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이 코앞이다. 정확히는 8일이라는 일주일과 열흘 사이의 골 사이에 어정쩡하게 빠져있다.
모든 걸 다 준비했다고 생각하다가,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으니 도저히 출국할 수가 없다는 불안에 휩싸인다.
그러다가 또 밤에 누워 생각하길 이미 끝났다, 몸만 가면 된다, 하고 체념의 잠을 청하게 된다.
4월에 귀국했을 때는 정말 부리나케 몸만 챙겨 왔다.
입고 있던 위아래 옷이 다였으며, 배낭 안은 노트북과 아이패드가 부딪혀 나는 둔탁한 소리뿐이었다.
서울 자취방에서 본가로 내려가는 KTX에서 바닥에 놓는 짐이 이보다도 무거울 것이다, 수화물 무게를 괜히 재보며 생각했다.
그때야 뭣도 모르고 여름쯤에는 다시 들어가겠거니 싶었다.
심지어 핸드폰 요금제마저 7월 첫째 주에 맞추어 중지시켜놨었다.
그래 놓고는 스스로의 준비성에 감탄해 이마를 탁 쳤었다.
물론, 중지를 요청한 그 날 아침 먹통이 된 영문도 모른 채 핸드폰 화면만 황망하게 보고 있다가 무안함에 뒷머리를 두어 차례 긁으며 다시 풀어야 했지만 말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게 기승을 부리며 세계를 들썩들썩거리게 하는 바이러스가 내 마음을 알아줄 리도 만무하다.
계획은 바뀌고 바뀌어 결국 귀국행 티켓 날짜는 해를 넘겨서야 찍히게 되었다.
드디어 돌아갈 날이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가까워졌는데 마음이 영 심란하다.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도 이제는 다 했구나, 이제는 어찌 됐든 돌아간다, 얼마나 많이 달라져있을지, 길거리는 한산할는지, 플랫 메이트들은 집으로 돌아간 지 한창인데 누가 새로 들어왔을지, 학교도 가지 않는 판에 매일 뭘 하고 지낼 것이며, 뭘 먹고 지내지.
꼬리를 무는 도돌이표식 사고방식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불안감만 증폭시키다.
결국 될 대로 되겠지, 막무가내식 결론으로 모든 생각의 끈을 연결 짓는 건 정말이지 될 대로 되도록 두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결과로 채비하던 짐을 마저 정리하고 난 후에 결연한 얼굴로 진정한 운명론자로써의 삶에 대한 자세를 정비하는 것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21시간의 비행은 4시간의 경유를 수반한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 텅 비어있던 공항의 모습이 선명하다.
아마 다시 나가는 길에도 그다지 다를 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경유지에 떨구어지고 나면 그 큼지막한 공항 아래를 활보할 동지를 눈으로 좇을 것만 같다.
여태까지는 고요한 비행을 고수해왔다.
1만 미터 상공을 유지하는 고철 덩어리 안에 몸을 비집고 있는 나 자신을 그려보면 너무나 아득해지는 바람에 좌석에 앉자마자 수면유도제 알약을 털어놓기 때문이다.
공항의 복작스러움과 왁자지껄함이나 비행기 안에서 어떻게든 놓치지 않았던 기내식 타임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공백에 무엇이 놓여 있을지는 모르겠다.
군중 속의 외로움이 무엇인지는 쉽사리 느끼지만 고독 속의 고독은 자못 새로운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형태의 감정에는 또 어떻게 익숙해질 참인가.
기내식 먹을 시간에 생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정답 없는 질문에 그럴듯한 대안을 세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