눈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그래도 내가 비록 보통사람들 보다 작은 높이를 줄 곧 보면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끔 고개를 높이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들 셋 엄마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고정관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상급부서에서 지역경찰인 우리 몇을 어떤 곳으로 동원시켜 그곳에 나간 적이 있었다. 물론 육체적으로 고된 일은 아니었지만 나름 웃음과 친절을 선사해야하는 종류의 작업이었다. 함께 온 여 후배사이에서 우연히 해외여행이라는 소재가 화제꺼리가 되었고 각자 자신들이 다녔던 인상적인 곳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솔직히 부러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이미 내 주변에도 제 집 안방 드나들 듯 비행기를 타고 세계 여기저기를 다녀 본 사람들이 많아진 요즘에는 별로 신기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선배님, 페테르부르크 다녀오셨어요?”
“응, 나도 일주일, 정말 멋있더라.”
“저도 일주일간 다녀왔는데 운하가 열리고 닫히는 거 보셨어요?”
나는 그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화려한 도시와 운하는 못 보았지만 페테르부르크는 오늘날 정확히 상트페테르부르크이고 과거 러시아를 대표하는 수도였을 뿐만이 아니라 그 도시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속에 아픔을 지닌 2차 대전의 막바지 전투였던 900일간의 전투지이며 송장을 파먹고 연명했던 민간인이 생존했던 곳, 히틀러가 그렇게 정복하고 싶어했던 레닌의 도시 레닌그라드이며 그 나라 내부적으로는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렸던 혁명의 온상지였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때마침 올해는 러시아 혁명의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여서 더 의미있게 다가오기도 했던 나라였다. 그런 대화 속에서 나는 10여 분 동안 꿀 먹은 벙어리로 서 있었다. 같은 장소를 두고서 나와 그들은 똑같은 공간에 서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콜럼버스에게 우엘바는 신대륙발견이라는 미지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넘치던 곳이었다면 내전 당시 타국의 망명길에 올랐던 많은 장군들과 정치인들에게는 상실과 좌절의 시작점이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하늘을 나는 강아지 파지와 친구들>을 보면서 내용 중에 등장하는 세비아의 이발사를 아이에게 맞게 잠깐 이야기 해 준 적이 있었다. 큰 아이에게 스페인은 엄마 때문에 소싸움, 붉은색, 축구 그리고 이발사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 되었다. 나는 아이가 지금보다 두 살쯤 더 먹으면 우엘바 항구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줄 것이다. 비록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의 일부일 뿐이더라도 설령 내게 틀린 면이 있더라도 내게는 그냥 어떤 추상적인 이론과 지식에서 나오는 그런 영민함 보다는 진심으로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과 자세를 심어주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과의 그런 관계를 비난 받거나 지적받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말을 들어보았으리라. 나는 예쁘지 않지만 그래도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들한테는 많은 이야기와 꿈을 보여 줄 수 있다. 며칠 전 내가 쓴 글을 읽고 어떻게 된 거냐며 모두들 걱정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간단히 대답해 주었다. 볼 것이라면 자세히 봐달라고.
내 아이들도 앞으로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러가서 그땐 이미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더라도 엄마를 떠올리게 된다면 이렇게 나처럼 단숨에 시간을 달려서 이 엄마를 만나러 와 주지 않을까. 그때 헌책방 구석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가면서 타인의 추억을 조금씩 조금씩 훔쳐 온 나는 이미 내 아이들에게 그 추억들을 조금씩 나눠줘가면서 면죄부도 함께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