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일상
내가 사는 아파트는 방음이 잘 되지 않는다.
13층에 사는대도 1층에서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다 들리고 윗집이 일주일에 몇 번이나 세탁기를 돌리는지도 알 수 있다. 다행히 소음에 많이 민감한 편이 아니어서, 이런저런 소음이 들리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큰 소리로 대화를 하는 소리였다. 지금 호치민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외출 금지인데, 저러다 잡혀갈라 하는 생각에 방 창문에서 1층 놀이터 쪽을 내려다보는데 아무도 없었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일까 궁금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맞은편 아파트 베란다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명의 남자아이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혹시나 친구가 내 얘기를 못 들을까 큰 소리로 외치며)
남자아이 1: OO아, 우리 집으로 놀러 올래??
남자아이 2: 응!! 근데 나 문제집 먼저 풀어야 돼!
남자아이 1: 알겠어! 대신 문제집 풀고 꼭 놀러 와야 해!
남자아이 2: 응!! 조금만 기다려~!
무미건조한 락다운 생활에 피식 미소 짓게 하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음이었다. 하긴 나 어렸을 땐 친구들이랑 약속 같은 거 안 해도 놀이터에 나가면 다 친구였다. 혼자 씩씩하게 놀이터에 가서 구름사다리도 하고, 그네도 타며 원래 아는 사이이던 아니던 내 눈앞에 있는 아이한테 자연스레 말도 걸고 그날 하루는 단짝 친구가 되어 놀곤 했다.
조금 더 크고 나서는 놀고 싶은 친구가 있으면 친구 집에 전화를 걸었다. 학교에서 전화 예절을 배웠기 때문에 친구 어머니나 다른 가족이 받으면 인사를 하고, 내가 누구인지를 밝힌 뒤 친구와 통화하고 싶다고 말을 했다. 난 목소리가 어릴 때부터 조금 허스키한 편이었는데, 내 남동생 친구들은 내가 전화를 받으면 나를 동생으로 착각하곤 했다. 그럼 일부러 남동생 인척 통화를 하기도 하고, 동생 친구가 할 말을 다 할 때까지 듣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사실은 난 누나라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지금은 기술이 발전해 친구와 얘기하기 위해 친구 가족들과 안부인사를 주고받지 않아도 된다. 카카오톡, 인스타그램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쉽고 빠르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 지금같이 해외에 나와 있고 집에만 갇혀 있는 생활을 하니 이러한 기술 발전은 내게 감사한 존재다. 지금 편리한 세상도 좋지만 가끔 어린 시절의 번거로움이 그립기도 하다.
오늘은 놀이터에 가면 누가 있을까 설레던 마음, 친구와 통화하기 전 친구 가족들과 주고받던 안부 인사, 동생인 척 동생 친구와 통화하기 등 맞은편 아파트 사는 아이들 덕분에 기분 좋은 추억거리를 떠올릴 수 있던 하루. 이 아이들은 종이컵 전화기에 대해 알고 있을까? 종이컵 전화기가 있다면 목 아프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편하게 베란다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텐데.
극심해진 코로나 덕분에 볼 수 있는 귀여운 아날로그 갬성 하나 더. 식약품 사러 일주일에 2번 외출할 수 있던 권리도 사라진 요즘, 호치민시는 군대를 동원해서 시민들을 위해 대신 쇼핑을 해주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 배달만 활성화시켰어도 사진 속 군인이 이렇게 당황할 일은 없었을 텐데, 여성용품 앞에서 어떤 걸 사야 할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베트남 군인 덕분에 또 한 번 웃었다. 한편으로는 한국 군인들에게 대신 장보는 일을 시켰으면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일이 처리됐을지 상상하며 또 웃었다.
아직도 별거 아닌 것들에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남아있어 안도감을 느끼며, 락다운이 끝나기 전 일상 속에서 또 어떤 것들이 나를 웃게 해 줄지 기대해본다.
Cover Photo by Chi Lok TSANG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