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5살의 툴루즈>
2년을 꽉 채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기억나는 게 많지 않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조각들은 있지만 그마저도 실수로 물에 번져버린 수채화 작품처럼 곳곳의 경계선이 흐려져 있다.
두꺼운 가족앨범 몇 권이 장롱에 고이 잠들어 있는데 아주 가끔 앨범들을 꺼내서 볼 때가 되어서야 내가 어렸을 때 프랑스에 살았지, 하고 작게 실감을 한다.
언어를 빠르게 흡수한다는 나이에 2년씩이나 프랑스에서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어는 할 수 없는 게 큰 아쉬움으로 남아 엄마에게 여러 번 토로를 했었다.
엄마는 결국 창고 어디에선가 철에 잔뜩 녹이 낀 바인더를 꺼내와 보여주셨는데 내가 유치원에서 한 활동지나 학습지들이 끼워져 있었다.
낯선 환경에의 적응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부모님의 교육지론에 의해 프랑스에 가자마자 바로 하드코어로 공립 유치원에 내던져졌으니, 그 덕분에 불어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엄마의 간증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에 돌아와서 입에 댈 일도 없으니 퇴화해서 결국은 소멸해버렸다는 것이 지어진 슬픈 결론이었고, 마치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서 사라져 버린 인간의 꼬리뼈 이야기처럼 몇 천년 전을 거슬러 서서히 일어난 진화의 한 지점에 서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시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언니를 따라서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불어를 지정했기에 다시 가열찬 한국식 언어교육 공장을 가동하며 어렵게 연이 닿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린 독특한 구조의 집에 살았다.
아빠가 옛날에 말씀하는 걸 듣기로는 그 전의 집주인이 산부인과 의사였는데 집을 두 개를 이어 진료실로 썼댔나 뭐라나, 그게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비가 컸던 응접실을 중간 지점으로 앞 뒤로 길게 뻗었던 집의 형태와 모양은 확실히 평범하게 떠올릴 수 있는 집의 모양은 아니긴 했었다.
옅은 파스텔톤의 하늘색이었던 벽지 중 일부는 우리의 손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는데 이는 동생이 2살, 내가 5살이었기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크레용으로 한 쪽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알록달록한 오색 칠이 물로 쉽게 지워지기는 만무하고 우리는 그 작품을 내내 보존하다가 이사 갈 때가 되어서야 도색 비용을 추가적으로 지불하고 전문가의 힘을 빌려 깨끗이 지우고 나올 수 있었다.
이층 침대에서 찍은 우리들의 사진을 보고 나서야 난 우리는 따로 2층 침대에서 잤다는 걸 겨우 기억해냈다.
사진이 아니었으면 이런 소소한 기억들은 이미 내 머릿속 기억함의 용량이 다 차 버려 저절로 삭제한 지 오래였을 테니 말이다.
동생은 주로 집에 엄마와 지냈고, 나와 언니는 각자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같이 이어진 구조여서 점심시간이 되면 항상 철조망 너머의 언니를 애타게 불렀던 기억이 있다.
언니는 사교성이 좋아서 그런지 친구들을 쉽게 사귀었던 것에 비해 난 처음에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게 너무나 힘이 들었다.
유치원은 엄마가 아침에 데려다주고 나면 완전히 독립적인 하나의 생태계였고, 난 그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남는 궁리를 해야 했다.
비교적 온순한 초식 동물과 수 틀리면 공격성을 보이는 육식 동물들 사이에서 난 움직임과 의사 표현이 아예 제거된 아주 연약한 식물이 된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계심을 풀고, 그 안에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지만 그 단계까지 가는데 부단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다.
한 마디로 학기 초 나의 모습은 완전한 교실의 부적응자였던 셈인데, 언어가 통하지 않는 마당에 곧바로 환경에 스며드는 것을 기대했다면 그거야말로 아주 대단한 착각이 아닐까?
내가 유치원의 정사각형 교실에서 나름의 고전을 겪었듯이 우리 가족은 각자의 자리에서 컬처 쇼크와 인종차별 그 사이를 오가며 바쁘게 손발을 놀리며 제게 주어진 몫을 해내고자 노력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했지만, 그 집을 떠난 주체가 가족이 된다면 고생은 반이 된다는 걸 의도치 않게 체험하게 된 셈이다.
<00년대, 11살의 오하이오>
미국으로 갈 때만 해도 비자니 이민 가방을 싸니 전혀 우려할 것이 없었다.
행정 처리야 당연히 부모님 손에 떨어지는 부차적인 사항이었을 뿐만 아니라 짐을 챙기고 실제로 이동을 하는 모든 과정까지 나는 그저 몸만 딸려가면 될 뿐이었고, 그 정도의 깍두기 취급이 허용이 되는 어린 나이였다.
언니는 적어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갔으니 나보다는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동생들을 잘 챙기라는 엄마의 부탁이라든지, 조금 더 무거운 가방을 들어야 하는 정도로 말이다.
우린 미국 동부의 공항에서 내려 규모가 더 작은 저가 항공사 비행기를 타고 다른 지역에 내려서 다시 차를 타고 오하이로 들어왔던 걸로 기억한다.
가는 비행길이 너무나 고되어 마지막 환승 비행기를 탔을 때는 아예 접이식 테이블을 내려 엎드려 잠을 잤고, 깨어났을 때는 테이블에는 침으로 가히 얕은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는 건 그중에서도 더 생생히 떠오른다.
우리가 살던 집의 이름은 럭셔리 아파트먼트였고, 2층짜리 건물에 우린 나무 계단을 오른 후 왼쪽에 우리 거처가 마련되었다.
이 나무 계단에 훗날 엄마가 불행히도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꽤 큰 상처를 얻게 된다.
오른쪽은 왓슨네 가족이 살았는데 싱글맘 마니가 삼 남매를 혼자 양육하고 있었고 우린 그들 가족과 꽤 많이 친해져 왕류가 잦았다.
마니가 만들어주는 브라우니는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데 내가 먹어본 첫 브라우니였는데 마니 표 브라우니 특유의 촉촉하고 포슬 한 식감은 어디서 구해다 먹어도 다시 느낄 수가 없는 진귀한 전설의 맛으로 남아버렸다.
둘째인 키건은 중학생이고, 셋째 클로이는 내 동생과 동갑이어서 특히나 더 자주 어울렸는데 클로이와는 같은 초등학교를 다녀서 얼굴을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미국에서도 당연히 우린 하드코어식으로 미국에 적응하기로 하고, 9월부터 우리 삼 남매는 공립학교에 다니기로 수속을 마쳤다.
동생과 나는 같은 초등학교, 언니는 더 멀리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우린 9월이 오기까지의 기간을 집에서 보내게 된다.
첫 보름 동안은 우리 가족 너나 할 것 없이 아주 지독한 시차의 림보에 빠지게 되는데 특히 우리 삼 남매는 그 후유증이 오래갔고, 며칠간은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 냉동실에서 꽝꽝 얼어버린 민트 초콜릿 칩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퍽퍽 두들겨 퍼먹었던 옅어져 가는 기억이 있다.
그렇게 등교하게 된 공립학교의 첫날은 당황스러움과 난감함 그 자체였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언어의 장벽 때문이었는데 반 친구들이 도움을 주는데 거리낌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정신적은 고통은 덜했던 것 같다.
동생과 언니에게 신경을 쏟을 여력은 없다시피 할 정도로 내 첫 여섯 달은 오롯이 교실이라는 정사각형 공간에서 내 한 몸 건사하고자 하는 의지에서부터 비롯한 발버둥이었다.
의사소통 능력은 한국어의 능력치보다 절반 가까이 떨어져 있었지만 수업이나 정기적으로 보는 시험과 과제들은 현지 학생들과 같이 봤으므로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었다.
반년이 꼬박 지나고서야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수학 시간은 지루했다.
연필에 자를 끼워 빙빙 돌리다 수학 선생님한테 헬리콥터를 그만 돌려달라는 지적을 받고 나서 그만두었던 오후 어느 때가 있었다.
과학도 그다지 재미는 없었지만 시험을 볼 때면 꼭 승부욕이 불타올라 여섯 시부터 일어나 광합성에 대해 달달 외웠었다.
식물의 광합성과 나비의 일생을 배웠던 그 단원에서 최고점은 아니었어도 꽤 높은 점수를 받았는데 그 이후로 아예 흥미를 잃었던 것 같다.
대신 사회나 국어(영어) 수업에 관심이 지대했는데 언어 과목에 흥미가 더 있어선지 영어와 친숙해질 수 있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사회에서는 미국의 정치 체계나 중앙 정부와 주 정부의 분리, 민주주의 등에 관해서 초등학교 수준의 이해하기 쉽고 얕은 지식을 배웠는데 대부분 프로젝트성 과제나 친구들과의 모둠활동과 짝 활동이 많았어서 유독 인상 깊게 남아있다.
수행 과제 중에 인물사전을 만드는 활동이 있었는데 내가 이 과제에 꽤나 꽂혔는지 사실성을 더하겠다며 필기체를 익혔다.
내가 구상한 과제는 미국의 건국 아버지 중 하나가 되어 일기를 적는 형식으로 자전적 성격을 띤 역사책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과몰입을 하는 바람에 19세기에 흰 종이가 웬 말이냐며 수제로 염색해 빛바랜 갱지로 만든 후에 수기로 글을 써 내려갔다.
집에는 며칠 동안 종이 건조 작업을 위해서 빨래집게에 젖은 종이가 걸려 있었고, 학교에 가면 쉬는 시간마다 필기체를 연습하고 친구들에게 스크립트도 수정받기를 거듭했다.
대학생이 될 때까지 수행 과제에 그 정도로 열정을 토해가며 모든 것을 걸어본 적은 없는데 참 그때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학교는 학교대로 흘러가는 한편 우리 가족은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그 말인즉슨, 평범한 일상을 보낼 때는 다들 투입된 현장에서 각개전투의 양상을 보였다.
아빠는 직장에서, 엄마는 집 안에서, 우리 삼 남매는 교실에서 현실을 극복하고 한계를 뛰어넘고자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주말이 오거나 연휴가 찾아오면 우린 짐을 싸서 플로리다로, 뉴욕으로, 라스베이거스와 워싱턴,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우린 모든 교통수단을 탔으며, 새로운 곳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눈에 담았다.
아빠는 언제나 차의 본네트보다 큰 네모난 지도를 펼치고 펼쳐 목적지로 가는 고속도로 이름을 눈으로 외웠고, 다시 접고 접어서 조수석에 있는 엄마한테 건네주면 엄마는 지도를 글러브 박스에 넣고 집에서 챙겨 온 오렌지를 깎아 아빠에게 하나씩 뜯어서 먹여주었다.
우리는 뒷좌석에서 부산스럽고 익살스럽게 굴었다.
나는 어릴 때 멀미가 잦은 편이었는데 미국 도로는 하나같이 자로 잰듯한 가로 세로의 직선이어서 그나마 경미한 고통만 겪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악관에 갔을 때는 갑작스러운 비와 돌풍이 불어 우린 머리를 각자 옷이며 모자로 가린 채 차로 뛰어들어갔다.
뉴욕까지 왔으면 자유의 여신상 정도는 보고 가야지, 해서 유람선을 타고 섬으로 갔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 내가 잔뜩 칭얼거리자 엄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언짢아하셨다.
플로리다의 디즈니 월드에서 난 많은 놀이기구를 타지는 못했는데 롤러코스터 같은 인기 어트랙션에선 극강의 공포심을 느꼈기 때문에 잔잔바리로 즐거움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라이드로 만족해야만 했다.
할리우드 거리를 걸을 때 발바닥 아래에 써져있는 스타의 이름을 읽으려고 팔자로 비틀비틀 걸었던 그 거리는 지금쯤 더 많은 이름들로 채워졌을까, 그럼 그 거리의 길이는 배로 길어졌으려나.
장거리 자동차 운전을 할 때 우리는 씨디를 틀어 음악을 듣고는 했는데 제목은 모르지만 바이올린 연주가 배경으로 깔리던 컨트리 송이 내 최애 곡이었다.
앤티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던 애착 인형이 있었는데 벅스 라이프 주인공이었던 그 인형은 내 모든 여행을 함께했다.
재봉선이 터져 솜이 삐져나오고, 얼굴에 붙어있던 장식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국은 광활했고, 갈 곳은 넘쳤다.
우린 그 모든 점들을 찍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겨울은 유난스럽게 추웠고 우리 가족은 본가 집에 도착해서 다 같이 거실에서 요를 깔고 자기로 했다.
한 명씩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지는 걸 들으면서도 난 늦게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아마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작년의 일상과 올해의 일상은 또 엄청나게 달라지겠구나, 생각을 하니 온 몸에 바짝 긴장이 들어 손가락도 뻣뻣하게 굳을 정도였다.
그렇게 난 6학년이 되었고, 3월에 있었던 회장 선거에서 부회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