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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Jul 09. 2021

포르투갈 견문록 03 Peniche

유럽의 서쪽 끝

작년 봄이 시작될 무렵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유럽에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자 난 리스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왔고, 조금의 시간차를 두고 여름이 시작될 쯤에는 미국에서 온 친구 젠은 리스본에서 페니쉬(Peniche)로 이사 갔다.

페니쉬는 젠의 말을 빌리자면 코에 난 여드름처럼 톡 튀어나온 곳이라고 했다.

실제로 구글 지도를 찾아본다면 희한할 정도로 그 비유가 들어맞는 게 사람의 옆얼굴의 형상을 띤 포르투갈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이마 위치의 포르토부터 코가 시작되는 쯤에 Ferrel(페렐)이 자리해있고 리스본은 기다란 코가 끝나는 지점에 앉아있다.

젠이 사는 동네는 페렐로부터 차로 십여 분만 들어가면 도착하는 동네인데 젠의 집으로부터 5분만 걸어가면 도착하는 해변가는 페렐과 페니쉬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양 쪽을 번갈아보면 두 동네를 전체적으로 훑어볼 수도 있다.

리스본에서 차로 1시간 30분가량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페니쉬는 해안가 마을인 만큼 서퍼 타운이기도 하고, 여름이면 바캉스를 즐기러 온 로컬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작년 여름부터 다가오는 여름까지 일 년을 보내며 젠은 집 차고에 서핑보드와 서핑 슈트를 두세 개씩 쌓아놓은 서퍼가 되었고, 캠핑 밴을 개조해서 돌아다니는 캠핑카 차주가 되었으며, 밴드에서 보컬과 기타를 맡아 자신만의 음악을 꾸려나가는가 하며, 또 디지털 노매드를 겨냥한 스타트업 프로젝트 주도하는 젊은 사업가도 되었다.

아, 또 얼마 전에는 몇 개월 동안 이어진 인고의 기다림 끝에 포르투갈 영주권을 취득하기도 했으니 이제는 어엿한 포르투갈 거주증까지 발급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1년 사이에 크고 작은 변화를 겪으면서 페니쉬는 젠의 삶의 터전이자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일터가 되며 포르투갈에서 살아가는 미국 사람의 보금자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젠이 지난 5월에 밴을 타고 리스본으로 놀러 와 4일 동안 우리 집에서 지냈을 때, 동네 이야기를 해주며 세상에 별 사람들이 다 있다며 한참 수다를 떨었는데 대화 말미에 꼭 한 번 놀러 오라고 했었다.

그 사이 젠은 같은 동네에서 다시 한번 이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쉐어하우스에서 아예 방 2개와 차고까지 딸린 하우스로 큰 결심 끝에 집을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고, 자리 잡으면 정식으로 초대장을 날리겠다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 초대장이 7월 초에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강아지 짤과 함께 날아왔다.

7월 첫 주에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친구 커플이 올라와서 며칠 지낼 예정이니 그 친구들이 나가는 6일 날 오라는 것이었다.

계획형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 반대 지점을 서성거리는 나로서는 6일 아무 때나 일단 가기만 하면 되겠지, 싶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 본국으로 귀국했다가 논문 리서치를 끝내러 다시 돌아온 같은 반 친구 데일라와 함께 떠나기로 상의했다.

여행 일정을 목전에 두고 다시 조율한 결과, 원래 얘기했던 날짜는 데일라 일정상 어렵다해서 5일 날 출발하기로 막판에 방향을 틀고 5일 월요일에 출발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지난번에 리스본에서 들렀을 때, 젠과 나는 1년여 만의 감동적인 상봉의 순간을 맞이했지만 데일라는 여태 젠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여행을 벼르며 5일이 되기를 기다린 끝에 이윽고 여행 당일 아침이 밝았다.

하필이면 지하철에서 버스 터미널로 이어지는 통로가 공사로 길이 막히는 바람에 데일라는 긴 머릿 바람을 휘날리며 신명 나게 뛰어야 했고,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출발 시각에 맞춰서 도착했다.

시작부터 소란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여태 90%의 확률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요란법석을 떨었기 때문에 일단 버스에 탄 것만 해도 시작이 반이라고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들판과 쨍한 날씨를 즐기기도 하다가 또 굽이진 길목에서는 때때로 멀미를 이겨내며 페니쉬 역에 도착했다.

종점이기도 하고 그 너머로는 바다인지라 더 이상 갈 곳도 없기도 해서 그런지 주차장에 자리도 몇 군데 없는 간이역에 내린 우리는 두리번거리며 택시를 탈 수는 있을지, 우버를 잡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마침 그 근방을 돌고 있던 딱 한 대의 우버를 잡으려던 찰나였다.

클락션 소리와 함께 나타난 하얀 캠핑카 창문 사이로 얼굴의 모든 근육을 쓰며 함지막한 웃음을 쏟아내는 젠이 보였다.

간이역 한 중앙에 차를 세운 젠은 버선발도 아닌 맨발로 뛰쳐나와 우리에게 달려들었고 우린 한참을 빙글거리며 인사를 마쳤다.

“내 캠핑밴을 드디어 소개해줄 때가 됐나 보다. 얘들아, 타!”

80년대생이니 차 구석구석 어디든 웬만한 힘 아니고서야 여닫는 게 일이라는 젠의 당부를 듣고선 뻑적지근한 문고리를 오만 힘을 다 주어가며 당겨서야 겨우 열 수 있었다.

앞 좌석에 쪼르륵 셋이서 앉아 젠의 집으로 향하는데 백미러에 실로 매듭 묶어 걸어놓은 조개가 서로 부딪히며 짤랑거리는 경쾌한 소리를 냈다.

대시보드 앞에도 자갈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는 걸 보니 젠의 취미 중 하나가 잡다한 이것저것 모으는 것이라는 게 떠올랐다.

가는 길 내내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너 잘났네, 나 잘났네 하면서 파킹하고 들어가는데 저 너머로는 돌담이나 키 높이 자란 식물들을 경계선 삼아 띄엄띄엄 놓인 이웃 집들이 보인다.

젠의 주택 맞은편 공터에는 마친 새로 들어온 이동식 주택이 크레인으로 옮겨지는 중이었는데 여름이면 한두 달 동안만 서핑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나 별장을 방문하는 가족들로 이제 곧 이 동네가 가장 많은 손님들을 맞이할 시기라고 일러주었다.

가방만 내려놓고 해변가에서 저녁을 먹자는 제안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콜을 외치고 가방을 내팽개치다시피 거실에 던져놓고 길을 나섰다.

물론 젠은 여전히 맨발이었는데 그 이유인즉슨 보행자 도로를 몇 걸음 걷지도 않아 모래사장으로 가는 샛길이 나오더니 바로 해변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왔다.

데일라와 나는 그럴 줄 알았으면, 하는 눈빛을 교환하고 신발을 벗었는데 젠이 이 동네 주변에선 신발 신는 게 더 귀찮다며 코멘트를 달았다.

해변 맞은편에는 카페와 펍, 레스토랑들이 줄지어 서있었는데 우린 그중 가장 가까운 곳에 바로 입장했다.

올라, 보아 따르드, 인사와 뒤따르는 일순간의 머뭇거림을 감지하고 종업원이 영어로 주문을 받으려는 찰나에 데일라가 선수를 쳤다.

“저희가 지금 포어 연습 중이라서요.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포어로 주문해도 될까요?”

그렇다, 아무리 현지인들이 영어로 전환하려고 해도 꿋꿋이 포어로 시도해보라는 포어 A2반 선생님의 말씀을 철석같이 따르는 훌륭한 제자의 면모를 보이며 데일라는 뚝심 있는 포어 초심자의 자세를 취한 것이다.

바로 음식을 주문한 뒤, 젠 본인은 portañol 구사자로써 꿋꿋이 살고 있음을 밝히고 우리들의 포어 클래스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말에 그 용어가 뭐를 지칭하는거냐며 묻는 내 말에 젠이 답하기를,

“portañol 뭔지 몰라? 포르투갈, 스페인어를 합친 거야. 그야말로 둘 중에 하나가 먹히기를 바라면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거지.”

젠의 두둑한 배포를 한껏 치하하는 와중에 차례차례 음식이 나왔는데 세 명을 위한 다섯 접시를 시킨 나머지 테이블이 구석까지 찰 정도로 빠듯해졌다.

좋은 음식과 좋은 친구들, 시원함을 한껏 머금은 바람을 쐬며 바닷가를 저 편을 보면 넘실대는 파도 위를 가르는 서퍼들이 보였다.

도대체 해가 기울어져가는 와중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있으면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언제 다 집에 갈까, 생각하며 젠에게 물었다, 바다가 언제쯤 한가한지.

“야간 서핑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해변가가 조용한 때는 잘 없지. 풍랑이 일지만 않으면 말이야. 나도 엊그제 밤에 잠깐 나갔다 왔거든.”

마치 잠옷을 입는 것처럼 웨트슈트를 입고 서핑을 했다는 젠의 말을 들으니 저 정도는 되어야 여기까지 이사를 올 수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데일라와 난 여기 주변 동네로 이사오려면 네 가지 중 하나 이상은 해당이 되어야 한다고, 아니면 아마 도편추방제로 쫓겨날 거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했다.

아무튼 어떤 악기든 연주할 것, 서핑이나 스케이트보드를 탈 수 있을 것, 밴이나 캠핑카 소유주일 것, 아니면 요가와 심신수양에 한껏 심취해있을 것.

네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젠은 본인이 이곳 마을회장에 출마한다면 눈 깜빡이기도 전에 당선 감이라며 소리를 질렀다.

저녁을 먹는 도중, 급하게 여행 스케줄을 변경한 탓에 젠의 다른 친구들과 숙박 일정이 겹치게 되었는데 주변에 있던 그 친구들이 저녁 자리에 합류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온 프레드와 폴란드에서 온 그의 여자 친구 카타리나였다.

그 둘은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거주하는 커플이었는데 마침 우리 첫 학기가 코르도바에서 시작했기에 학교를 다니는 동안 젠과 좋은 인연을 맺었다고 했다.

왁자지껄하게 저녁을 먹는 동안에 나온 재밌는 대화 주제 중 하나는 단연코 코로나와 행정처리에 관한 것이었다.

일부 대화를 옮겨오자면 이렇다.

“코르도바에 그 바 기억나? 거기 원래 맥주랑 간단한 사이드 디시만 파는 데였는데 코로나 때문에 클럽들 다 문 닫고 사람들 다 거기로 몰려가서 거의 간이 클럽 된 거 보고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사람들이 락다운 몇 달 지나고 나선 거의 반실성을 했다니까.”

“아니, 그래서 나랑 카타리나랑 걷고 있는데 집 가는 길에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된 거야. 아니, 겨우 저녁 먹고 나서니까 당연히 밖이었지. 가는 도중에 카타리나가 경찰한테 잡힌 거야. 내가 옆에서 막 고개 숙여, 고개 숙여, 앞에 보지 마, 계속 걸어, 멈추지 마, 거의 에미넴 빙의했다니까? 근데도 걸린 게 진짜 운이 안 좋았단 말이야. 우리가 가는 방향이 경찰이 서 있는 방향이었거든. 그래서 와 망했다, 이러면서 난 골목 끝에 서서 보는데 카타리나 혼자 울먹거리면서 스페인어 못하는데요 이러고 있는 거야!”

“너 거주증 받았다고? 와, 미쳤다, 거의 로또 당첨 아니야? 난 작년에 비자 만료돼서 신청도 못해 이제는. 내가 만료되기 전에 이민국 가서 비자 기한 때문에 거주증 빨리 신청해야 된다고 하니까 이민국이 뭐라는 줄 알아? 정 급하면 대사관 가서 비자 먼저 연장하고 오라는 거야. 미친 건가.”

“나도 다음 달에 겨우 잡았어. 리스본도 아니야. 별 처음 보는 도시인데 보니까 한두 시간 버스 타고 가야 돼. 무슨 거주증 찾아 삼만리냐고.”

“내가 미국이랑 콜롬비아랑 이중국적자에 성도 스페니시 같으니까 가끔 차 타다가 경찰한테 걸려도 영어 못 알아듣는 척하고 고의가 아니었어요 하면서 넘어간단 말이야. 근데 별안간 그 경찰이 라티노다? 난 끝난 거임.”

다들 입이 터진 건지 남의 마지막 마디 끝났다 싶으면 바로 치고 들어와 막판에는 거의 경련이 일어나다시피 웃어젖히느라 복근이 생길 지경이 되고 나서야 저녁 자리가 마무리가 되었다.

그 와중에 구름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하늘 사이로 햇빛이 희미하게 꺼져갔다.

집에 돌아와선 판이 벌어졌다.

“다들 주목해봐 봐. 이게 나라마다 룰이 다르니까 통일을 하고 시작해야 돼.”

“일단 하고 얘기해.”

“그럼 액션 카드 내고 나선 바로 다음 사람이 또 내도 되는 거야?”

“아니,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난 그렇게 했는데?”

“그니까 내가 말했지. 인원 전부 다 공통 규칙을 깔고 시작해야 된다니까?”

우노 판이 벌어졌다.

5개국에서 온 다섯 사람이 벌이는 우노 판은 흥미진진하게 돌아갔다.

그 와중에도 평소 열정적인 언쟁가인 데일라가 꺼낸 토픽에 우린 우노만큼 불붙은 논쟁을 벌여야 했다.

주제는 콜롬비아와 미국 두 군데의 국적을 소지한 프레드 맞춤형으로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행적에 관한 것이었다.

토론은 흐르고 흘러 남미의 역사와 부정부패가 만연한 시스템, 희망을 잃어가는 사람들로 이어져 한층 심도 깊은 이야기로 이어져갔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에야 거실에 벌린 판을 접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침대에 누워서도 데일라와 난 여태 못 나눈 에피소드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일이 오려면 한참은 남았으니까 말이다.

페니쉬에 밤이 찾아올 무렵에 창문을 두드리는 옅은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귀를 간질이는 빗소리가 듣기 좋은 소리임에는 분명하지만 내일 낮에는 다시 눈부신 해가 떠 바다에 몸을 적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간신히 눈을 붙였다.

밤이 깊도록 도무지 잠에 들고 싶지가 않은 이곳, 페니쉬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음에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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