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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Nov 18. 2021

잼민이 보다 먼, 초딩보다는 가까운

아이들의 학년 특성을 파악하기는 아무래도 반년보다는 시간이 더 필요한가 보다.

요플레 뚜껑도 못 따는 1학년에서부터 나름 교칙을 준수하고자 하는 2학년, 급속도로 성장하는 5학년과 매너리즘에 빠진 6학년까지 맡아보았다.

저학년 군과 고학년 군을 해를 걸러 오가는 와중에 중학년 군인 3, 4학년만 쏙 빼놓고 학교 생활을 이어온 셈이다.

복직을 3학년 담임으로 배정받고선 학년에 대한 걱정은 덜 했다.

극단적으로 1학년이나 6학년이었으면 몰라도 오히려 중간에 낀 3학년은 특별난 게 있나 싶어서기도 했고, 행정적인 업무 처리로 봐도 1, 6학년이 아니고서는 연말에 더 치러야 할 내년도 입학 준비, 졸업, 중입 원서 같은 굵직한 행사나 학년 일정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2학기 교체 담임으로 들어가는 것은 처음인지라 그 점은 조금 우려가 되었고, 부수적으로는 담임 역할에 따라오는 부담감이었지만 그걸 제하 고선 3학년 타이틀을 걸고 오는 고민은 없었다.

대부분의 교직에 계신 분들이 3-4학년은 마냥 예쁘기만 하다, 아직은 군기가 바짝 들어있다, 중학년은 보석 같다는 이야기들은 이미 다른 학년들에 있으면서도 익히 들어왔다.

무엇이 3-4학년 아이들을 우상시하게 만드는가, 나는 궁금했다.

그 나잇대 아이들의 어떤 특성이 어른들을 미치게 만드는가.

아이돌로 치자면 까와 빠가 엇비슷한 비율로 공존한다는 1학년과 6학년에 비해 3-4학년은 대중성을 휘어잡은 것인데 과연 초딩101에서 살아남은 중학년의 비밀은 어디에 있었을까.


9월부터 11월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지금까지 총 3개월 남짓한 시간을 3학년 2반에서 보냈다.

다음 주나 되어서야 전면 등교를 시작하니 사실상 아이들과는 일주일에 3번밖에 만나지 못했으니 전면 등교 일수로 생각하자면 교실 수업을 같이 한지는 두 달을 겨우 채우는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이제는 단축수업 시간표로만 학사 일정을 운영해 정상 수업 시정표보다 40분이나 일찍 끝나기도 한다.

이래나 저래나, 코로나로 교실에서 부대끼며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훨씬 줄어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학년은 3학년이라서 교실에서 보내는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응축된 에너지를 발산하고 간다.

6교시가 끝나고 나면 교실 바닥에 흩날리는 쓰레기들로 역으로 추적해 그날 하루 교과목 시간표를 작성할 수 있다.

단축 시간으로 점심시간은 급식실에서 교실로 돌아오면 고작 십여분 밖에 남지 않는데 일분일초를 열정을 쏟아 보내니 그 틈바구니에서 부상자가 발생하고,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싸움이 일어나면 반드시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소환해 진상조사를 벌여야 하는데 왜 또 그렇게 관심들은 많은지 누구누구 나와라 이름만 불러도 본인 이름 불린 마냥 우르르 몰려나오는 것이 볼만한 광경이다.

덕분에 누구 이름 부를 때마다 1:17 다이다이를 뜨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데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고 몰려든 애 중 하나한테 물어봤더니 내가 애들 이름을 부르면 구경하는 게 재밌단다.

아무래도 불려진 이름이 네가 아니었으니까 너는 재밌을 법도 하지.

체육 시간에는 몸을 내던진다.

체력은 이미 고갈되었는데 정신력으로 치열한 사투를 마지막까지 벌인다.

본인들 몸은 가벼운데 비해 신체를 조절한 능력은 부족하니 허구한 날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거나 희한한 자세로 고꾸라진다.

그런데 또 빨딱빨딱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나 달리는 것이 체육시간만큼은 불사신에 다들 빙의하는 모양이다.

반면, 며칠 전 신체검사를 했는데 의외로 과체중이나 비만 범위에 서있는 아이들이 다른 해보다 많이 나왔다.

코로나로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이들이 움직일 시간이 부족했는 건 보나 마나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안 그래도 일주일 교과 중 두 번 들었을까 말까 한 체육에 이렇게나 목숨을 거는 애들을 보면 참 짠한 일이다.

지금쯤 됐으면 스포츠 클럽 17시간을 채운다고 점심시간이고 중간 놀이시간이고 줄넘기 쥐고 내보내야 맞는 수순이거늘 노상 교실 안에서 갇혀있으니 안타깝기도 하다.

이제 날씨도 추워지는데 등굣길에 운동장이나 한 바퀴 두르고 교실 올라오라고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3학년은 실속이 없다.

아이들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멋진 결과를 바라고 과제에 임하지 않는다.

과제에 임하는 이유는 거진 선생님이 시켜서, 엄마가 시켜서.

굉장히 보잘것없는 동기에 비해 결과는 때로는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한다.

물론 아닐 때가 대다수다.

미술 작품 경우에는 특출 나게 잘하거나 좋아해서 평소에도 많이 접하는 아이들이 아니고서야 뛰어난 작품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하라면 계속한다.

좋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해야 되니까 한다.

어른들은 결과가 빤히 보이거나 안 좋은 성과가 거두어질걸 알면 미리 발을 빼는 반면 아이들은 불에 뛰어드는 나방이다.

그 모습은 부럽기도 하다.

실패를 예상하고도, 실패를 목전에 두면서도 멈추지 않는 모습이 어쩔 때는 축복처럼 느껴진다.

그 뒤에 또 다른 도전의 기회가 기다릴 것이고, 실패해도 격려와 응원이 어디에선가 들려올 것을 아는 아이들의 뒷모습에는 쓸쓸한 패배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는다.

앞뒤 안재고 일단 하고 보는 아이들도 있지만 타고난 성향과 천성 탓에 다른 친구들보다 한 두 발짝 더 떨어져 머뭇거리며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이 머뭇거림의 시간이 짧아지는데 3학년은 나름의 고민을 해야 하고, 머릿속에 잘 돌아가지 않는 계산기도 몇 번 두들겨 보아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경험치가 충분히 쌓이지 않아 미지의 세계에 제 발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반감이다.

한 번 뚫고 나면 두 번째, 세 번째 밟는 길들이 더 쉬워질 것을 나는 알지만 이 친구들은 모른다.

그러니까 가끔씩은 그 원칙을 나만 아는 경우도 있고, 거기서부터 답답함과 속 터짐의 환장하는 콜라보가 펼쳐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언제 한 번은 김치볶음밥이 나오는 날 어떤 애가 나한테 밥을 안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왜?”

“저는 못 먹어요.”

“안 먹는 거야, 못 먹는 거야?”

정곡을 찔렸는지 머쓱한 웃음만 짓고 만다.

회심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필살기를 썼다.

“근데 저기에 고기 엄청 많이 들어가 있는 거 알지. 그래서 오늘 반찬에 고기가 없는 거야, 김치볶음밥 안에 다 잘게 다져서 넣었거든.”

유혹의 미끼를 던졌다.

과연 그는 탐스러운 미끼를 물 것인가.

급식실에서 나가는 길에 보니 그의 급식판은 남김없이 비워져 있었다.

김치볶음밥의 세계에 입문한 것을 환영한다 친구야.


초등학생을 잼민이라고 한다 그런다.

애들 특유의 응, 아니야스러운 초딩적 모먼트는 1학년부터 다양한 말과 행동으로 빛나는 졸업장을 가슴팍에 맞대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상호 존중하라는 도덕 시간 배움을 위해 일주일 동안 서로 존댓말 하기를 실천해보쟀더니 싸움이 난 둘 사이에 너는 귀가 먹었어요? 너는 그럼 머리가 비었어요? 하고 있는 애들의 모습을 보면 어지간히도 초딩스럽다.

거기서 나아가 유튜브 댓글이나 sns 플랫폼들을 보면 초등학생을 통칭하는 비하 단어가 잼민이가 되었다는 것에 깊은 유감을 느낀다.

잼민이로 특정되는 특유의 언어 구사력과 행동이 있다지만 가끔씩 낮잡아 보는 말로 쓰일 때 우리 반 귀엽고 똘똘한 잼민이들이 생각나면서 왜 또 이런 단어까지 만들어졌지, 묘한 호기심마저 인다.

정작 아이들, 특히 3학년 아이들은 초등학생이나 학생이라는 말에 가슴 깊은 울림과 가슴이 웅장 해지는 쾌감을 맛보는 것 같다.

이런 아이들에게 초딩이라니, 잼민이라니. 모욕이 아닐 수 없다.

잼민이 보다 먼, 초딩보다 가까운 이 아이들에게 행복한 초등학교 생활이 이어져나가기를.

얽히고설킨 학교 정글 속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영예로운 졸업을 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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