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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린 Jul 24. 2020

아라리아와 그늘

잿빛 털과 호박 빛 눈을 가진 고양이


 책상 옆 가지런히 놓여있는 아라리아를 보면 그늘이와의 첫 만남이 생각난다. 2018년 어느 가을날 마포구에 사는 다영의 집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입양되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워낙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키울 용기는 없고 주변에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마저 없었던 터라 흥분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호박 빛 눈을 한 고양이였다.



그늘아~ 신그늘! 그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의 털은 갓 연탄재 사이에서 꺼내 온 것 같은 폭신한 잿빛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늘이를 특별하게 해 주었던 건 어두운 털과 함께 병치되어있는 흰털들이다. 그늘이가 한쪽으로 길게 누우면 그 안에 있는 털들이 뚜렷하게 보였는데 아무렇게나 자란 털들을 지그시 쓰다듬으면 따듯한 흰색들이 선명해져 그늘이를 한층 더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다영이 찍은 그늘


 반려 동물 그늘이와 함께 다영의 방 한쪽 귀퉁이에는 내 키만 한 반려 식물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길게 쭈욱 뻗은 잎 사이로 톱니 같은 그물망이 촘촘히 엮여있는 모습. '아라리아'라는 미지의 식물을  접했을 때 독특한 곡률에 심취해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라리아의 줄기는 길게 누운 그늘이의 배처럼 짙은 고동색과 흰색이 불규칙적으로 흩어져있었다. 뾰족한 모서리는 흰 벽에 난을 치듯 제멋대로 뻗어있었고 조명이 만들어낸 가느다란 잎 그늘과 얽혀 한 폭의 동양화 같은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노을빛 조명으로 잔뜩 물든 그 사이를 노련하게 뛰어놀던 그늘이는 아라리아와 겹쳤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면서 황홀경을 만들었다. 아 나는 지금을 잊지 못하겠구나. 그늘의 등에 얼굴을 폭 기대어 보았다. 굳이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동물들은 느낄 수 있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어. 종종 나는 내 마음을 꺼내어 보여주고 싶은 충동이 든다.


내가 키우는 아라리아
독특한 줄기가 매력적이다
아라리아가 만든 패턴


 무엇이 부족했던 걸까 창 가까히 놓아도 보고 물도 주고, 노력과는 별개로 아라리아는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명을 다 했고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다영은 이듬해 부암동으로 이사를 갔다. 부암동 집은 채광 좋은 창이있는데 그 안에는 닿을듯한 하늘과 북악산이 담겨있었다. 그늘이는 액자같은 창틀에 앉아서 하염없이 밖을 보았고 그 모습은 보고있는 우리까지 행복하게 만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늘이는 여기까지다.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 지 한달 쯤 됐을까 다영에게 어떤 메세지와 사진을 받았다. 아라리아처럼 영문모른 채 다영의 그늘은 우리곁에서 떠나갔다. 다시 다영의 집에 방문했을 때 그늘이를 제외한 모든것이 그대로였다. 장난감부터 그림같은 창까지. 그늘이가 앉아있던 창틀에 반쯤 기대서 잠시 그늘이의 시선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늘의 흔적을 포함한 수 많은 헌 것들 사이에 유독 눈에 띈 새 것이 하나 있었다. 토베 얀손의 '여름의 책'. 책의 뒷면에는 본문의 일부가 쓰여 있었다. “가끔은 내가 이 고양이를 미워한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얘를 사랑할 힘이 없는데, 그래도 계속 얘 생각만 나.” 그늘이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그늘이에게 전해졌기를. 그늘이가 누군가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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