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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생은조연]
제 32편. 두 가지 삶

현실속의 삶과 생각속의 삶을 사는 우리들

by 김현이

“엄마 먼저 가! 나 혼자 들어갈 거야!”


새로운 유치원에 오기 시작한지로 오늘이 아홉 번째 날인데 단우는 2층 자신의 교실 앞까지 엄마가 따라오는 것을 처음으로 거부했다. 안아서 데려다 줄까도 물어 보았지만 단우는 내 손에 들린 가방을 어깨에 메더니 작은 발로 젖어있는 아스팔트 바닥을 걸어갔다. 신발 뒤축에 물방울이 튀어올라오는 것이 무심코 시야에 들어왔고 나는 내리는 비를 맞고 그냥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 원의 1층에서 다른 반 선생님이 나오셔서 단우를 2층 교실까지 손을 잡고 안내해 주는 것을 보고 뒤를 따라가 보았다. 아이는 자기 반 딸기교실 앞에서까지 끝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차분히 들어갔고 나는 문 뒤로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단 뒤에서 지켜보았다. 사무실로 오는 그 잠깐 사이에 아이가 울면서 들어갔던 처음의 며칠보다 오히려 마음이 먹먹해져 옴을 느꼈다. 전에 큰 아이 정우를 보면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쩌면 조금씩 아이와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꼭 오늘 아침 단우의 행동에서 어제보다 훌쩍 커버린 아이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말았다. 말로만 잘해준다고 했지 정말로 아이들의 입장을 배려하면서 원하는 것을 들어줬던 게 얼마나 됐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월 중순에 오는 비는 완연한 봄의 전령사이다. 일기예보는 비가 그친 뒤 추위가 찾아온다고도 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누구도 그 추위를 겁내지 않는다. 빗물이 땅에 닿자마자 겨울 내 피어나기를 준비한 씨앗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선 제 각자 화려한 모습을 뽐낼 것이고 내 아이들의 어깨도 조금 더 곧게 펴질 것이다. 비가 거추장스럽기는 해도 지붕이 있는 곳 어디라도 앉아서 바라볼 여유가 있다면 약간이라도 상식에서 벗어나도록 해주는 촉매제이기도 하다. 그저 시선을 먼 곳에 떨어뜨리고 그 어떤 생각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약간의 편안함까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동차 전면 유리에 ‘딱’ 소리나 날 때까지 온몸을 던진 빗방울은 그 충돌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양쪽 가장자리로 등 떠밀려 이내 물줄기로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나는 오늘 아침, 차창에 부딪히는 ‘딱! 딱! 따다닥!’ 경쾌한 빗방울 소리로 정신을 집중했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책을 많이 보면 바보가 된다.’고. 온갖 잡념에 빠져서 중심이 잡힌 사고력이 글자로 좌지우지 될 수 있으며 결국에는 본연의 내 생각의 힘과 주장에 대한 분별력이 상실될 것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러나 진심으로 말하건대, 나는 언제나 책 앞에서는 부족함을 느낀다. 만족감과 충족을 느낀 적이 없기 때문에 온전히 내 시간을 낼 수 있는 현재의 내 생활에 불만이 생기고 불평하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을 그렇게 짜임새 살다보면 너무 피곤하지 않느냐고 충고하는 척 나는 비난하는 사람들도 보았지만 적어도 내가 정한 기준에서는 나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나도 할 일을 뒤로 미루는 게으른 사람이고 매일 밤 숙면하는 것도 아니면서 늦은 밤 깨어 있지 못해 한 글자라도 쓰지 못하는 내 자신을 노력은 하지 않고 막연한 꿈만을 좆는 허황된 시간낭비자라고 자책할 때도 많다. 그것은 지금 밝히게 될 누구의 인생관과도 비슷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현실의 삶과 생각의 삶, 자신이 이렇게 이중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밝힌 19세기 영국의 여류작가 샬롯 브론테의 말이 새삼 떠올랐던 것이다. 나도 현실의 삶과 내 생각속의 삶의 간격이 넓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만일에 어느 누군가 내게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묻는다면 나는 언제나 「제인 에어」라고 답한다. 이 대답은 2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는 대답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시절,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처음 읽은 뒤로 몇 차례 더 보았지만 나이가 달라질 때마다 느낌도 다르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몇 살 때 읽었던 제인 에어가 가장 인상 깊었나요?’라고 물어봐 주기를 부탁하고 싶을 정도다. 물론 내가 누구 앞에서든 혹은 누구 와든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어 볼 기회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상상속의 그림이기는 하지만 작년, 2017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나는 살면서 몇 번 느껴보지 못한 마음속의 불꽃이 뛰는 것을 경험했고 전보다 제인 에어를 더 사랑하게 되었었다.


“생애 최고의 책을 꼽으라면 어떤 책 인가요?”

“샬롯 브론테의 – 제인 에어 – 입니다.”


물론, 노벨상 수상자가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비록 그것이 사소한 일이 될지 몰라도 나와 조금의 공감대가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더욱이 그 사람이 공적으로 인정받아 명분이 있는 사람의 말이라는 것 자체가 기뻤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제인 에어를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 책의 저자인 브론테의 삶이 최근 특별히 더 동정적으로 다가온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처음부터 장황하게 말을 시작했던 것이다. 브론테는 지금 내 나이와 비슷한 서른아홉밖에는 살지 못했다. 당시 유럽 19세기 전반 사회 분위기도 여자가 글을 쓰고 그것을 팔아서 돈을 버는 비즈니스를 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고 그래서 브론테도 원고를 보낼 때 실명을 쓰지 않고 중성적인 이름으로 변경하여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선입견과 차별을 극복하려고 했었다. 어쩌면 제인 에어는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6남매 사이에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남동생과 자매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삶을 살았다.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무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환청으로 들렸기에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그녀가 어쩌면 살아내기 위해서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글을 쓰면서 현실의 삶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흔이 다 되어서야 결혼을 했다. 자신의 이상과 사상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끝없는 구애에 대한 예의로 결혼을 하지만 아홉 달 만에 죽는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죽음의 시작이 자살이 아님에 고마운 생각마저 들었다. 아마도 임신상태에서 심각한 입덧으로 영양실조와 탈수로 인한 합병증이 그녀의 사망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브론테 현실의 삶은 매우 척박하고 위험했지만 생각속의 삶이 그 현실의 삶을 탈출할 수 있도록 해준 해방구와도 같았기에 지금 내가 「제인 에어」와 「빌레트」를 알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두 책 속의 여 주인공은 브론테 자신과 동일시된 인물들은 아니지만 돈과 미모가 없는 여성들을 주도적으로 내세워 전개된다. 브론테도 작고 약하고 환경도 불우했다. 나도 약하며 힘없는 여자일 뿐이다. 이것은 비교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은 주인공들처럼, 그리고 작가처럼 작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거의,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인간이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온갖 감정의 축약된 객체, 미니어처 향수의 집합체와도 같은 것이 인간이며, 그것은 곧 현실의 삶만을 살아가는 고단한 인간이 아니라 생각하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그 존재가치가 더욱 더 빛나게 될 삶을 누리는 것과 같을 것이리라. 200년 전에 태어나서 딱 오늘의 내 나이만큼만 살다가 떠나간 브론테는 이제 막 녹은 3월의 흙속에 파 묻혔지만 그녀의 영혼만큼은 언제나 가까이에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내 자신을 위로해 주고 있는 듯하다.


솔직히 내게는 단 한가지의 삶뿐이었던 때가 있었다. 브론테처럼 현실속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나 또한 자연스럽게 생각속의 삶을 끌어들이게 됐지만 그 경계를 구분한다는 것은 전자를 노동의 고단함, 후자를 영혼의 휴식으로 쉽게 단정 지어 버리기에는 복잡한 문제였다. 가족과 아이들로 연결되어 있는 내 삶이 현실에 가까운 삶이라면 개인적인 이상에 접근하는 삶일수록 생각속의 삶이라는 생각은 든다. 아이들의 보살핌과 소소한 집안일들, 그리고 노력을 들인 대가가 전혀 표시나지 않는 그런 수많은 일들을 매일매일 하면서 산다. 또한 감동받고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안타까움을 경험하는 일 또한 현실속의 삶에서 훨씬 더 많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생각속의 삶은 현실속의 삶의 그늘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그렇다고 생각속의 삶이 없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고단하게 살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이렇듯 두 가지의 삶은 내 인생 전체를 두고 볼 때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단우를 유치원까지 데려다 주는 일은 현실의 삶이지만 나는 오늘 아침 아이의 말 한마디로 마음속의 울림을 경험했고 잠시 생각속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내 아이들과 가정에 책임감을 느끼고 그 생활에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내 인생 현실속의 삶의 목표는 ‘내 아이들의 행복’이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야만 생각속의 삶 또한 밝은 빛으로 번지게 될 것이리라.


짙은 잿빛 하늘은 이 비가 언제 그치게 될지 예상할 수 없게 만들지만 우리들 모두는 다 알고 있다. 두꺼운 먹구름 뒤에는 언제나 여전히 푸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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