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해린 Feb 01. 2022

여름방학을 열음


강원도 양양. 뭔가 이름부터 멀고도 낯선 곳이었다. 제주도에서 서핑을 두어시간 동생과 배운 것이 내 마음 속에 불을 지핀 것이었다. 뭔가 다음번에는 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사실 상 나도 의지만 가지면 서퍼 꿈나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허황된 꿈. 10월은 사실 굉장히 바쁜 달이었다. 학교 예술제 일정과 맞아떨어져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주중에다가 몇 개의 콘서트 약속들로 주말까지 반납하는 나날들이었다. 게다가 교육청 공개수업까지 신청해버린 마당에 양양은 무슨. 꼬북칩 한 봉지 사러 집 앞 나가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양양행 표를 끊고야 말았다. 왜 그랬지 정말.
 
 
양양은 이름부터 남달랐다. 왜 하필이면 양양일까? 한국지리에 문외한인 내가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똑같은 글자가 두 번 반복되는 지명은 없단 말이다. 게다가 어감도 동글동글. ‘이응’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지명이 아닐까. 저녁 8시가 다되어 무슨 해변이더라, 택시를 타고 우리 게스트 하우스가 있는 곳에서 내렸다. 불빛이 많이 없는 곳이어서 그런지 어둠에 물들어 도무지 어디까지가 건물이고 풍경인지 그 경계선마저 흐릿했다. 대강 짐을 풀어 던지고 저녁거리를 찾아 나섰다. 거리 온 천지가 식당가였는데 다 문을 닫은 것이 이상했다. 세 번째 식당이 우릴 꺼진 불로 맞이하자 참지 못하고 안에 계신 분께 여쭤보았다. 여기 열려있는 식당은 없나요? 소파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한 남자가 말했다. 아, 그거 내일 서핑 대회가 열려서 다들 준비하느라 그런 걸 거예요. 네? 서핑대회요? 갑자기요? 그랬다. 양양에서는 1박2일 간 서핑 대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재연이는 계획형 인간이고 나는 아니다. 그래서 매번 여행을 갈 때마다 굼지럭대는 나와는 다르게 빠릿빠릿 모든 걸 다 챙기는 재연이는 사실 상 베스트 여행 커플은 아니다. 그건 누가봐도 분명한 현실이다. 하지만 정반대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과잠 시절부터 재연이랑 같이 하는 건 이상하게 다 777을 맞췄다. 이번 1박2일만해도 양양가는 버스가 마침 두 자리가 남았다든지, 사실 그 주말이 양양 서핑대회가 있었다든지. 재린 효과는 정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날 저녁은 삼겹살이었다. 글쎄, 선택권이 없었다. 우리가 삼겹살을 택한 게 아니라 삼겹살에게 우리가 선택당한 거라고 말해야 더 옳을 것이다. 삼겹살 집에는 술에 꽤나 절으신 아저씨 두 분과 한 쌍의 커플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커플은 전형적으로 ‘양양人’임을 뽐내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여기서 ‘양양인’이란 물론 양양에 거주하거나 어느 방향으로든 양양 바이브를 뿜는 사람이다. 물론 일반화는 위험한 것이지만 양양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일조한 양양 피플들에게 악감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되려 부러움의 눈으로 관찰했을 뿐이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양양피플들과 나는 단 하나의 공통점도 나누지 않기에 내면적인 관찰은 할 수가 없었다. 순전히 외관만 따진 양양인 겉핥기에 그쳤을 뿐이다. 그럼 ‘양양인’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나열해보겠다.
-후리스나 집엎 후드, 타이즈 등과 같은 스포티한 옷을 입는다. 스포츠를 좋아하거나 스포츠 분야에 종사하거나 등등의 이유에서가 아닐까.
-피부가 까맣다. 약간 까만 정도가 되돌아올 수 없는 그런 류인데, 대한민국 일조량은 다 양양이 가져가는 건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개를 키운다. 큰 개. 아니면 애완동물 친화적이다. 너무 커서 식겁했다. 듣기로는 그런 개들이 오히려 더 순하다던데.
-친절하다. 진짜로 친절하다. 사람하고 부딪히는게 아니라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걸 지향하시나보다.
-뭔가, 그냥. 속세와 떨어진 삶을 사는 듯하다. 자본주의 사회에 정형화된 틀이 있다면 그 틀을 벗어나지는 않아도 그 경계선에 발을 걸쳐 사는 느낌이다. 아예 바깥에 서 있다면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에 등장해야 하는 정도겠지?
-전체적으로 바라봤을 때 직선보다는 곡선이, 구두보다는 맨발이, 파스텔톤보다는 원색이, 구슬픈 발라드보다는 띵똥거리는 시원한 음악이 먼저 떠오른다.
뭐, 내가 봤을 때는 그렇게 보인다는 거다.
  
9시에 수트를 입고 나섰다. 역시나 지상에서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바다에 나가서도 어려울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리고 실제로 처음부터 고꾸라졌다. 여기서 내 딜레마가 등장한다. 재연이한테도 말했지만 항상 내 ‘문제’는 그거다. 잘 해내지 못할 거라고 미리 예상을 하고, 그 예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확신이 되어버린다는 것. 근데 그게 진짜로 문제인가? 그렇다고 내가 엄청난 좌절감과 절망을 겪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 다만,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턱 없이 낮아진다는 점. 그게 단점인지 장점인지는 잘 모르겠다. 꼭 그걸 단점으로 집어서 고쳐야만 할까? 글쎄, 애매하다. 과한 욕심 부리지 않아 괴로워하지 않게 된다는 건 나쁘지 않다. 그런데 스스로 즐거움을 앗아버린다는 건 아쉽기도 하다. 세네번은 넘어지고 자빠지고 메다꽂히고. 재연이는 마치 내가 넘어질 걸 ‘예상하거나’ 혹은 ‘계획한’ 사람처럼 코를 막고 고꾸라진다고 했다. 나는 그냥 실패에 대비하는 현명한 사람일까 아니면 실패를 작정하는 바보같은 사람일까? 아니면 굳이 나눌 필요도 없이 단순히 서핑을 못하는 사람일까? 히히.
  
한 없이 넘어지기만 하다가 두어번을 일어설 수 있었다.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등 떠밀어주는 파도의 힘을 3초 정도 느끼면 어느 샌가 바다에 빠져있다. 우리들 뒤로는 자유서핑을 하는 사람들이 수목원 나무들처럼 열을 지어 둥둥 떠있었다. 어떤 파도들은 아쉬운 눈으로 보내기도 하고, 부서지는 파도들의 날을 가르기도 했다. 그 수많은 파도들이 그렇게 서퍼들을 태워주기도 하고, 애태우기도 하며 모래사장으로 밀려들어왔다. 정말이지 서퍼들은 ‘기다림의 미학’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자꾸만 나자빠지는 여러 이유들 중 하나는 충분히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퍼들은 기다릴 줄 알았다. 본인이 잡을 파도를 기다리고, 보드 위에 몸을 일으킬 순간을 기다리고, 파도가 옆구리를 가를 시간을 기다리고. 바다가 사람을 기다려주지는 않기 때문에 서퍼들은 바다의 모든 기척들을 숨죽여 기다리나보다.
  
돌아오는 길의 삼분의 이는 자느라 기억도 없다. 서울에 진입하고 본격적으로 정체된 구간에 갇혀서야 서울이다, 서울이야 싶었다. 1박2일동안 잠시 벗어났을 뿐인데 이렇게 오랜만에 마주한 것만 같은 느낌은 뭐지. 한강을 끼고 잠실로 들어서자 빌딩들이 곳곳에서 하늘을 찔렀다. 빌딩 유리창에 비친 빛들이 물결을 이루며 반짝거렸다. 넘실대는 도시의 파도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할머니의 방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