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킬이 씁니다
노련하다 (늙을 老 불릴 鍊하다)
[노ː련하다]
형용사
많은 경험으로 익숙하고 능란하다. 노련한 솜씨.
나이를 먹으면 자동으로 노련해지는가?
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 테트리스와 비슷한 퍼즐 게임을 꾸준히 했었다. 이름은 '텐텐 1010!', 총 백개 칸으로 이루어진 정사각형의 퍼즐판에 랜덤으로 주어지는 블록들로 행 또는 열을 완성해 해당 줄을 비우면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게임이었다. 비우고 채우고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더 이상 블록을 배치할 자리가 없어지면 게임이 끝난다.
'텐텐'은 긴장감이 없는 게임이라서 다른 게임에 비해 꽤 오래 했다. 대부분의 퍼즐 게임은 시간이나 횟수에 제한을 두는데, 텐텐은 정말로 시간제한이 없다. 게임을 하다가 중간에 꺼버려도 점수가 0으로 리셋되지 않는다. 다른 일을 하다 다시 들어가면 마지막에 봤던 화면이 그대로 기다리고 있다. 모든 수를 신중하게 둔다면 한 판을 며칠이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게임이 끝난 후엔 이번 게임에서 몇 점을 받았든 역대 최고 점수만 보여줬는데, 과거의 혜파리들과 의미 없는 순위 경쟁을 하지 않아서 더 가벼운 마음으로 플레이했다. 어차피 쉽게 달성하지 못하는 최고 기록이니까 어쩌다 넘기면 기분 좋은 거고, 아님 말고~ 쫓기는 느낌이 없어서 좋았다.
음주가무가 합법인 성인의 삶에 본격적으로 적응한 이후로는 모든 게임을 삭제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 용량이 적어 안 쓰는 앱을 주기적으로 정리해야 하기도 했고, 집에서 혼자 하는 게임보다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체험하는 것이 더 재밌었기 때문이다. '텐텐'도 그때 삭제했고 이후로는 핸드폰 게임에 대한 흥미도 서서히 줄었다.
시간이 흘러 코로나가 터졌다.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내는 것이 익숙했던 터라, 학교도 가지 못하고, 친구들과 집 밖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 너무 지루하고 괴로웠다. 뭔가 생산적인 걸 하자 싶어 집 근처 작은 펍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하지만 코로나의 여파로 가게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고, 오후 8시부터 11시 30분까지 멍만 때리다 일과가 끝났다. 가게 매출이 줄자 사장님은 가끔 나를 조금 더 늦게 출근시키시거나 일찍 퇴근시키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매번 미안해하시면서 보너스를 챙겨주셨다. 사장님께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고 싶어 종종 주방에 기웃거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사장님은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거 해~"라고 하셨고, 나도 여유로운 근무 환경에 익숙해져 손님이 없을 때는 책을 읽거나 녹화 강의를 들었다.
책도 강의도 지겨워진 어느 날 뭘 할까 생각하다가 '텐텐'을 깔았다. 스마트폰 계정을 유지한 덕분에 '텐텐'에 자동으로 로그인이 되었고, 시작 화면에는 몇 년 전 나의 최고 기록인 10000이 조금 안 되는 숫자가 떠있었다. 손님이 오면 잠깐 멈췄다가 다시 한가해지면 플레이하고, 아무 생각 없이 세 시간쯤 플레이를 하다 문득 점수를 봤는데 이미 10000점이 넘어있었다.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어 갑자기 게임에 집중하게 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수가 꼬였고 게임이 끝났다. 첫 시도로 3년 전의 나를 이겼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텐텐'을 플레이하지 않은 지난 3년 간, 내가 퍼즐 게임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했던가? 게임도 불분명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통찰이 필요한 영역이긴 하다.
성인이 되고 난 후부터 당연히 고등학생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여러 가지를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했고, 의무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든 덕분에 사색하는 시간이 늘었다. 주로 전혀 다른 것들에서 비슷하게 작용하는 원리를 찾아내 나만의 해석이나 논리 전개로 이어가는 것이 내용이었다. 너무 아끼는 바람에 물을 필요 이상으로 줘 죽어버린 선인장과 내 욕심으로 망해버린 연애를 비슷하게 여긴다던지, 7층짜리 건물 전체에서 진행하던 디즈니 픽사 전시를 관람하다 문득 나는 정말 우주의 먼지임을 깨닫게 된다던지 하는 식으로.
사색의 멋진 점은, 이런 관념적인 생각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감각도 일부 깨워준다는 것이다. 평생 몸치라고 생각하고 살던 나에게 발레는, 몸의 움직임은 뇌로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과 내가 원하는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해선 어떻게 근육을 써야 하는지 가르쳤다. 몇 년 간의 관찰은 면허 없는 프로페셔널한 조수석 지킴이도 도로 상황을 조금 읽을 수 있게 했고, 만날 때마다 여러 가지 중국어 단어와 문장을 들려주던 희에게 '星期一(xīng qī yī)'가 중국어로 월요일임을 듣고는 그렇다면 토요일은 '星期六(xīng qī liù)'가 되겠구나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짬바 =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 노련미
다시 '텐텐' 게임으로 돌아와서, 어쩌면 시간의 누적이 남긴 '짬바'이라는 경험치가 더 어린 날의 나를 한 번에 이기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텐텐' 이후에도 내 짬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따로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복학 후 국문학과 성적이 이전보다 훨씬 더 잘 나왔고, 과제를 더 잘 해냈고, 면접을 더 잘 봤다. 설령 내 짬바가 앞에 놓인 상황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지라도, 순간 단 3초의 예지력을 발휘하게 했다.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 자동으로 노련해지는가? 매 순간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짬을 쌓으면 자연스레 통찰력이 생긴다고 믿는다. 그러나 '짬바'라는 엄청난 패시브 스킬(별다른 조작 없이 항상 효과를 발휘하는 스킬)도 약점이 있기 마련인데, 나의 경우에는 더 잘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텐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짬바 스킬'이 켜져 있는 상태일 것이기 때문에 하던 대로 힘 빼고 편안하게 플레이했으면 좋았을 텐데, 더 높은 점수를 얻고자 조급해지는 바람에 게임이 금방 마무리됐다. 하지만 괜찮아! 경험치는 죽지 않는 한 잃는 일이 없다. 아직 어리고, 헤쳐나가면서 쌓아야 할 경험치가 산더미다. 빙 돌아가더라도 틀림없이 언젠가는 더 노련해진다.
그래서 아직은 나이 먹는 게 재밌다. 미래의 나에게 뭔가 맡겨 놓은 듯해 불쑥 용기가 생긴다. 노련하다는 단어가 멋있다. 아무튼 파이팅! 오늘의 최고 레벨로서, 미래의 만렙을 위해 사사로운 경험치들로 가득한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