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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Dec 27. 2021

할머니의 방문

어느 아침, K가 편지 봉투 한 장을 줬다.

“이게 뭐야? 혹시, 러브레터…?”

3학년은 의사 전달의 방법 중 편지를 주요 수단으로 삼는 경우도 있어서 갈등이나 문제 상황을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 없을 경우 편지로 의사소통을 이어 나가는 경우도 자주 있다.

때문에 종종 담임교사를 향한 애정을 편지로 전달하는 친구들도 있고, 친구들끼리도 쉬는 시간에 대판 싸우다가도 점심시간에 서로 수줍게 편지를 건네며 사과를 주고받기도 한다.

하지만 K가 들고 있던 편지는 그런 류의 편지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가 드리래요.”

역시 그럴 K가 아니었다.

편지의 발신인은 K의 할머니, 수신인은 담임교사인 나였다.

가로 5센티, 세로 10센티가 될범직한 앙증맞은 편지는 캐릭터 스티커로 봉해져 있었다.

어떤 연유로 편지를 쓰게 되었는가, 할머니의 정갈한 손 글씨는 자못 호기심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주머니 깊숙이 편지를 집어넣으며 겉 봉투 안에 어떤 글이 적혀 있을지 빠르게 추측해 보았다.

K가 느닷없이 준 편지를 개봉했을 때는 이미 2교시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과학 전담 시간이어서 연구실에 배움 공책과 독서록이 한가득 쌓인 바구니를 들고 와 있던 차였다.

배움 공책에 세 줄씩 댓글을 달고, 독서록의 인상 깊은 부분에 밑줄을 긋다 보니 두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던 것이다.

아, 미니 오예스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뻔했는데.

늘 즐길 뻔한 쉬는 시간이 과제 검사 시간으로 전락하던 그 시점에 K의 편지가 생각났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편지 봉투를 다시 꺼내보았다.

스티커를 떼고 안의 세로로 길게 접어 넣은 편지지를 펼쳐보는데 예상외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편지지에 적힌 숫자 11개를 핸드폰 액정에 찍어 눌렀다.

K의 할머니 목소리는 고왔다.

K가 지금 3학년이고 오빠도 있으니까 엄마 아빠는 40대쯤일 거고, 그러면 할머니는 일흔의 나이는 되시지 않았을까?

멀리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모래를 체어 받쳐 거르고 걸러 끝까지 남은 가장 고운 입자들을 남겨 손안에 닿을 촉감처럼 귀를 타고 들어왔다.

할머님, 어쩐 일이세요?”

전화보다는 학교에 가서 얘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요.”

K의 할머니는 알쏭달쏭한 편지를 남겨 놓고, 전화로도 그 이상의 힌트를 주지 않았다.

K에게 어떤 일이 생긴 걸까, 혹시 K의 가족에 우려되는 일이 벌어지기라도 했을까.

갖은 생각이 일었지만 궁금증이나 피어오르는 불안을 해소하려면 얼른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바로 그날 오후에 만나 뵙기로 했다.

3시에 시간이 되시냐 물었더니 할머니는 알겠다고 했다.


성적표를 입력하는 중이었다.

국어, 수학, 사회,… 는 다 입력했고.

남은 건 체육인데, 오늘 끝까지 채우고 갈 수 있으려나,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인사 위원회 회의 끝나면 또 결과가… 생각을 거듭 수정하며 하루 일과를 세우고 있었는데 똑똑똑, 중간에 같은 쉼을 두고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할머니는 키가 크셨다.

그래서 K가 키가 큰 건가.

할머니에게 자리를 권하며 그 생각을 잠깐 동안 하고, 자리 잡은 뒤는 어떤 이야기를 꺼내실지 조마조마한 마음이 일었다.

우리 K, 학교 잘 다니고 있는지 궁금해서 와봤어요.”

K의 할머니는 K에 대한 어마어마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셨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적인 장소인지라 정성껏 숨기려고 하셨으나 철저하게 실패하셨다.

K의 할머니가 지난 며칠을 고민하고 끝내 학교를 방문해야겠다는 결심을 서게 한 것은 4학년이 올라가기 직전 K에게 부당한 별명이 붙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평소 활달하고 의욕이 충만한 K는 가끔 그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주변 친구들의 등짝을 철썩철썩 때리거나 등에 달린 모자를 질질 끄는 행동, 혹은 친구의 머리채를 서슴없이 잡는 행동으로 친구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을 드러내고는 했다.

남자 친구들과 노는 경우에는 K를 비롯해 다른 몇몇 여자 친구들이 교실 안이나 복도를 빙글빙글 돌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이 경우에는 남자 친구들이 먼저 여자 친구들을 도발하거나 약 올리는 경우가 왕왕 발생했는데, 이는 남자 친구들 또한 필수 불가적으로 벌어질 추격전을 못내 기대하는 특수한 인과 관계가 숨겨져 있기는 했다.

그럼에도 K는 다른 여자 친구들에 비해서 조금은 더 과열된 행동을 보인 바가 있었기에 K 자체보다는 K의 이러한 행동 양상이 내 레이더 망에 들어 약 한 달여간의 교정 작업에 착수해 현재는 그런 행동을 많이 다듬기는 했다.

이러한 교정 과정에는 학부모님과의 학기 초 상담으로 시작해 그 이후에도 쭉 이어진 가정에서의 원만한 협조가 있기도 했으니 할머님과의 상담에도 이 과정에 대해 상세히 말씀드릴 수 있었다.

K는 문제가 없었다. K는 그저 친구들을 아주 많이 사랑했을 뿐이다, 과격하게.

K의 할머니는 다른 시각을 가진 듯했다.

어려서부터 사랑으로 길러내고, 사랑을 먹이고, 사랑으로 보듬어온 끔찍하게도 사랑스러운 이 K가 학급의 조폭 마누라로 등극했다는 사실이 참으로도 안타깝고 믿기 어려운 현실인 것이었다.

심지어 그 와중에 남자 친구들 중 몇이 말의 무게를 재지 않고 K에게 불러선 안될 무례한 말들을 붙여 놀려댄 것은 크나큰 실수이자 할머님에게는 상처였다.

제가 그 부분은 아이들의 언행이 어긋나지 않도록 잘 주시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제 앞에서는 그런 말들을 입에 올리지는 않으니 제가 놓쳤나 봐요.”

피를 부르는 주먹, 메두사, 깡패 등등. 아이들이 유행처럼 만들어내고는 하는 별명들은 할머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더군다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탄생부터 지켜봐 왔던 나의 K이거늘…!

할머니의 상심은 얼굴에 그늘로 드리워져 있었고 이를 지켜본 내 마음도 영 편치 않았다.

단순히 이번 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K에게 펼쳐질 다사다난한 학교와 교실의 나날들에서 할머니가 얼마나 또 많은 상심과 시련의 밤을 보내셔야 할지 무심코 떠올린 질문에 수도 없는 가상의 사건들과 가능성이 부풀어 오르며 내 심경마저 복잡해지는 것이었다.

주제는 옮겨가 K가 수학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소식으로 이어졌다.

곱셈과 나눗셈에 이어 분수 단원에 결국 뒷걸음질치고 말았다는 할머님의 낯빛은 어둑했다.

“하지만 할머님, 수학은 이제 시작이에요. 얼러서, 달래서, 안되면 혼내서라도 같이 끌고 가주셔야 됩니다.”

하루에 10문제라도 풀자, 하면서 겨우 해나가고 있는데 K가 내일 할게, 내일, 이러는 거예요 매번. 언제 한 번은 제가 내일, 내일, 이러다 죽으면 말짱 헛것 아니냐 하니까 애가 웃더라고요.”

K의 할머니는 마음에 떠오른 장면이 있었는지 싱긋 웃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마스크 위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살집이 오동통했다.


할머님, 잘 오셨어요. 며칠 근심하셨던 거 다 내려놓으시고 가볍게 가셔요.”

계속 걸려오는 교실 전화에 할머님께서 부담스러우셨는지 그만 의자를 닫고 일어섰다.

할머니는 고개를 거듭 숙이셨다. 우리 K 잘 부탁합니다, 하고.

교실 앞문으로 나가는 할머니의  발은 양말 차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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