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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s truly, Sk8r gal

by 이해린

2019년도 생일, 스페인에서 첫 학기를 보내고 있을 무렵 플랫 메이트에게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길거리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사람들을 보고 멋지다고, 나도 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지나가는 말로 했던 말을 어떻게 기억을 하고 선물로 줄 생각을 했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내 생애 첫 스케이트 보드를 갖게 되었다.

스케이트보드로 얻은 첫 부상 또한 어처구니없게도 같은 날이었는데 선물 개봉을 마치자마자 첫 시승식을 한답시고 기숙사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에서 앞으로 고꾸라져 무릎과 손을 왕창 깨 먹은 것이다.

스페인에서 겨울 방학을 마치기 전에 포르투갈로 이사를 왔을 때는 또 얼마나 힘들었던가.

택배로 부치면 그만일 줄 알았는데 그 택배 짐을 포장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 학기 동안 모은 짐이 되면 또 얼마나 되겠어하는 마음이었는데 이미 내 짐은 두 배로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여의주처럼 여기저기를 다니며 모은 코르도바의 우쿨렐레와 그라나다의 LP 플레이어,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받은 스케이트 보드가 있었다.

모양도 요란하기 짝이 없어서 네모난 박스 안에 일단 던져놓고 봉해보자는 마음가짐으로 박스 테이프로 칭칭 감아도 여기저기 불룩 튀어나오는 우스운 모양새를 피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힘겹게 국가 이동을 한 짐덩이 중 하나가 스케이트 보드였으니 도저히 구석에 앉아 먼지가 쌓이는 모습을 눈뜨고 쳐다봐 줄 수가 없었다.

무슨 수를 쓰든 간에 첫날의 부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스케이터로 거듭나겠다는 마음을 먹고 핸드폰에 리스본에서 스케이트보드 강습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건 신이 점지한 것인지 내가 사는 곳 아주 가까운 곳에 스케이트 보드장이 있었고, 거기서 주로 활동하는 스케이트보드 스쿨이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묻고 자실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인스타그램 디엠을 때렸다.


그다음 주부터 바로 시작된 보드 강습은 정말 왕초보자를 위한 코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일단 어느 발부터 보드 위에 올리는지부터 시작했다.

아니, 그 이전에 스케이트 보드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이야기로 포문을 열며 선생님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오고 간 짤막한 대화 속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스케이트 보드 문화나 그 영향력, 역사나 기원에 대하여 속속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입력된 정보가 새롭고 신선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 선생님이 스케이트 보드를 왜 배우고 싶냐는 질문에 생일 선물로 받아서라는 답을 했을 때 선생님이 왜 웃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자 부끄러움은 온전히 내 몫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스케이트 보드는 1940-50년대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서퍼들에 의해 날씨나 계절로 서핑이 어려워지는 시기에 서핑을 대신할 목적으로 개발된 다소 신생 스포츠인 셈이다.

말하자면, 땅 위에서 탈 수 있는 서핑인 셈인데 처음에는 그 명칭 또한 사이드워크 서핑이었으며, 서핑 테크닉과 기법을 차용해 스케이트 보드를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스케이트 보드가 상용화되기 시작한 건 우레탄 바퀴가 발명된 60년대부터인데 이를 기점으로 그 존재와 매력이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진 이후로는 2000년대 초반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생각해보면 주류에 대항하는 비주류 문화 정점에 서서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스케이트보딩 컬처는 90년대생이라면 한 번쯤은 눈을 돌려보았을 만한 집단이자 트렌드이기도 하다.

이는 스케이트 보드가 가진 영향력이 단순히 하나의 스포츠 장르를 이루는 것에서 그치는 것뿐만 아니라 당시 스케이트보딩 컬처를 이루던 사람들의 패션, 라이프스타일, 음악, 하물며 그들이 내뱉는 언어까지 도드라진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바다.

특히, 포르투갈은 국가의 한 면이 해안가로 이루어진만큼 서핑이나 스케이트보드에 대한 접근성이 다른 내륙에 위치한 국가들에 비해 쉽고 장벽이 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선생님의 의견이었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결론이기도 했다.

코로나 이전의 가장 좋아라 하던 취미는 수영이었는데 이 또한 아이러니한 것이 나는 수영을 배운 지 5년도 채 되지 않았기에 제법 얼렁뚱땅 수영찬양론자로 비칠 법도 하다.

하지만 어떤 운동에 대한 애정과 운동을 한 시간은 정비례의 관계가 결코 아니라고 경험으로부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더군다나 운동 자체를 멀리하는 내가 이 정도 수영에 대한 열성을 보인다는 거는 어찌 보면 그 운동의 매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스케이트보드를 시작하면서 스케이트 파크에서 많은 사람들을 마주쳤는데 정말 보드에 서있는 것부터가 신기한 아이들도 있는가 하면 본인의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도 있다.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인 레딧 웹사이트 중에서 스케이트 보드 스레드에 들어가 보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보드를 탄다는 공통 관심사 하나만으로 성별, 나이, 국적, 혹은 보드를 타 온 시간까지 뛰어넘어 서로를 무조건적으로 격려하며 유용한 정보를 주고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어차피 대회 나갈 것도 아닌데 재밌게 타보자, 하는 마인드로 스케이트 보드를 타면 된다는 것을 이렇게 구구절절 말해보는 거다.

물론 넘어지고 구르고 다치는 게 썩 재밌는 일이 아닌 건 분명하다.

처음에 백 사이드 턴을 배우며 우당탕탕 거렸던 이유는 모든 보호장비를 했음에도 다치거나 넘어지기 싫어 안간힘을 썼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치면 다치는 거지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오히려 더 빨리 실력을 끌어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가끔 이렇게 생각하고는 한다.

물론 생각만 하고 막상 스케이트 파크에서 타게 되는 순간에는 꼭 몸을 사리게 되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야말로 영원한 쫄보다.

따져 보고 보니, 여태 스케이트 보드를 배우며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기술은 몇 가지 되지 않는데 그 이유를 면밀히 살펴보면 총 두 가지로 추릴 수 있다.

먼저, 쫄보로서의 두려움을 떨쳐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워낙 둔한 운동신경을 타고 나서다.

뭐가 됐든 내 손안에 들어오면 모든 걸 다 부시고 다니는 마이너스의 손을 타고난 것과 아무래도 선천적으로 운동 신경이나 반사 신경이 남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은 지난 십수 년을 반추해보았을 때 주변 사람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바이다.

슬프게도 이런 저주받은 몸과 특성은 민첩성과 유연성을 필연적으로 요하는 스케이트 보드와 상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케이트보드 스쿨에서 내가 주로 레슨을 받는 선생님은 두 분이 계신데 두 분 모두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를 갖고 계신다.

먼저 이 단체를 시작한 B선생님은 40대 중반의 베지테리언으로써 금융권에서 일을 하다 과감히 직장을 접고 스케이트 업계에 뛰어들어 사업을 구축하고 현재 진행형으로 확장시켜나가는 모험적인 인물이다.

그의 아방가르드한 모험 정신은 스케이트 보드 레슨 중에도 투영되어 정말이지 숨 막히는 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일례로, 지난번에 램프에서 처음으로 드롭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다른 기술을 처음 배울 때 늘 그랬던 것처럼 처음 몇 번은 양 손이나 한 손을 지지해서 잡아주었다.

어느 정도 스스로 중심을 잡는 듯싶자 B선생님은 용감하게도 나 혼자 해보라고 램프 위에 날 툭 던져놓으셨다.

망망대해에 뗏목 붙잡고 혼자 떠내려가는 사람처럼 나는 허망히 B선생님을 쳐다보았지만 중심 잡는 방법만 홀로 터득하면 된다고 하시며 밑에서 지켜보고 있겠다고 하셨다.

아니, 지켜보는 거랑 잡아주는 거랑은 다르잖아요,라고 따지고 싶었으나 일단 도 아니면 모겠지 싶어서 스케이트 보드 노즈를 아래로 들이밀다시피 아래로 하강했다.

하강의 끝은 곤두박질에 가까운 추락이었다.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종아리는 램프 끄트머리의 철제판에 쓸려 마치 크로키의 거친 펜 놀림처럼 상처가 났고 이를 채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양말과 신발을 먼저 적시며 떨어지는 피의 끈끈한 궤적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전제로 삼아선지 항상 살이 까지거나 벗겨지는 등의 상처를 입으면 그 상처의 강도보다도 피의 양을 시각적으로 확인함으로써 고통이 배가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늘 생각을 해왔다.

이번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피를 봄으로써 램프 아래에 처량하게 뒤집어져있는 스케이트 보드를 보면서 피가 많이도 나네, 하는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을 잠시 했다.

그 황망한 일시정지의 순간을 깨트린 건 B선생님의 요청이었는데 피를 닦고 다시 한번 타보자는 것이었다.

아니요, 저기, 선생님. 사람이 피가 나는데요?

두 번째 시도에도 시원하게 엉덩방아를 빻으며 미끄러졌다.

세 번째 시도에는 헬멧을 쓴 채로 앞구르기를 했다.

네 번째 시도를 할 때는 다리가 달달 떨렸다. 그리고 등으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그나마 지켜왔던 오른 다리가 갈렸다.

일 그램의 거짓 없이 고백하건대, 램프 앞 전방 3미터는 내가 표면이 반짝거릴 정도로 바닥청소했다고 자부한다.

정말 그만하고 싶었다.

그 눈빛을 B선생님에게 온 마음을 다해 쏘았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너의 용기 있는 모습 응원한다, 이 뿐이었다.

이보세요, 선생님. 제 눈을 보고 그 말씀 다시 한번 해보시죠.

다섯 번째 시도를 하기 위해 램프 위에 올라갔을 때는 이미 지난 몇 차례의 요란한 고통들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놀이터 미끄럼틀의 반도 안 되는 높이인데도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상공 2만 미터의 추락보다도 더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번에도 못하면 모든 고통은 헛것이 되는 것이다, 생각을 했는데 별 자신감이 솟구치진 않았다.

그래도 그냥 했다.

넘어지면 또 아프긴 하겠다, 멀어지는 생각을 뒤로하며 난 스케이트 보드에 발을 얹고 하강을 감행했다.

해냈다, 는 생각이 든 건 램프에서의 드롭으로 붙은 속도로 그 맞은편 램프로 타며 백 사이드 턴을 하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렇게 숨이 가쁜 기쁨은 1초 만에도 올 수 있구나.

너무 무서웠고 무서운만큼 해냈을 때 가뿐한 마음으로 상처들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었던 날, B선생님이 안아주는 품에서 난 그 1초의 맹렬한 기쁨이 온 혈관을 타고 흐르며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

터덜터덜 지친 육신을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조막만 한 램프 하나 타는데도 이렇게 굴러 자빠지니 스치듯 드는 생각이 있었다.

도대체 쿼터파이프 타는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이지, 미친 건가, 하는 뜬구름 잡는 생각.

다음으로는 T선생님이 계시는데 이 분은 이제 막 30대를 접어들었고, 스케이트보드를 본인이 직접 타기도 하지만 보드 위에서 영상 촬영, 편집, 제작하는 작업을 주로 하시는 분이다.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사람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누가 가장 잘 캐치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같이 스케이트 보드를 타면서 그 움직임을 가장 밀접한 곳에서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T선생님은 늘 나른한다, 나른하다 못해 어디 앉아서 쉬셔야 할 것 같은 안색일 때도 가끔 있다.

가끔 캡 모자를 항상 쓰고 있는 T선생님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캡 모자 때문인지 눈 밑에 드리워진 다크서클의 연장선상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는데 선생님이 본인 입으로 말씀하시길 요새 하루에 두어 시간밖에 못 잔다고 한 이후로 얼굴의 음영이 그렇게나 안 쓰러워 보일 수가 없다.

짧은 수면 시간 이면에는 T선생님의 스케줄이 놓여있는데 아침 9시에 스케이트 파크로 나와 오후 6시가 될 때까지 강습을 하고,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난 이후부터는 영상 작업에 몰두하느라 새벽녘이 다 되어도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세계 사이에 그어진 확연한 경계선을 T선생님은 스케이트 보드를 매개체로 하여금 하루에도 수십 번은 넘나들고 있는 것이 과연 T 선생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B선생님과는 다르게 T선생님은 말씀이 많으시다, 확실히 수다스럽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소개를 한 지 5분이 되지 않아 북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며 정치체제와 남북한의 관계에 대해 물어왔던 그 첫 만남에서부터 강렬한 수다맨의 기운을 받기는 했다.

그다음 시간에는 동물원에 반대하는 본인의 입장을 피력하며 생명존중 사상에 대해서도 한참을 같이 얘기했다.

수도 없이 스케이트 파크 내 뺑뺑이를 돌며 반복 연습을 하는 틈을 타 이런 번뜩이는 주제가 T선생님 머리를 스쳐 지나가면 나야 이득이다, 가만히 서서 혹은 가끔은 눈치를 보며 스케이트 보드 위에 앉아 잠깐 담소를 나누어주면 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T선생님은 정말 따듯한 마음을 가진 인간적인 인물이면서도 사회의 정해진 통념과 잣대로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본인도 이런 이미지를 알고 있지만 때때로 주변 사람들의 오해를 사게 되는 경우는 본인의 본심보다는 상대방의 추측일 뿐이라며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며 현재 리스본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우린 부쩍 교육이나 학교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한 번은 스케이트장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 정규수업을 빼먹은 중학교 학생 예닐곱 명쯤 되는 무리가 어느 날부터 스케이트 파크에 출몰하기 시작하더니 거의 매일 오전부터 한 구석에 앉아 음식을 먹고 쓰레기를 주변에 버리거나 욕설을 잔뜩 섞어 자기들끼리 깔깔대며 소란을 피우는 것이었다.

아이들 중 몇몇은 스케이트 보드를 갖고 있었고 이따금씩 보드를 타며 보드장 내의 시설들을 이용했는데 이때마다 T선생님은 언짢아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별다른 제지는 가하지 않았다.

T선생님과 나, 뿐만 아니라 평일 오전 시간에 자주 스케이트장을 방문하는 어린 학생들은 얼마쯤 지나지 않아 그들의 소란스러움과 야단스러움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무리 중 한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등을 툭 치고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지나갔는데 여자애가 짜증이 난 나머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남자애한테 욕을 퍼부었다.

남자애도 장난을 받아친답시고 욕을 신명 나게 해대며 둘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와중에 T선생님이 스케이트 보드를 손에 들고 무리 쪽으로 다가갔다.

T선생님은 쓰고 있던 캡 모자를 벗고 가슴에 손을 대고 자기소개를 했다.

“좋은 아침이다, 얘들아. 내 이름은 T고 스케이트 보드 타는 사람이야. 스케이트 파크는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이고, 모두를 환영하는 곳이라서 너희 일에 끼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번 일은 안될 것 같다. 너희들도 지금 둘러보면 알겠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너희보다 어린애들도 많아.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이렇게도 많은 곳에서 너희들이 음식을 먹고 쓰레기를 마구잡이로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쉽게 해선 안될 욕을 가벼운 장난이라도 되는 듯이 하는 건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사람으로서 용납할 수가 없어. 이 업계에 애정을 갖고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너희가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사람들이라는 명목 하에 스케이트 보드를 악용하고, 스케이트 보드 문화를 끌어내리는 건 참지 않을 거야.”

그리고 T선생님에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아니, 그게 아니라, 다시 말하자면 그야말로 참 교육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T선생님은 연간 독서 권수가 마이너스에 달한다는 그는 한편으로는 학교 교사가 되는 것을 꿈꾸고 있기도 했다.

“여자 친구가 책 1권씩 읽을 때마다 타투 하나를 더 새겨도 된다고 했거든. 아마 내가 안 읽을 거라고 확신해서 그렇겠지. 심지어 만화는 안된다고 했거든. 그런데 난 할 수 있어. 내가 그 많은 꿈들 중에 꼭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거거든. 그러려면 책도 많이 읽어야겠지.”

그는 늘 공교육에 대한 고민을 지니기도 했는데 이는 아직은 어린 본인의 조카나 곧 태어날 아이가 언젠가는 의무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기에 그렇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본인이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교육을 받아오면서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들 때문이었다.

공교육의 틀에서 항상 그 너머를 바라보았던, 조금은 사선으로 틀어져있었던 십 대 시절의 T선생님은 본인 같은 아이는 나쁜 마음 없이도 나쁜 아이로 불린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보는 T선생님은 달랐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르침 속에서 배움을 찾았고, 교육을 존중했다.

T선생님이야말로 좋은 선생님이자 좋은 어른이었고, 나는 공교육 기관의 교사인 입장으로 바라보았을 때 T선생님의 비뚤어진 교육관이 그렇게나 멋져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주절주절 말이 길어졌지만 결국에 마음먹은 바는 이거다.

스케이트 보드에 달린 둥근 바퀴만큼이나 둥근 마음가짐으로 타다보면 언젠가는 프론트사이드 턴도, 올리도, 드랍도 다 잘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

막연한 그 날이 언젠가의 오늘이 될 때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그런 둥글다못해 뭉뜽그려진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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