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은 오전 내내 거나하게 잤다. 처음의 계획은 거나한 아침 잠이 아니었다.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을 때만 해도 일단 나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배가 차니 게으름 모드가 발동했고, 이미 들어선 게으름을 끌 스위치는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넙데데해진 위장처럼 나도 침대에 넙데데하게 누워 수면을 이어나갔다. 역시 저녁형 인간에게 아침잠이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법이다.
2차 수면을 마치고 체크아웃 연장까지 해가며 느지막이 광화문 거리로 나왔을 때는 여전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도 불고, 눈까지 내리니 봄의 초입에서 그대로 방향을 틀어 겨울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듯했다. 게다가 일요일이라 그런지 광화문 대로까지 휑하니 서울 동네바닥을 전세 낸 기분이었다.
다음 행선지는 청와대. 청와대가 궁금하다는 친구 의견에 미리 방문 예약을 해놓았다. 청와대 내부가 드라마 세트장에서 본 것과 똑닯았을지, 안에 어떤 구조로 되어있을지, 친구는 둘러보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다. 난 재작년에 이미 한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봤던 걸 다 기억하진 못해도 확실히 들었던 생각은 여기 한 번 들어오면 나가기는 싫겠다는 거였다. 임기를 꽉 채워도 아쉬울 판에 쫓겨나는 전직 대통령 몇몇은 통탄스럽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 무릇 사람은 나쁜 짓을 하고 살면 안 된다. 청와대 정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춘추관 입구를 지나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걸음이 괜히 느려졌다.
사실 이번 서울 여정을 계획하면서 꼭 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 주말까지만 청와대 춘추관에서 진행하는 국극 공연이었다. 포스터를 우연히 보자마자 예약을 했지만 대기 명단에 들어가게 됐다. 예약 가능성이라도 알고 싶어 문의 메일을 보내니 내 차례에 앞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어 신청이 어려울 거라는 답장을 수신한 터였다. 그렇지만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이 아니면 공연도 막을 내릴 테고, 언제 다시 청와대에서 국극 공연을 볼지는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눈발은 굵은 빗방울이 되어 아스팔트 바닥 곳곳에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그래도 물어나 볼까, 친구 옆구리를 쿡 찌르고 물으니 그럴까, 하는 답이 돌아온다. 물어나 보자, 조금 더 확신을 던지니 그러자, 하는 대답이다. 춘추관 입구에서 검표하는 안내 직원에게 주춤주춤 물었다. 혹시 현장 판매하는 티켓이 남아 있나요? 그랬더니 직원 분이 그러신다. 그럼요, 오늘 날씨가 궃어서 안 오신 분들이 많아서요!
국극은 선화 공주와 서동요의 이야기였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국극 형식으로 보니 새로운 감상이 일기도 했다. 먼저, 모든 배역을 여성 배우가 도맡아 한다는 국극 특성이 가장 돋보였다. 생물학적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체형이나 목소리로 배우들이 모두 여성인 것을 알 수는 있었다. 하지만 신기한 건 그들이 만들어내는 입체적인 극 중 인물 해석에 배우가 여성인 것보다도 극 중 인물의 특성이 더 돋보이게 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백제 왕자인 척하는 여성 배우가 아닌 서동요로 보이게 되는데 이러한 몰입의 과정조차 의식할 틈 없이 극이 전개된다.
미디어에서 주로 다루는 우리나라 시대극은 조선 시대에 많이 집중되어 있는데 신라와 백제의 이야기인 선화 공주 국극은 신라 복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웠다. 등장인물이 제한적임에도 각각 인물의 역할과 산분이 다르다 보니 의상도 다양하고, 신라 귀족의 의복은 색감과 장신구가 모두 화려해 구경하는 재미도 컸다.
국극은 우리 문화의 고유 장르인데도 낯설게 느껴졌다. 여태 모르고 있다 스치듯 본 드라마 정년이를 통해 처음 들어본 장르였다. 국극은 쉽게 풀어 말하면 우리나라식 뮤지컬로 이해하면 되겠다. 극을 소화하는 연기력은 물론이요, 대사는 자연스럽게 창과 무용으로 이어져 극이 전개된다. 국극에 종사하는 배우들이 적은 이유로 이번 선화 공주 극에 오른 배우들은 대다수가 4, 50대의 중견 배우라고 많게는 여든 세가 넘는 배우들도 계셨다. 원로 배우들은 국극의 첫 시작을 함께한 세대인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적은 인원으로도 연기, 창과 무용을 동시에 해내며 무대를 꽉 채우는 배우들의 능력치가 대단해 보였다. 정말이지 우리가 나서서 내세울만한 종합 예술 장르인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진면모를 알아봐 주면 좋을 텐데 국극이 올려지는 공연장이 많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었다. 국극을 세우는 공연장이 많아진다면 더 많은 관객이 발걸음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신문 기사(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69290.html#ace04ou)에 따르면 정년이 방영 이후로 여성국극의 인기와 수요가 높아져 여성국극제작소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극을 세우고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고 한다. 맥이 끊기지 않고 쭉 이어져 우리나라 고유의 것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청와대 구경을 마저 하고 저녁은 인사동애서 마무리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낯선 곳에서 낯익은 곳으로의 회귀였다. 희한하게도 늘 서 있는 서울 하늘 아래인데도 외국을 온 것만 같았다. 오히려 이보다 더 서울스러울 수 없는 서울 여행이었기에 이질감이 들었을는지도 모른다. 익숙하니 살필 생각이 자주 안 들 뿐이지, 익숙한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점이 보이기 마련이니 말이다. 평소 내가 무심코 지나쳐 온 서울의 면을 보았다. 그러면서 바다 건너온 여행객이 된 마냥 서울 바닥 요목조목을 뜯어 살피고, 골목마다 줄지어 선 상점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요새 우린 늘 새로운 걸 쫓고, 하지 않은 걸 하려고 한다. 하지만 보지 못한 것, 겪지 않은 걸 바삐 쫓아다닐 필요가 없다. 결국 옛 것이야말로 새로운 것이다. 수백 년 살아낸 한양 길바닥은 그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몽글몽글 피어오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