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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혜랑 Sep 09. 2022

왜 그렇게 많은 일을 하세요?

슈퍼N잡러로 살기

"안녕하세요, 스토리아티스트 박혜랑입니다. 이야기와 예술로 작업합니다. 제가 만든 결과물에 따라 배우, 성우, 기획자, 예술강사, 크리에이터, 도슨트, 그림책작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줄이고 줄여, 겨우 만든 내 소개. 직업 이름으로 나를 소개하고 싶진 않았는데 사람들에게 빠르고 명쾌하게 나를 이해시키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말 들은 비슷하다.


"와 정말 대단하세요. 그렇게 많은 일을 하시다니."
"재능이 많으시네요."
"N잡러로 사는 거 너무 멋져요"

사실 속 마음을 고백하자면 자기소개하는 게 부끄럽다. 직업이 뭐냐는 간단한 질문에도 하는 일이 많아서 많다고 사실대로 말하다 보면 말이 길어진다. 내 장황한 소개 때문에 상대방의 시간을 빼앗는 기분도 든다. 의도치 않게 너무 많은 정보를 상대방에게 한꺼번에 전달하게 된다. 마치 내 패를 모두 까고 시작하는 승부 같달까. 신비주의는 개나 줘 버려. 예전에 철이 없을 때는 많은 일을 하는 내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자기소개를 즐겼지만, 이젠 철이 들었는지 자기소개를 하다가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소개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은 철이 들면서 시작됐다. 그냥 SNS 주소를 알려줘 버리는 일도 많았다. 알아서 찾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여러 가지 일을 한다고 말하면 으레 돌아오는 말들은 칭찬과 찬양이다. 하지만 속내를 알고 보면 그렇게 좋은 일도 아니었는데.


원래 꿈은 많았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는 세 갈래 길에서 헤매고 있었다. 배우, 성우, 교사로서의 길. 셋은 비슷하면서도 각각 다른 역량을 사용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난 세 가지를 모두 해 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N잡의 개념도, 부캐의 개념도 없었다. 오직 '한 우물'만 파야하는 시대였다. 한 우물을 파지 않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독설은 "한 가지만 해! 넌 뭐 그렇게 집중을 못해!"였다. 당시 욕을 한 바가지는 먹었다. 지금에서야 시대가 바뀌어서 N잡하는 사람들이 다재다능하다고 칭찬받지,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똑같은데 돌아오는 말이 달라지는 게 웃기다. 역시 사람은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해. 한 10년만 일찍 이런 시대가 왔다면 욕을 좀 덜 먹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깝다. 원통하다.


실패한 원잡러.

배우, 성우, 교사 중 가장 먼저 돈벌이로서의 직업을 갖게 된 건 '배우'였다. 진입장벽이 셋 중 그나마 가장 낮았으므로. 또 뒤늦게 생긴 성우, 교사보다 먼저 생겼던 꿈이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배우라는 직업에서 중요한 요소는 '실력'보다 '이미지'였다. 배우가 팔색조의 직업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생산직이다. 배우로서 가장 잘 팔릴 수 있는 이미지를 골라 고착화시키고, 그 이미지로 캐스팅을 받고, 현장에서 원하는 연기를 뽑아내는 장인 같다고 해야 할까. 물론 그 이미지를 찾아내고, 인물을 만들어내고, 연기를 해내는 과정 안에는 엄청난 노력과 예술적인 감각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막상 연습실에서의 아카데믹한 연기와, 현장에서 원하는 현장용 연기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그 괴리를 견디질 못했다. 배우가 되면 내가 되고 싶은 인물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계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철저히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했다. 제작사가 원하는 이미지의 상품이 되어야 했고, 나는 그 이미지조차 모호해서 일자리가 없었다. 심지어 내 기질은 실연자보다는 창작자에 조금 더 가까웠고, 이런 환경을 견디질 못했다. 그래서 뛰쳐나왔다. 10년을 딱 채우고, 할거 다 해보고, 원 없이 노력한 후에 미련 없이 그만뒀다. 미련 없이라고 하기엔 요즘도 오디션 정보를 계속 보고 있지만. 한순간에 백수가 되어버린 나는 그때부터 부지런히 나를 팔아야 했다. 배우판에서 재고였던 나를 이 사회에서 어떻게 팔 수 있을까. 고민을 시작했다.


나를 팝니다.

우선 채널을 개설했다. 당시 유튜버 붐이 일었고, 나도 채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 연기'에,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동화구연'을 합쳐서 국내 최초 ASMR동화 채널, 자장가 동화 장르의 시초 '랑이언니의 잘자요 동화'채널을 만들었다. 유튜브가 아니고 네이버 오디오 클립에 만들었는데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한 달에 1000명씩 구독자가 늘었다. (물론 그 사이에 콘텐츠 표절과 도용으로 고통스러운 시간도 보냈지만, 그걸로 고통받을 간에 다른 일에 더 신경 쓰는 게 정신적으로 낫다는 결론을 냈다. 어차피 걔네들은 채널 안 닫아...) 내 기획력과 연기력을 동시에 인정받을 수 있는 결과물을 세상에 공개하자 일이 물밀 듯 까지는 아니지만 꽤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명배우였다면 꿈도 못 꿀 기업과 단체들과 함께 일을 했다. 쓸모없는 배우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게 눈물 나게 기뻤다. 무조건 최선을 다해, 성심성의껏 일했다. 그러자 동시에 점점 더 직업의 가짓수가 늘어났다. 기획자로, 예술강사로, 도슨트로, 그림책 작가로 활동범위가 넓어졌다. 내가 선택한 일은 크리에이터 단 하나였지만 남들이 만들어 준 직업들 덕분에 N잡러가 되었다.


모호한 정체성.

결과적으로 겉보기에 훌륭한 N잡러가 되어버렸고, 집중력이 약한 나에게는 이런 생활이 나름 잘 맞아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의도해서 N잡러가 되려 던 건 아니었는데,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부끄러웠다. 그냥 책임감이 많았을 뿐. 따지고 보면 실패한 원잡러인데. '타인이 만들어준 직업'이라는 건 인과관계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원래는 '저는 이런 꿈이 있고, 이런 일을 하고 싶어서 노력했어요. 그래서 이 직업을 갖게 됐어요.'라는 서사를 가져야 하는데, 나는 그런 서사가 없다. 정체성도 모호해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기도 쉽지 않다. 원래 브랜딩이라는 건 '단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시켜야 하는 작업인데, 나는 그걸 극도로 싫어한다. 한계를 짓는 것 같아서.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되는 게 싫어서 배우를 뛰쳐나왔는데 여기서도 그렇고 싶진 않다. 그냥 나는 나인데, 나는 뭘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계속 이어져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인스타그램 프로필을 바꿨다. 그런 내게 대학 동기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정체성이 모호한 게 정체성이야." 그 말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세상에 이런 사람도 한 명은 있어야지.


아티스트에서 엔터테이너로.

그렇지만 '앞으로의 나는 무엇으로 살 것인가'라는 주제는 꽤 중요해서, 내가 가려는 길은 계속 고민해보았다. 그동안 나는 나를 계속 '예술가'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예술가라고 하기엔 철학이 깊지 않았다. 다른 위대한 예술가들과 비교하면 부끄러울 정도였다. 나 자체도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고. 나는 그저 사람들이랑 많이 놀고 싶었고, 사람들과 만나는 접점을 늘리고 싶었다.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좋았고, 내가 만든 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그래서 하나둘씩 역량을 키웠던 게 N잡의 길로 나를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티스트가 아니라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었구나. 그것도 콘텐츠라는 수단으로. 정리가 끝나자 머리가 명쾌해졌다. 나는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다.


다시 브런치에 도전하기.

혼란스러운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게 명확해졌다. 목표가 정해지자 사사로운 것들은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속마음이 드러나는 게 부끄러워서 에세이 쓰는 게 두려웠다. 내 이야기를 피하자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 몇 번이나 브런치 글을 엎었다가 새로 썼다가 난리를 부렸다. (이 글이 97번째 글이니까 발행취소한 글이 96개는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생각정리가 끝나자마자 글이 쓰고 싶어졌다. 에세이를 너무 무겁게 생각한 건 아닐까. 그림책 출간을 하기 전에는 책을 내고 싶어서 글을 무겁게 썼다. 책을 내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 브런치로 책 안내도 돼...  그동안은 꼭 가르침과 교훈을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니 재미가 없었다. 애초에 뭘 가르쳐 줄 마음도 없었는데, 오버했다. 그냥 살다가 떠오른 얘기를 털어놓고 싶다. 비밀공간이지만 안 비밀공간인 여기서. 누가 뭐 얼마나 찾아오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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