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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생은조연] 제31편. 3월진눈개비,아프락사스

이왕 쪼기 시작한 것 예쁘게 잘 깨어 보자.

by 김현이

3월이 왔다.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가고 오는 것이 시간이고 계절이라고 하지만 나는 정말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3월 초순, 나의 예상대로 어김없이 눈이 왔다. 겨울은 또, 봄은 마치 이별의 순간을 점철하듯 이렇게 한 번 심하게 몸살을 앓고 나야 비로소 서로의 자리를 바꾸는 것일까 싶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버리기를 말하는 사람의 마음은 그 자신이 지금 현재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과 같다. 작년 겨울 나는 마흔에 들어서면서도 나이 들어감에 대한 불편한 마음보다는 그저 하루라도 빨리 시간이 가버렸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나아진 나를 기대했다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았어야 했었다. 3월이 왔고 지난겨울을 생각해 보니 좋아지기는커녕 여전히 부족한 부분의 모습만이 나를 방해하고 괴롭히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저 나는 만족을 모르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단정지어버릴 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3학년이 된 큰 아이, 1학년이 된 둘째를 학교에 내려 주고 회사로 향하는 길, 나지막한 언덕 빼기의 배 밭에 빗물을 머금은 눈이 아주 얇게 내려 앉아 있었다. 시선이 거기로 쏠린 것은 유난히 배 밭에만 눈이 쌓여 있었기도 했지만 그 모습이 아직 한 달이나 더 남았을 배꽃이 미리 피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황량한 늦겨울의 주변 풍경에 무척이나 대비되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겨울 내내 눈바람을 잘 견뎌낸 배나무는 저렇게 연한 초록빛을 내뿜는 흰 꽃망울을 터트릴 것이다. ‘배나무도 나처럼 이 겨울이 빨리 지나가 버리기를 기다렸을 테지.’ 이런 생각이 들자 마치 나 혼자만 그렇게 고뇌하고 힘들게 산다는 잘난 척 했던 내 자신이 무척 부끄러워졌다. 정우도, 선우도, 그리고 가정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낯선 유치원에 들어간 막내 단우도 그들만의 세상을 감당해내기가 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더 힘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꼭 데미안의 아프락삭스와도 같다. 그들만의 공간을 깨고 또 다른 세상으로 향하기 위한 고통을 참고 견뎌야만 했을 것이다. 문득 중학교 시절 한 동무가 생각났다. 우리는 당시 데미안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심각한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다. 운동장 가장자리 단풍나무 아래 좁다란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던 우리가 서로에게 건넨 작은 손 편지에 데미안의 한 구절 - “새는 알을 깨고 태어난다. 알은 세계다. 새로 태어나려는 이는 그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삭스다.” - 을 적어 교환하면서 이런 말을 주고받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왕 쪼기 시작한 것, 예쁘게 잘 깨어 보자.’라고.

단우는 등원한지 3일째 되는 오늘 아침 처음으로 울지 않고 선생님 품으로 갔다. 단우만의 알을 깨고 나온 것이라 여겼다. 사무실까지의 멀지 않은 거리를 오면서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에 휩싸였다. 먼저는 오늘 아침에는 꼭 울지 않고 가겠다고 말했던 약속을 지켜준 아이에게 고마웠고 매번 울고 들어가는 아이를 달래줄 여유도 없이 도망치 듯 등을 돌렸던 것에 정말로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단우가 울면서 등원을 한 것도 내가 그런 단우를 외면했던 것도 꼭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프락삭스의 본질처럼 좋고 나쁨식의 장단점의 공존이라기보다는 밝음과 어둠으로 대변되는 특유의 특성을 포괄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이 꼭 전자는 좋은 것, 후자는 나쁜 것이라고 단편적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처럼 보다 양극적인 것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삶이란 것이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이유, 백 명의 사람이 존재한다면 백가지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 논리에 대한 근거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어제는 정우가 엄마에게 할 말이 있다고 마치 지금까지 숨겨온 고민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말을 시작했다. 나는 약간 걱정이 들 정도로 정우의 말투에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아이의 말은 부반장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반장선거에는 여자 아이들만 나가겠다고 하여 남자애들이 나서는 애들이 없어서 자신도 나가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엄마에게 부반장이어도 괜찮으냐고 했다. 누군가 정우의 단점을 꼭 한 가지라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한다. 정우는 처음 접하는 것,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용기와 칭찬으로 힘을 실어줘야 하는 아이라고 말이다. 사실 이것도 굳이 단점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있는 본성과도 같은 감정이기 때문이다. 정우의 도전에 칭찬을 해 주면서 앞으로는 지금보다 조금은 더 모범적으로 행동을 해야 될 것 이라는 짤막한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정우도 하나의 껍질을 깨고 다른 세상으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아이에게 가장 친밀한 존재인 엄마의 역할은 그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고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일일 것이다. 길을 알려주고 정답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지혜의 샘을 발견할 수 있도록 공유하는 생활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반면, 선우는 항상 미미한 위염과도 같은 존재이다. 평상시에는 별다른 신경 쓰이지 않으면서도 문득 내가 설마 위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 괜한 걱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대상과도 비슷하다. 형과 동생의 중간에서 이도저도 못할 때가 있는 아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생에게 대하 듯 형한테 함부로 하는 아이를 혼내고 또 동생에게 지나치게 형처럼 구는 행동을 선뜻 받아주지 못해 언제나 나무라고 혼내는 것으로 거의 모든 상황을 끝내버리고 만다. 선우는 그렇게 내게 참 아쉽고 안타깝고 미안한 존재이다. 선우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가끔 이런 생각도 든다. 장차 무엇이 되려고 평균이상의 외모를 가진 형과 동생을 기죽이는 수려한 외모로 태어난 것인지 하는. 소위,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한다.’ 하는 그런 상식이 통하는 말이 아니라 선우는 누가 보아도 인정할 정도로 얼마나 잘 생겼는지 모른다. 어쩌면 선우에게는 외모를 이길만한 내면의 세계를 깨고 나오는 것이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의 말머리를 쓸 수 있기 위하여 나는 3월의 눈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진심으로 내가 쓴 글을 읽어보고 싶어서 기다렸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그 분들이 지금 막 타이핑을 끝내려고 하는 이 글을 읽을 순간을 마음속에 잠시 그려 보았다. 그동안 내가 한 눈을 판 것이 금방 들통 날 것을 알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구나 생각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자신이 좋아하고 추구하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몇 겹의 껍질에 둘러싸여진 채 살아가는 우리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그 껍질들을 한 겹 한 겹 벗어내는 것이 삶인 것 같다. 다만, 누군가 껍질을 깨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사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라야 꿈을 간직하며 사는 자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초봄의 석양이 매우 흰 빛에 가깝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보았다. 하물며 언제나 정적인 저 석양마저도 인간이 정해놓은 상식의 전형 – 붉은 빛 – 에 가까워지도록 점점 빛의 겹겹을 벗어나고 버려야한다는 것을.


봄이 움틀 마지막 진통과도 같은 3월의 진눈개비가 왔으니 나도, 아이들도 그리고 그 분들도 겨울을 깨고 나온 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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