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이드가 씁니다
기린은 슬플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지 않다. 전신 거울을 자주 볼 일도 없거니와, 자신의 정확한 치수를 알아야 업이 이어지는 모델이 아니라면 굳이 자세히 들여다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대학생 시절 의류 전공 수업을 함께 듣던 모델 학우가 자기소개에 자신의 상세한 신체적 특징을 함께 설명했을 때, 그제야 잠깐 내 몸에 대해 생각해 봤다. 아, 나는 키가 큰 편이군. 그리고 하체에 비해 상체가 더 말랐고. 어깨가 좀 좁은가? 이전에는 이 정도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한두 달 전 엄마가 생일 선물로 목걸이를 맞춰준다고 해 함께 금은방에 갔다. 사장님은 내 목둘레를 줄자로 재더니 "아가씨는 목도 긴데, 목둘레가 아기 돌목걸이 길이랑 똑같이 나오네!"하고 신기해하셨다. 이후에 내 목이 얇고 길다는 사실을 더 의식하게 된 사건들이 있었는데, 모두 한 달 새에 일어난 일들이라 웃겨서 적어본다.
운동을 하고 몸을 가꾸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바람에 작년 초에 시작했던 50회 PT 수업을 아직도 받고 있다. 헬스장은 사방이 거울이다. 혼자 거울 앞에 설 땐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던 내 모습이 트레이너 선생님이랑 나란히 만 서면 어쩐지 재밌다. 내 트레이너 선생님은 키가 작고 탄탄한 체형인 반면 나는 전체적으로 얇고 길어서 그의 옆에만 서면 자꾸 소금쟁이가 떠오른다.
선생님은 늘 나한테 몇 살이냐고 묻는데, 그 말은 신체 나이가 도대체 몇 살이냐는 뜻이다.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평생을 앉아있기만 해서 거의 모든 근육들이 짧고 뻣뻣하다. 덕분에 여기저기가 자주 쑤시고 종종 아프고 가끔 저리다. 나는 특히 목이 좋지 않는데, 일자목인지 거북목인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뭔가 잘못되어 있다. 아마 목 때문일 텐데, 나는 편두통이 잦은 편이고 심하면 며칠씩 간다. 선생님은 매번 구린 컨디션으로 헬스장을 찾는 나에게 "이렇게 얇고 긴 목은 애초에 평소 자세를 바르게 하고 꾸준히 운동하는 등의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쉽게 정상 범위를 벗어날 것"이라고 하시며 고문 같은 근육 해체 마사지를 선사해 주신다.
여느 때처럼 선생님의 잔소리를 듣고 있는데 문득 목이 엄청나게 긴 기린이 떠올라 멍청한 표정으로 "그럼 기린은요?"라고 물어봐버렸다. 선생님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자세나 똑바로 잡으라고 하셨고, 나는 뱉어놓고도 웃겨서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내내 실실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친동생 주와 별일 없어 카톡을 이어나가고 있던 중 냅다 실시간 셀카를 보낸 적이 있었다. 아래에서 위를 향한 각도로 '내가 오늘 이렇게나 피곤하다'를 보여주려 찍은 사진이었는데, 어쩜 딱 어깨에서 잘리는 바람에 얼굴이 마치 커다란 면봉 대가리 같았다. 주는 채팅창에 키읔을 남발하더니,
'존나 영화 포스터 같음
제목
기린의 비애'
살면서 몇 번 본 적 없는 기린이라는 동물과 내가 자꾸 겹치는 게 웃겨서 희와 그의 남자친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했다. 희의 남자친구는 이야기를 듣더니, 기린의 목둘레는 나의 몸통 둘레와 비슷할 것이라고 진지하게 답했다. 맞는 말이다. 기린의 목은 튼튼하다. 키가 큰 나무의 잎을 뜯기 위해, 멀리 보기 위해, 다른 기린과 싸우기 위해, 필요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린은 목이 길다는 이유로 머리가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모가지의 쓸모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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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사슴>, 노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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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심해진 편두통이 이 글을 쓰게 했다. 목이 긴 건 현대 미의 기준으로 봤을 때 사회적으로 유리한 조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목의 본 기능은 머리통을 지탱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생존에는 조금 불리한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원인 불명의 슬픔이 하루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데, 내 목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난 뒤로는 내가 슬퍼서 머리가 아픈 건지, 목이 길어서 머리가 아픈 건지, 목이 길어서 슬픈 건지 헷갈린다.
뭐든 알기 이전으로는 돌아가기 어려운 법이다. 그리고 창조되기 이전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 목이 긴 채로 세상에 나와 목이 긺을 깨달아 슬픈 삶을 살고 있다. '목이 긺'과 '슬픈 삶' 사이에 꽤 많은 문장을 잃어버렸다. 그 중간에 잃어버린 게 뭘까 가끔 들여다보곤 하는데, 곧 묘하게 불쾌한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혼란해져 도망치게 된다. 지금은 용기도 없고 힘도 없어 알 도리가 없다. 때론 가지지 못한 것들이 아니라 우연히 가져버린 것들이 존재를 슬프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우연히라, 어찌할 수가 없어서.
기린은 뭐 때문에 슬플까? 목이 길어서가 이유는 아닐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