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12 오늘의 식사
초등학교 때였나, 아파트 베란다 창가에 주황색 위성 접시가 달렸다. 우리집 말고도 수많은 집들이 달았다. 밝은 대낮에, 누가누가 스카이라이프를 달았나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하나하나 세던 초등학생은, 고등학생이 되어 학원이나 독서실에 들렸다 집으로 향할 때 밤하늘에 보이는 별이 몇 개인가 세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 말고도 스카이라이프가 나의 어린시절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 지, 언젠가 이 브랜드도 다마고치와 함께 <응답하라 200X>를 대표하는 키 아이템으로 나오겠지 싶다. 영어 공부한다는 취지 하에 매일 3-5시간씩 디즈니 채널을 보며 린지 로한이나 힐러리 더프 등이 연기한 미국 스쿨 라이프를 선망해본 적도 있었고, 그 이후엔 온스타일에서 방영한 도전 슈퍼 모델, 프로젝트 런웨이를 보면서 해외에서의 삶을 꿈꿨다. (어렸을 때의 그 꿈이 작용한 건지, 지금 해외 생활을 하고 있으니 참 신기하기도 하지.) 유명인의 책을 읽고, 뉴스를 보고 글로벌 마인드를 꿈꾼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스카이라이프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feat. TV 중독자)
오늘따라 서두가 길었던 것은, 뒤에 나올 주제의 배경이기도 하고, 토요일이라고 오랜만에 잠 + 청소 + 밥 + 약간의 독서 뿐이 하지 않아 남은 시간은 브런치와 대화를 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지원 작가님의 책 <맥락을 팔아라>의 한 구절을 읽자마자 책을 덮고 노트북을 열었다.
아직 책을 읽는 중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이해한 작가님의 '맥락'은 분위기다. 상품으로 넘쳐나는 사회에서는 더 이상 '필요'에 의해서 상품을 사지 않는다. 그 상품을 구매할 때 느끼는 경험, 상품을 사용하면서 발견하는 재미 등이 소비의 큰 결정요인이다.
맛이 넘쳐나는 시대에 '맛'을 좌우하는 것은, 낯선 이들과 한 식탁에 앉아 먹었던 한 그릇의 요리, 가족과 함께 했던 평범한 밥상, 여행지에서 우연히 먹었던 길거리 음식처럼 그때의 상황과 맥락이다. 이것이 맛보다 맥락을 요리하는 마케터가 필요한 이유다.
- 양연주, <노희영 대표의 新식공간>, Essen 16년 2월호, <맥락을 팔아라> 에서 발췌함
다만, 과연 이것이 얼마나 '요즘'의 이야기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라고 칭하고 싶다. 왜냐하면 저 구절을 읽자마자, 2006년 스카이라이프를 통해 즐겨보던 올리브 TV의 <제이미's 키친>이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부분의 요리 프로그램들은 쉐프가 인사를 하고, 재료 소개를 친절하게 한 뒤, 하나하나 정확한 숫자로 이야기 한다. 재료를 어디서 사는지도 모르고, 쉐프가 맛있게 완성한 음식들은 결국 방송에 내보낼 접사 컷을 찍은 후에야 다 식은 채로 방송국 관계자들이 먹게 되겠구나 싶다.
물론, 소고기 200g에 간장 두큰술, 설탕 한큰술 같은 정보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고자 하는 니즈를 가진 시청자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정보일 수 있다. (당시 신혼이셨던 피아노 선생님께서, 우리가 피아노 연습을 하는 동안 요리프로그램을 보며 공책에 레시피를 하나하나 적던 게 생각난다.) 하지만 요리 프로그램이 '지금 당장 요리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보는 프로그램이어야 하는가? 어차피 대부분의 요리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찾아 만들 것이다.
제이미 올리버의 프로그램은 이미 2006년부터 '맥락'을 팔고 있었다. 매번 입에 침이 가득한 채로 말을 하며, 재료를 대충 다듬고, 부엌에 있는 남은 식재료를 쓰기도 하며, 때로는 본인의 레시피대로 하다가 맛을 보고는 급히 다른 재료를 추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음식들이 끌리는 이유는 '맥락; 음식을 하는 과정의 분위기, 음식을 누군가가 먹는 상황'을 자연스레 보여주며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친구들과의 파티 현장에서 맛없는 음식을 떠올릴 수 있는가. 행복하지 않았던 적이 있는가.)
나는 오늘 어떤 맥락에서 밥을 먹었는지 생각해본다. 배고픔에 이것저것 다 꺼내먹어놓고, 사진은 첫 끼였던 스크램블 에그 하나 뿐인 하루.
많이 먹고, 적게 기록하고 싶은 프로 다이어터의 맥락인가 싶기도!
내일은 맥락이 잘 드러나는 사진을 기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