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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Jun 30. 2021

포르투갈 견문록 02 Carcavelos

가장 차가운 물과 가장 뜨거운 햇볕의 온도 사이

점심쯤만 되어도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훅 무더운 기운을 끼쳐오는 요새 이곳 리스본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쉬는 날이면 해변 찾아 삼만리다.

국토의 한 면이 통째로 바다를 끼고 있는 포르투갈은 어디에 살고 있든 간에 해변을 찾는 것은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도 쉬운 일인지 모른다.

더 나아가서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만 허락한다면 해안가를 위로 혹은 아래로 끼고 달리며 나타나는 해변마다 정차하며 국토를 종단하는 여행을 하는 사람들도 여름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제 기말고사도 거진 다 마무리하는 시점에 왔겠다, 슬슬 수영복을 챙겨 해변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참이었다.

스페인에서 공부하다 포르투갈로 교환학기를 마무리하던 친구 마르타가 한가로운 평일 날 연락을 해왔다.

며칠 뒤에 스페인에서 올라온 친구랑 가까운 해변가를 가는데 함께 가고 싶으면 주저하지 말고 메시지하라는 것이다.

주저할 게 뭐 있어, 지금 당장이라도 가지, 하는 마음으로 키패드를 잽싸게 놀렸다.

자음과 모음을 오가며 어디로 갈 거야, 언제 가는 거야, 어느 기차역으로 가면 돼, 뭐 챙겨갈 거야, 질문을 쏟아내는 나의 엄지 손가락 끝에 채팅창에 파란 메시지 창이 불쑥불쑥 물웅덩이처럼 고인다.

목적지는 carcavelos, 리스본 기차역에서 30분 기차를 타면 나오는 곳이다.

역에서 10분만 걸으면 바로 해변이 코 앞인 곳이라 주말이면 모래알보다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그곳, 그래서 우린 주중에 가기로 결정하고 메신저 대화를 마무리했다.

해변 가는 날 아침에 학기 마지막 수업을 들어야 했어서 굳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어야 했지만 두 시간 꾹 참고 버티고 우버를 불러 총알처럼 기차역으로 날아갔다.

기차표는 따로 살 필요 없이 교통카드 찍고 역내로 들어섰다.

포르투갈어 수업 시간에 만난 친구들 두 명도 더 간다고 뒤늦게 합류해 인원은 총 다섯 명의 그런저런 규모가 있는 한 나절 여행의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좌석에 앉고 십여분을 내 옆자리 그레타와 수다를 떨며 근황을 주고받다 보니 열차 문이 닫히고 바퀴가 쇳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다섯 정거장을 지나치면 목적지인 해변에 도착하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해안가가 외곽도로를 끼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 멀리 언저리로 보이는 해안가였지만 햇살이 강한 탓에 수면 위에 부딪혀 반사된 빛의 물결이 사선을 따라 반짝거리며 그려지는 게 보였다.


기차역에서 내린 뒤에 십 분을 더 걷고 나니 바로 해수욕장이 나왔지만 우린 사람이 없는 구역에 비치타월을 깔기 위해 조금만 더 모래사장을 따라 걷기로 했다.

처음의 목표와는 다르게 얼마 가지 않아 타월을 깔게 된 연유는 따끈하게 달구어진 모래가 점점 더 발바닥을 데우다 못해 데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정오를 막 지난 시간이었는데도 뜨끈하게 올라오는 모래밭의 열기를 감당하기 어려워졌을쯤 자연스레 느려진 발걸음과 동시에 우린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친구들과 바로 그 자리에서 탈의를 했는데 어차피 집으로 바로 와서 씻으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수영복도 미리 안에 갖춰 입고 집을 나섰기 때문이었다.

사실 찰나의 귀찮음을 이기지 못해 한 선택이었지만 뒤돌아 보건대 정말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 모래사장에서 탈의실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고, 탈의실이나 샤워시설이 있다고 한들 거기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과 에너지 소모를 생각하면 미리 채비를 해온 것이 백 번은 잘한 일이었다.

수영복 차림이 되었어도 남은 거사가 있었으니 그것은 절대 간과해선 안될 선크림을 바르는 일이었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바닥에 무지막지한 양의 선크림을 짜내어 철퍽거리는 생생한 효과음과 함께 몸에 뭉개어 바르고 서로 등을 내주며 어느 한 군데 빠지는 곳 없이 구석구석 챙겼다.

햇볕이 따사롭다 못해 뜨끈하게 머리 위를 지지는 듯한 느낌에 우린 곧이어 해변에 입수하기로 했다.

파도가 밀려들어 적신 모랫가는 앞서 걸어온 모래사장과는 다르게 밀려드는 물을 맞으며 천천히 식어 모래 알갱이들이 한데 낮은 온도를 머금고 있었다.

그 모래를 다시 더 멀리 떠밀어 모래사장으로 올리는 파도는 그 온도가 지상과는 비할 데가 없이 차가웠다.

발 끝만 조금 담가 수온을 확인했을 뿐인데 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냉기가 아찔할 정도였다.

바깥은 여름, 파도만 넘실대며 겨울의 냉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이전에 친구로부터 포르투갈 해안가는 대서양에서 머금고 올라오는 차가운 물이 순환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지중해 해변과는 다르게 그 수온이 매우 낮은 것이 특징이라고 교과서적인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바깥 기온은 그렇게나 덥고 가만히 서있어도 피부가 벌겋게 익을 지경인데 바닷물과의 간극이 이렇게나 크다는 것을 이제야 체감하는 바지만 머릿속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발자국 나가면서 바닷물이 점점 더 위로 올라오자 정말이지 입 안을 꽉 깨물었음에도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해안가에 발을 디디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데시벨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으므로 모두가 나누고 공감하는 고통이었음을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우리는 얼른 수영을 해서 몸에 열을 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돌연 비장한 각오를 던지며 물 깊숙이 몸을 내던진 친구를 필두로 전투태세를 갖추며 앞을 향해 전진했다.

누구 한 명 낙오되는 친구가 없도록 친절하게 내 수영복 끈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가 준 친구들에게 한없이 고마움을 표하는 바다.

이는 친구들의 요란한 고문 집행 덕분에 온 몸에 닭살이 돋는 육체의 괴로움을 맛보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을 계기로 하여금 물놀이의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정신적 성장을 한 차례 할 수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장구를 치고, 해파리처럼 하릴없이 둥둥 떠있다가, 엎치락뒤치락 친구랑 질주하듯 수영을 해보기도 하고, 정말이지 물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동적 움직임을 하나씩 또 연결 지어 다 해보았음에도 수온은 도저히 적응할 수 없을 만큼 차가웠다.

이내, 입술이 파리해지고 손 끝이 떨리기 시작하고서야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이 슬며시 들 쯤이 되어서야 우린 조금은 햇볕의 기운을 받아야 함을 인지했다.

물 밖으로 나오자 수영복 끄트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점점이 바닥에 스며들어 짙은 원을 그렸고, 그렇게 손발 끝으로 방울져 떨어지는 바다의 흔적으로 곡선의 경로를 그리며 우린 도로 타월을 깔아놓았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햇빛과 주변의 열기로 어지간하게도 데워진 타월에 몸을 눕히자 단숨에 서늘한 기운이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온기 어린 손길이 전신을 핑 돌아가며 뜨끈한 숨을 손가락과 종아리까지 빠짐없이 가득 채워는 것이 흡사 빈 연료통이 질 좋은 기름으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훈훈한 기운이 다시금 몸을 맴돌자 잠시간 마비되었던 장기들도 밀렸던 업무라도 해치우는 건지 갑작스러운 배고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출발하기 전 집에서 손질해온 멜론이 있어서 주섬주섬 가방에서 과일이 든 플라스틱 통을 꺼내는데 여기저기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난다.

뭔가 싶어 눈을 돌려 주변을 살피는데 앞뒤 양옆에서 가방에 담긴 무언가를 꺼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물놀이 후에는 뜨듯하게 지지며 휑해진 배를 채워야 마땅하지, 이건 세상 어딜 가든 통하는 법칙일지도 모른다 이마를 치며 음식을 놓을 자리를 마련했다.

한쪽에서는 올리브가 담긴 유리병과 후무스 통을 열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나초 봉지를 뜯고 있었다.

각자 말도 없이 준비한 간식들을 한데 놓고 보니 나름의 진수성찬이 아닐 수 없었다.

블루투스로 연결한 스피커에서는 레게톤이 뚱땅거리는 비트에 얹혀 흘러나오고, 나초를 와그작거리며 씹다가 또 입이 심심해지면 올리브를 하나 입 안에 넣고 요리조리 굴려먹다 보니 어느새 몸의 한기와 물기가 다 날아가 버렸다.

적어도 해변까지 왔으면 못해도 삼세번은 머리 끝까지 물에 적셔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조금은 얼렁뚱땅한 신조긴 해도 물놀이를 워낙 좋아하는 나로서는 철석같이 지키고 있는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심지어 코로나 이후로는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다니던 수영장도 발길을 끊은 지 1년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물 안에 몸을 맡기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일종의 해방감, 물속을 유영하는 자유로운 생동감이 불어넣는 시원함이란 그 어떤 다른 신체적 움직임과는 다른 특색 있는 매력이 물 안에 존재했다.

바짝 마른 몸을 일으켜 다시 해변으로 향했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더없이 짙었건만 그 주변에 반사되는 햇볕은 눈이 부시게 따가웠다.

친구들 중 몇몇도 가겠다고 따라나섰고 우린 다시 물가를 향해 거침없이 향했다.

물론, 물을 향한 애정과 갈망은 첫 발을 물속에 내딛음과 동시에 조금은 차디 찬 바닷물에 사그라들었지만 말이다.

그 후로 두어 번을 더 입수하고 나와서 말리기를 반복했다.

마치 서서히 반건조 오징어가 되어감을 알면서도 바다가 주는 정신적 포만감을 포기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못 이긴 채 바다로 들어가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바다로 들어갈 때마다 그 추위에 몸서리를 쳤지만 머리부터 물속에 처넣고 보는 무소불위의 자세로 물놀이에 비장한 각오로 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물의 희열을 그리워한 탓이라고 치자.

마지막이라고, 이제 더 이상 물에 들어가면 우린 얼어버린 꽁치처럼 나올지도 모른다고 거듭 다짐하고 한바탕 다시 신나게 놀고 나온 얼마 뒤, 타월에 드러누워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호접몽에 허우적거리며 수마와 싸우고 있는 와중에 귀를 타고 들려오는 반가운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라 함은 사실 해변가에서 처음 들은 소리는 아니었던 것이 아이스 박스를 짊어지고 우리 자리를 두어 번 지나다니던 잡상인이 소리 지르던 고함이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아이스 박스 안에 든 물건의 실체인데 겉면에 붙은 그림으로 보아선 내가 빵 중에 달디달아 좋아라 마지않는 슈크림빵이었던 것이다.

옛날 옛적에 거리를 돌아다니며 찹쌀떡을 외치던 그 고함소리와 묘하게 겹쳐 들리는 상인의 소리가 묘하게 마음을 울리는 게 꼭 지금 사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없다는 것처럼 들려왔다.

상인이 어깨끈에 동여맨 아이스박스가 멀어져 가며 흘리는 달달한 냄새를 뿌리치지 못한 기미한 후각은 기어코 상인의 가던 길을 멈춰 세웠다.

이 빵의 이름은 곧이곧대로 번역하자면 베를린 도넛인데 그 유래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독일에서 만들던 베이킹 레시피가 포르투갈로 건너와 이곳 사람들의 입맛에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탕 옷이 차르르 코팅된 반지르르한 겉면 속에는 푹신한 빵이 여러 겹으로 나뉘어 있고, 그 안에는 노란 슈크림이 한가득 풍성하게도 담겨 있다.

말 그대로 설탕과 크림에 절여진 맛이라고 하면 그 빵을 일목요연하게 축약한 감상평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해변에서 뒤만 돌면 허기져오는 배를 달래기 위해 이런저런 음식들을 상인들이 아이스 박스에 넣어두고 돌아다니며 파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인기란 기가 막힌 것이어서 먹고 싶다면 오고 가는 상인들을 붙잡아야 한다.

물론 하루에도 네댓 번은 너끈히 해변 끝과 끝을 오갈 정도로 많은 재고를 가지고 있는 상인들이지만 내 친구가 그랬듯 그 누군가도 초코크림이 든 볼라 드 벨림 먹고 싶었는데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슈크림 맛을 주문해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저녁 일곱 시를 느지막이 넘길 즘에도 해는 여전히 뜨거운 볕을 사방에 뿌려대는 기염을 토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서머타임이 시행된 이후로는 아홉 시 반이 지나서야 겨우 주변에 어둠이 사뿐히 내려앉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 덕분이다.

자글자글 내려쬐는 열기에 친구들에게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철수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사를 표시했는데 더 이상 물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등판은 익을 대로 익어버려 말 그대로 온몸이 형체를 잃고 흐물대는 녹초의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판단이 서서 강력한 의견 표출이 가능했던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멀쩡해 보였으면 노을이 질 때까지 버티고 누워있자는 입장이었을 텐데 다들 고개를 주억거리며 끄덕이는 걸 보아하니 너나 나나 다를 바 없이 모두가 햇빛과 물놀이를 과다 치사량으로 즐긴 모양이다.

돌아오는 열차는 역에서 15분-20분 사이에 한 대 꼴로 꽤나 주기적으로 오는 편이다.

사실 해변가에서 바로 우버를 불러 집 앞으로 바로 온다고 하더라도 2만 원이 넘을까 말까 하는 적정한 가격대에 편하게 올 수 있음에도 열차를 택한 건 스페인 친구들은 그 주의 주말을 마지막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푸른 하늘과 너울거리는 구름에 집중하려 했으나 등과 목 주위가 희한하게 따끔거리는 게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진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친구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 한 친구가 사진을 보내왔다.

이제 난 죽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발랑 까져버린 피부와 벌겋게 익은 그 자국.

어쩌면 좋냐, 너와 난 한 배를 탔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관리를 해보자고 다짐을 한 게 며칠 전이다.

밤낮으로 열심히 애프터 선 크림을 발랐음에도 피부 껍질이 벗겨지는 걸 막기가 어려울 것 같다.

그 미칠듯한 가려움과 성가신 따가움에도 침대에 배를 대고 누워 검색창에 타닥거리며 손을 바쁘게 놀려 치고 있는 게 있으니 바로 포르투갈의 햇살이 내리쬐는 해변을 찾는 일이었다.

온몸이 서늘해지는 바다의 온도와 작열하는 태양의 온도 사이를 누비는 것보다 더 환상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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