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킬이 씁니다
희와 프레임에 관한 대화를 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과의 공존을 위해 몇 가지 규칙 위에 문명을 쌓기 시작했다. 1만여 년을 겪으며 각 문화권에 따라 규칙의 세부항이 달라지긴 했지만, 대부분 비슷한 결을 공유한다. 사람을 죽이지 말 것,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상호공존을 위한 기본적인 프레임이 형성된다. 하지만 사회가 여러 방면으로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사유 능력과 개인 간 이해 관계도 함께 복잡해졌다.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게 된 이들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프레임 밖 세상을 알아차린 것이다.
금이 간 유리컵은 조치하지 않으면 언젠가 깨지기 마련이다. 컵을 고치든 새로운 컵을 찾아 나서든 해야 한다. 집단의 한 부분에서 작은 균열이 일어나면 기존 프레임 안에 더 머무르거나 혹은 그 프레임에서 탈출하기 위해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한다.
보수적인 이들은 오랜 시간 지켜온 안정감을 위해 얼른 그 틈을 메꾸거나 봉합한 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길 기대하고 진보적인 이들은 과감하게 그 틈을 확장시켜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대안을 내 큰 변화가 일길 바란다. 인간 군집은 결국 하나의 생명체처럼 기능하기 때문에 균열의 종류와 정도에 따라 전자가 답이 될 수도, 후자가 답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프레임에 균열을 인지하기 시작한 이후로부터는 인지 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선택해야 했던 '전부 다 잊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살던 대로 살아갈 수 있는 파란 알약'과 '세상의 실체를 알게 되는 빨간 알약' 중 무엇을 삼킬 것인가의 문제가 나에게 주어진다면, 나는 파란 알약을 먹고 세상이 안온하게 흘러가기를 기대하는 겁쟁이에 가깝다. 그러나 프레임의 균열을 '인지'하게 되는 것은 때론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다. 우연히 빨간 알약을 삼키게 된 경우와 비슷하다. 원치 않았지만, 알게 되고 나면 끊임없이 신경이 쓰인다. 아끼는 니트에 살짝 올이 나가버린 것을 알게 된 후의 인생은 전과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대표적으로 나는 두 성별 모두에게 짐을 지우는 '가부장제 프레임'에 불편함을 느낀다. 여전히 양극단으로 갈려 서로 싸우는 주제긴 하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여성이 좀 더 불편함을 느끼는 듯하다. 수십 수백 년이 지나 여성과 남성이 수행하던 역할이 더 이상은 고정적이지 않게 되었다. 여성들은 기존 프레임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기존 프레임에 머무르길 바란다. 논제에 대한 찬반은 개인의 이익이나 신념을 바탕으로 한다. 모든 싸움은 개인의 안락한 삶을 위한 정치 싸움이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존재하는 한 정답은 없다.
아무튼 나는 '가부장제 프레임'을 인지해버렸다. 그리곤 때때로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프레임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첫 번째로, 애초에 프레임의 실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거나 무시해도 별 탈이 없는 절대다수의 암묵적인 프레임은 벗어나기 어렵다. 나 역시 프레임을 인지한 시간보다 인지하지 못한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에 프레임 밖 영역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다. 두 번째 문제는, 현 프레임에서의 탈출이, 해방이 아닌 또 다른 프레임으로의 입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무슨 행동이라도 하면, 무언가 바뀔 줄 알았다. 안타깝게도 나는 '지배적인 프레임'에서 도망쳐 나와 '지배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프레임'에 갇혔다. 이쪽 프레임이나 저쪽 프레임이나 따지고 보면 둘 다 불편한 점들이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탈출(escape)이 아니라 탈옥(breaking out)을 해야 한다.
하나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면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액자식 구성의 연속이다. 빠져나오는데서 그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프레임을 파괴해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매일의 과제다. 각자의 프레임 위에 서서 승패 없는 싸움을 하지 않으려면, 어딘가 모순적이게도 사랑을 해야 한다.
각자가 자신만의 안전을 위해 칼싸움을 하다 보면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다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하는 복잡한 관계망 속이 이 싸움의 장이다. 위험 회피는 본능이므로 단 한 명이라도 칼을 들면 모두가 칼을 들게 되어 있다. 칼이 주 무기인 프레임 전쟁은 모두가 피 흘리며 지쳐 쓰러지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칼을 버려야 한다. 모두가 이기는 싸움을 하기 위해서는 전부 다 칼을 버려야 한다. 삶을 위협하는 적은 대개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그러나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을 0순위에 두는 인간이 인간인 한 그런 일은 일어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참 멋있는 말이다. 이 땅의 모든 이가 미미한 확률로 칼을 버리고 꽃을 드는 그날이 오지 않을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안다는 것 자체만으로 칼을 들고 있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쉬워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지'는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다.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 되돌아가기는 어렵다. 누구든지 우연찮게 무조건 한 발짝 프레임 밖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이때 누군가 칼이 아닌 꽃을 쥐길 선택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언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난다.
세월의 지혜가 인간에게 칼이 아닌 꽃을 쥐어주길. 전인류가 합심해 칼대신 꽃을 들고 전쟁이 아닌 탈옥(breaking out)을 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