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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파리 Jul 04. 2024

미영 콤플렉스

혜이드가 씁니다

 나는 엄마 아빠랑 별로 친하지 않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미영 씨는 나와 내 동생의 교육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한의사였던 영승 씨와 결혼 후 영승, 미영 씨 부부는 고향인 대구가 아닌, 경기도 의정부에서 터전을 잡았다. 그 당시 대부분의 한의원은 흐름을 잘 타 장사가 잘되는 편이었고, 이왕이면 서울 근처에서 한의원을 개원하는 것이 돈을 벌기에, 아이를 교육하고 좋은 대학에 보내기에 좀 더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상경 비슷한 것을 하게 되었다. 미영 씨는 대구를 떠나면서 교사를 그만뒀고 나를 임신했다. 미영 씨와 영승 씨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를 기다렸고, 드디어 내가 세상에 나왔다. 미영 씨의 최초 자식이었던 나는 출생과 동시에 최고의 엄마가 되기 위한 미영 씨의 원대한 계획에 끼워 맞춰졌다.


 나를 누구보다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엄마는 사랑과 정성, 욕심으로 밀착 교육을 시작했다. 알파벳도 겨우 읽고 쓰는 다섯 살 때 엄마는 나를 영어 유치원에 보냈고, 그 이후는 각종 사교육을 시도했다. 선생님이 방문하시는 국어, 한자, 영어, 수학 구몬, 피아노, 미술, 속독, 영자 신문 읽기, 영어 화상 수업, 수영, 스쿼시 등등. 선생님이 오시지 않거나 학원에 가지 않는 시간에는 침대방과 분리된 '공부방'에서 철저하게 공부 시간과 쉬는 시간을 타이머로 지켜가며 수학, 영어 문제집 등을 풀게 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도 딱히 칭찬이나 인정을 받지는 않았다. 엄마 입장에서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각종 선행 학습을 했던 나는 내가 똑똑하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내가 뭐든 잘한다는 것을 어디에서건 인정받고픈 욕망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화가가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엄마는 교양 교육의 일환으로 방문 미술을 시켰을 때였다. 선생님은 연필을 잡는 법부터, 선 그리기, 곡선 그리기, 도형 그리기, 명암 넣기 등 기본적인 것을 먼저 가르쳤고, 드디어 수업 한 달쯤 됐을 때부터 인물 그리기를 시작했다. 당시 나는 매일 같이 투니버스에 나올 법한, 눈과 드레스가 화려하기 그지없는 삼 등신의 공주를 그리는 게 취미였기 때문에, 처음으로 실물과 가까운 인물을 그리는 것이 꽤 흥미로웠다. 잘만 하면 더 멋진 화려한 인간을 그려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진을 보면서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연필을 비스듬히 잡고 전체적인 인물의 얼굴, 몸통, 팔다리 비율을 흐린 선으로 러프하게 그리면서 한 시간의 수업 시간이 끝났다. 선생님이 가시고 '나 재능 있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흐리멍덩한 실루엣이 그려진 내 도화지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엄마가 방에 들어오더니 고작 1분 만에 굵은 선으로 인물을 정확히 그려냈다. 그러고 나서 엄마가 무슨 말을 했는데,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화가의 꿈을 접게 되었다.


 엄마가 최소 2학년 이상의 수학 선생 학습을 시켜준 덕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수학 익힘책을 풀면서 나는 수학이 참 쉽고 우스웠다. 수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창고에는 2000개의 박스가 들어갈 수 있고, 수레 한 대가 한 시간에 옮길 수 있는 박스의 수는 40개이다. 4시간 안에 창고 두 개를 채우려면 몇 대의 수레가 필요한가?' 따위의 문제만 빠르게 잘 풀었던 나는, 엄마가 첫 초등학교 수학 경시대회에 내보낸 날에 크게 좌절했다. 나는 전혀 창의적이지 않았고 그냥 적당히 계산을 빠르게 하는 평범한 애였을 뿐이었다. 내 자존심이 상하는 것보다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조금 더 무서웠다. 엄마는 잘하는 것보다 엉덩이가 무거운 게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그 말은 곧 엉덩이가 닳아버릴 정도로 아주 열심히 해서 자랑할 만한 결과를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이 잘 따라와 주는 만큼, 하루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새로운 공부 방식들을 시도해 보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선 더 엄격해져야 했다. 내 하루 일과 전체가 엄마의 치밀한 계획표 그 자체였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고 나서는 무조건 20분 안에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규칙이었다.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그날따라 친구들이랑 정글 짐에서 더 놀고 싶었다. 12시 40분이었던 귀가 시간을 20분째 초과할 때부터 나는 불안해졌다. 내 친구들도 우리 엄마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우리는 작은 머리를 맞대고 어떤 거짓말을 할지 고민했다. 십여 분의 토론 끝에 "대청소를 했다!'라고 말하기로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귀가했다.


 역시 엄마는 화가 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복도 끝에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우리 다 같이 대청소했어..."라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담임 선생님한테 전화를 걸어 오늘 대청소를 하셨느냐고 물었고, 담임 선생님이 어떻게 대답해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화가 난 채로 공부방으로 따라오라고 했다. 그러더니 엄마는 다 풀지 않는 문제집들을 내 눈앞에서 박박 찢더니 너 같은 애는 앞으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내가 내 손으로 인생을 망치게 될까 봐 그 이후로는 엄마 말을 잘 들었다.


 하지만 사춘기가 찾아오고, 어릴 때와 다르게 더 자유분방하고 거친 중학교에 들어가데 되면서 엄마가 나를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진 사생활이라고 할 것이 없었지만 6교시까지 머물러야 하는 중학교에 가서는 집에 있어야 하는 시간만큼이나 학교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므로 몰래 없는 시간을 만들어 내기가 쉬웠다. 나는 예쁘게 꾸미고 다니고 싶었고, 남자 친구를 사귀고 싶었고, 반항적인 친구들이 왠지 멋져 보였다. 엄마는 공부뿐만 아니라 내 생활 전반을 문제 삼기 시작했고, 그 갈등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이어졌다.


 아빠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처럼 말수가 적었고, 그냥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주의의 아버지였다. 사회 분위기와 아빠의 신념에 따라 혼자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나와 동생을 교육하고 돌보는 일은 전적으로 엄마한테 맡겼다. 엄마는 아빠가 거실에서 티브이 보는 소리도 나와 동생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빠는 늘 출근했다가 퇴근해서 안방 문을 닫고 저녁 식사를 하다 내일을 맞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와 내가 서로 집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려 몸싸움을 해도 개입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엄마와 나는 애증으로, 아빠와 나는 묘한 어색함으로 서로의 세월을 잡아먹으면서 5년을 보냈다.


 이상하게 고등학교 3학년 첫 3월 모의고사에서 반 일등을 했다. 이전까지 공부에 대한 자발적인 욕심이랄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기대하지 못한 등수였다. 어쩐지 우쭐해져서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열심히 공부하는 시늉을 했고, 운이 좋게 모든 모의고사 성적이 좋았다. 19년 내내 엄마한테 귀가 닳도록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말만 들었기 때문에 이 수능이라는 관문만 넘으면 엄마랑 화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다렸던 수능은 내가 속 빈 강정이었다는 것만 누차 확인 사살했다. 땡큐 수능.


 엄마 아빠와 서로 속 깊은 대화 없이 십여 년이 흘렀다. 시간은 그저 흘렀고, 엄마 아빠는 물렁하게 늙어 갔지만 나는 노련하고 얍삽해졌다. 서로가 서로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서로 애잔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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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엄마도 나 키워봐서 알겠지만 하라고 하면 더 하기 싫어하고, 못한다고 하면 기죽어서 더 못하는 인간이야. 엄마는 매번 시키는 것만 하길 바라고, 칭찬보다는 왜 이거밖에 못하냐고 질책하는 사람이었어서 원망도 많이 했는데, 엄마가 나한테 강요를 많이 해준 덕분에 반항심 같은 독립심을 키웠고, 칭찬보다는 겁을 많이 줘서 눈치 빠른 신중한 사람이 됐다고 생각해.


 엄마가 나를 그냥 잘한다 잘한다 칭찬만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뒀으면 내가 또 어떤 사람으로 자랐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은 돌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더 이상 '왜 나를 그렇게 키웠냐'라고 탓하고 싶지 않아 졌어. 그리고 사실, 엄마랑 아빠 덕분에, 돈 때문에,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처받지 않는 집에서 자랄 수 있었어서, 내가 돈에 너무 매이지 않고, 각박한 삶에 치이지 않고 이것저것 해볼 수 있어서 지금 내 마음에 드는 내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 내가 가끔은 '아 엄마 아빠가 날 이렇게 키웠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해도 엄마 아빠가 최선을 다해서 최고로 날 키운 거 알아.


 하지만 앞으로는 엄마가 늘 얘기하는 것처럼 엄마 아빠가 언제까지나 보호자로 옆에 있어 줄 수 있지도 않을 거고, 엄마 아빠한테 조언을 구하겠지만 내가 내 삶을 선택해 나가야 하는 상황이 훨씬 더 많이 펼쳐질 거야. 나는 엄마가 '아무것도 못하는 이 가시나를 기술이라도 배우게 해야 하나' 하면서 걱정할 만큼 무능하고 생활력 없는 바보가 아니야. 엄마 아빠가 나한테 돈과 시간과 노력을 쏟아준 만큼 똑똑하고 어디서든 잘하는 사람이야.


 엄마가 나를 어디에 내던져져도 질기게, 자신감 있게 살아가게 하고 싶은 거라면, 이거 해라, 하지 마라를 더 이상 그만해 줬으면 좋겠어. 엄마가 뭐 하지 마라, 이거나 해라, 할 때마다 내 자질이나 능력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고, 나 스스로 낮추게 되는 것 같아. 나는 내가 스트레스 안 받고 편안하고 즐겁게 사는 게 꿈이야. 근데 바로 엄마가 나를 불안해서 작아지게 하고, 스트레스받게 하고 불편하게 만들어. 설령 엄마가 그렇게 하는 게 나를 사랑하고 걱정해서 그런 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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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2024년 2월 23일 미영 씨랑 화해 비슷한 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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