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될 무렵부터 나는 엄마와 친구처럼 지냈다. 격 없이, 한편으로는 다소 예의가 모자란 사람처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어떤 친구는 날보고 ‘너는 엄마와 친구처럼 이야기 한다.’고 칭찬도 아닌 비난도 아닌 말로 나를 조금은 놀라게 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그래서 나는 내가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는가 보다 그렇게 알고 살아왔다. 열네 살 이후로 2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는 엄마와 친구처럼 이야기한다. 물론 지금이야 내 나이도 마흔을 넘어섰고 따로 꾸린 가정도 있으니 그 때처럼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자주 없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여전히 나의 친구 같은 대화 상대이다.
아이들 학교 개교기념일을 핑계로 모처럼 회사에 휴가를 낼 수 있었던 김에 3일간의 연휴나 다름없었고 때 마침 아이들도 며칠 전부터 외갓집에 가고 싶다고 말을 해 왔던 터라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토요일 새벽부터 일어나 밀린 집안일을 한꺼번에 해 치우고 서둘러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큰 아이가 걱정이 많은 편이다.
“엄마, 할머니한테 미리 전화해야 되지 않아? 우리 다시 집으로 와야 되는 거 아니야?”
대꾸도 없이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 음이 거의 끝나갈 때 쯤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올해 도지를 얻은 밭이 배수가 잘 안 되는 것인지 마늘을 심은 밭고랑에 물이 차올라서 때 아닌 잡초가 무성하게 커버렸다고 그래서 안 해도 될 일거리가 늘었다고 투덜투덜 불만 섞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아무튼 조심해서 천천히 오라는 엄마의 걱정이 섞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앞자리 조수석 쪽 카시트에서 곤히 잠든 막내, 뒷좌석에서 뭐가 그렇게 신이 난 것인지 큰 녀석, 작은 녀석은 웃고 까불고 아주 난리가 났다.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40도 못 낼 만큼 어디론가 가고 있는 차들로 꽉 들어차 있었고 나는 조금 기분이 심란해져서 아이들에게 조금만 조용히 해 줄 것을 말하고 마치 자동화된 기계처럼 큰 신경을 쓰지 않고서도 숨을 쉬듯 운전의 부담을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친정에는 내가 가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아이들을 대신하여 엄마에게 둘러대기는 했지만 그냥 내가 우리 집에 오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엄마한테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책이 나왔다고.
동심이었던 적이 평생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마치 고백처럼 말했던 어떤 작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그 때 내 감추고 싶은 속마음을 들켜버리기라도 한 듯 부끄럽다가 마음속에 가라앉아 숨죽이고 있던 슬픔의 감정이 불쑥 얼굴을 내밀고는 그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기분에 울컥한 적이 있었다. 나는 꼬마 때부터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엄마의 시집살이, 아빠의 고된 노동 그리고 내성적인 성격은 나를 어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만들었었다. 집안의 막내였기에 나머지 식구들보다 거의 언제나 내가 받는 사랑과 관심의 몫은 많은 편이었으니 그래도 나는 여유 있는 유년시절을 보냈고 그 만큼 아버지와 엄마와의 특별했던 추억도 많았다. 그것은 ‘나는 나머지 동기들에 비해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성장했으니 그 만큼 부모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몫도 크다.’는 생각으로 굳혀졌고 결혼을 하고 세 아이를 낳아 살면서도 마음속에는 항상 부모님과 언니와 오빠에 대해 빚을 진 기분이 들어 비록 마음뿐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네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간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의 감정처럼 지난 시절 가족들과의 막연한 정과 추억으로 인정되는 그런 애잔함이 아니라 특별한 미안함, 의무감처럼 다가오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랬던 건지 어릴 때부터 내 대답에는 “괜찮아.”라는 말이 섞여 있었다.
“현이야, 이거 해 줄까?”
“아니, 괜찮아.”
그러나 나는 점점 ‘괜찮아.’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살게 되었다. 독립을 하면서 내 가정을 꾸리고 살게 되면서 누군가에게 ‘괜찮아.’라는 말을 할 필요성과 이유를 점점 느끼지 못하게 돼 버린 것 같다.
집은 비어 있었다. 참외 한 개와 물 한 병을 비닐봉지에 싸 들고 엄마가 일하고 있는 마늘밭으로 향했다. 기분의 좋고 나쁨을 언제나 가장 정직하게 표출하는 선우가 할머니가 일하는 밭으로 ‘할머니’ 부르며 가장 먼저 달려 내려갔다. 내가 할 일을 내가 낳은 자식이 대신 해 준단다는 생각에 유난히 선우한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조금 많이 고단해 보였다. 가져간 물을 드리고 주머니칼로 가져간 참외를 비닐봉투 안쪽에 잘라냈다. 외할머니, 외손자 셋, 그리고 시집 간 막내딸은 이렇게 마늘 밭 두렁에 그냥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참외 한 조각씩을 베어 먹었다. 가볍게 불어오는 봄바람이 여기 저기 뿌려 놓은 두엄의 소똥냄새를 불쾌하지 않을 만큼 실어와 우리들 콧속으로 들어왔고 하늘에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얇고 투명한 구름 조각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 그날 오후 우리들을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늘 밭에서 조금 벗어나 나는 아이 셋을 데리고 내가 어릴 적 거닐 던, 지금과 모습이 많이 변해버렸지만 그 때의 정취만은 그대로 남아있는 모내기 준비를 막 끝낸 논두렁으로 걸어갔다. 배가 동그랗게 살이 찐 개구리 새끼들, 막 알에서 나온 올챙이들이 논바닥에 한 겹 깔리다 시피 새까맣게 엉켜 있어서 한 손으로도 몇 마리는 쉽게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도 정우만 했을 때야 겁도 없이 올챙이를 손으로 주무르다 다시 놓아주고 했었지만 엄마를 보채며 올챙이를 잡아달라는 단우의 말에도 이제는 선뜻 물속에 손을 집어넣기가 망설여졌다. 무서운 게 아니라 올챙이 떼가 징그럽기도 하고 손으로 만졌을 때 오는 그 미끄럽고 끈끈한 불편한 촉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작은 돌조각을 물속에 던져 보기도 하고 노랗게 핀 민들레 꽃 잎을 만져보기도 하고 소금쟁이 다리가 물속에 빠지지 않고 스케이트 선수처럼 물위를 미끄러지는 경이로운 모습에 새삼 감탄하기도 하면서 모처럼 시골 볕 아래에서 마음의 휴식을 맛 볼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인근 동네에서 특산품으로 하는 천마를 심는 품앗이 일을 해 주시고 서쪽 앞산이 해를 반쯤 먹었을 때가 돼서야 돌아오셨다. 최근 농사일이 하도 바빠 일을 많이 한 탓인지 평소에도 아픈 다리를 절름거리며 걷고 계셨다. 나는 모처럼 저녁에 생태찌개를 끓어 먹을까 하여 들어오는 읍내에서 장을 봐 왔는데 아버지는 오늘 벌어온 품삯으로 손주들 고기를 사주시겠다고 하셨고 그렇게 우리는 그날 저녁으로 어른 셋, 아이 셋이서 달콤 짭짜름한 돼지갈비를 머리수에 맞게 6인분을 먹고 냉면에 공기 밥까지 먹고 동네로 돌아왔다. 소주한잔 드신 아버지는 자동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있는 정우를 보고 해처럼 산 뒤로 지는 별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정우는 외할아버지와 맨 마지막으로 집 안으로 들어와서는 나에게 말했다.
“엄마, 서쪽 산으로 별이 지는 걸 보고 왔어. 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그 별을 본대. 그런데 별이 정말 크고 반짝거렸어.”
아이의 마음속에 별 빛으로 가득 차 있기라도 하 듯 그렇게 말하는 정우의 입술 사이로 별 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보이는 듯 했다. 꼭 정우가 보고 온 서쪽 하늘 저녁 별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버지는 요 전날 삼촌댁에 가신 할머니 방에서 주무신다고 건너 가셨고 엄마와 정우가 침대를 차지하고 누웠다. 나머지 우리들은 바닥에 두껍게 요를 깔고 벽 쪽의 나를 기준으로 단우와 선우가 나란히 누웠다.
“엄마, 나 이번에 책 냈어.”
“무슨 책?”
“별건 아니고,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했는데 언니랑 오빠한테는 사서 보라고 하겠는데 엄마한테는 초판 나오면 내가 사인도 해서 가져다줄게.”
“낮에 일하고 저녁에 아이들 챙기고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 언제 글을 써서 책 낼 시간이 있었냐.”
엄마는 딸자식의 이름으로 된 책이 나왔다는 기쁨보다 그 책을 내기 위해서 힘든 생활 속에서도 얼마나 더 많은 노력을 했을까 싶어 오히려 더 안타까워하시는 듯 보였다. 엄마의 그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생했다.’라는 말이 먼저 듣고 싶었던 나는 왠지 철이 들 든 아이처럼 조금은 서운함을 느꼈다. 그러다가 우리는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끼리 이야기를 나누기라도 하듯 시시콜콜한 말들로 한참동안 말을 주고 받았다. 엄마가 먼저 잠이 들고 아이들까지 완전히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서야 언니한테 그동안 조금씩 써 뒀던 글을 책으로 냈다고 말했다. 언니의 반응이야 나의 예상대로 최고였고 언니의 말대로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생각이 드니 묘한 기분이 들면서 문득 지난 일들에 마음이 울컥해져서 그랬는지 눈꼬리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머리카락 속으로 굴러 스며들었다. 오빠는 역시 무뚝뚝하게 자기도 한 권 사서 봐야겠다며 조금은 멋쩍게 말했다. 나도 이제는 인세를 받는다고 너스레를 떨며 그냥 똑같이 멋쩍게 웃고 말았다.
정우는 엄마 책이 나오는 날 선우와 단우와 함께 축하 파티를 하자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말만 들어도 정말 기쁘다며 고맙다고 해 주었다.
사실 말하자면, 나는 뭐 대단히 글 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서른한 살, 큰 아이 정우의 출산을 시작으로 마흔이 될 때까지 10여년을 단 하루도 게으름 피우지 못하고 그렇게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노력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멈춰 돌아보니 그 동안의 나라는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오로지 일과 양육이라는 늪에 빠져 얼굴만 간신히 내 놓고 숨이 넘어갈 정도로 발버둥 치고 있는 내가 보였다. 그때 나는 살 궁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내 자신을 소모하는 일이라고만 여겼던 마음을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한 번 조금 천천히 걸어가 보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아주 조금씩 대수롭지 않은 일상들을 우리들만의 특별한 사건들로 기록해 냈고 많지는 않았지만 내 글을 읽었던 사람들은 진심으로 많은 공감을 표현해 주셨고 그렇게 해서 나는 점점 더 용기를 낼 수가 있었다. 정신적 생존의 기쁨을 누렸다고 해야 할까. 물론 언제나 글이 쉽게 써졌던 것도 아니었으며 또한 내가 쓴 글들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경우가 더 많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나씩 완성이라는 것을 해가면서 반성과 다짐으로 미완성인 내 삶을, 부족하기만 하다고 여겨지던 내 자신이 점차 성숙해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기분들이 육체적인 고단함으로부터, 무뎌져 가던 감성으로부터 조금씩 해방시켜 준다는 기쁨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는 나를 비웃을지 모른다. 비꼬는 말로 ‘개나 소나 다 책 내는 시대, 글은 누구나 쓴다.’고. 하지만 나는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다. 글이야 말로 완벽한 존재라는 것을. 나야말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내면의 삶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설렌다. 무엇보다 몇 년 뒤, 내 아이들이 우리 엄마가 자신들을 어떻게 키우셨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오셨는지를 내가 쓴 글을 책으로 읽게 될 때를 상상하면 더 많이 설렌다. 그리고 지금은 무작정 내 세 아이의 존재가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내 인생의 절반을 살아 왔던 산골 동네에서 20년 동안 내가 자주 했던 말 - '괜찮아' - 을 내 아이들에게 말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
“얘들아, 그래! 괜찮아.”
그리고, 엄마가 나에게 친구와도 같았던 지난 날들처럼 나 역시 내 아이들에게 친구같은 엄마로서 그렇게 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