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은 소리도 없이 찾아왔다.
블라인드를 내려 모든 빛의 입출구를 봉쇄한 다음에 잠을 청해서인지 그다음 날 찾아든 아침의 밝음의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문고리를 돌리고 나서야 쏟아지는 빛에 부신 눈을 찡그리며 아침이 왔음을 자각했다.
심지어 아침 아홉 시가 이제 막 지나가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볕이 따사롭게 느껴졌으니 정오가 지나고 나면 활활 타오르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오늘도 너무나 당연하게 해수욕을 나갈 계획을 세웠기에 뜨거울수록 좋았으므로 어떤 형태의 열기든 오늘만은 환영인 셈이다.
평소에는 도망치기에만 바빴던 불볕더위지만 바깥 온도가 더우면 더울수록 대서양 바다의 찬기를 온몸에 뒤집어쓰기에 더 제격이니까 말이다.
접시에 와플과 주스를 담고 사이드에 어제 먹다 남긴 다 식어빠진 감자튀김을 욱여넣고선 바깥 테라스로 향했다.
조금은 비루한 아침 식사지만 모든 걸 근사하게 바꾸어줄 바깥 풍경이 있으니 그걸 치트키로 쓴다면 아침도 그럭저럭 모양새가 나지 않을까 싶었다.
테라스 타일은 이미 조금은 달구어진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내 착각일까.
벌써 내 발에 샌들 선대로 자국이 생긴 것만 같다면 그건 괜한 기시감일까.
지난 몇 번의 해변 여행으로 등이 여러 번 익으면서 여행을 마친 후면 꼭 하루 이틀을 꼬박 약을 발라야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꼭 조심해야지 싶은 경고장과도 같은 알림 창이 머릿속에 번뜩였다.
이제 와서 후회해서 뭘 하겠냐마는 정말이지 유럽 햇볕은 정말 얕봐선 안 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밖에는 이미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특히 해변 모래사장 너머로 이미 형형색색의 파라솔들이 꽂히는 걸 보고 오늘도 사람이 꽤나 되겠구나 가늠을 해보았다.
해변을 끼고도는 도로 위로 자전거나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고, 가족 단위로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나 운동복을 입고 아침부터 러닝을 하는 사람들도 얼추 많이 보였다.
여기서 마냥 아까운 오전을 축낼 순 없지, 와플을 야무지게 입에 쑤셔 넣으며 나도 저 부지런한 대형에 끼어볼까 잠시 고민을 해보고 금방 그래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아무래도 내일이면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가야 되는 날이니까 오늘은 더욱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눅눅해진 감자튀김은 아무래도 다는 못 먹겠다 싶어 남은 것들과 다 먹은 빈 접시와 잔을 처리하고 나름 바쁘게 아침 맞이를 하기 시작했다.
카파리카의 둘째 날이 밝았다.
밖으로 나와보니 역시나 공기는 이미 뜨뜻미지근해져 있었다.
해변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 산책로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가슴에 한 줄기 알싸한 바람을 불어넣는 듯 청량했다.
어제 가본데 말고 더 멀리로 걸어가 보자 싶어서 방파제를 네댓 개를 건너며 끝도 없이 건너다보니 드는 생각이 돌아가야 할 길도 그만큼 멀다는 것이었다.
불현듯 등골이 서늘해지는 깨달음은 늦어도 한참을 늦었던 것이 돌아서 보니 이미 출발했던 지점이 까마득한 점처럼 보였다.
어차피 가야 할 길 하는 수 없다,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봇다리 장수 같은 마음가짐을 장착하며 주변에 보이는 벤치에 철퍼덕 앉았다.
금방 돌아갈 줄 알고 아이패드도 책도 안 들고 맨몸으로 덜렁 나왔건만 이런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줄이야, 즐겁다, 인생.
어쩔까 싶어서 한국에 있는 엄마한테 전화도 걸어봤는데 수업하느라 바쁘다고 끊으라고 하셨다.
엄마한테 전화는 역시 심심할 때 걸어야 제맛인데 이렇게 무참히 끊기다니 조금 비통해지는 심정이었지만 밝은 하늘을 바라보며 차오르는 눈물을 씨근거리며 참아보았다.
아직 숙소에 있는 친구한테도 전화해봤는데 장 보러 가야 된다고 오면 같이 가자 그런다.
대답을 하지 않는 일말의 망설임을 캐치하고 귀찮냐고 묻는 말에 얼버무려 답해본다.
“너무 멀리 나와서 돌아가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그런데 너 먼저 빨리 장보고 돌아올래?”
“괜찮아! 기다릴게. 우리 휴가 온 거잖아. 시간이야 차고 많은데.”
아니, 저기요. 귀찮아서 그러는데요. 왜 세상만사 마음대로 되는 게 없냐.
돌아가는 길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통화를 끊었다.
이제 진짜 가야 되는 데다가 갈 길이 먼데도 해변으로 자꾸 시선이 갔다.
일렁이는 물결들 사이로 퍼지는 빛들의 모양새가 일분일초 바뀌는 것이 그 자태를 외면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래요, 전 친구의 기다림을 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바다를 저버리는 그런 파렴치한 짓은 하지 않겠어요.
친구에게 대충 이삼십 분 정도 걸릴 거다, 날 찾지 말아라 메시지를 보낸 후 조금 걷던 길을 멈추어 다시 벤치에 주저앉았다.
해변 벤치에 앉아 할 수 있는 것들은 여러 개가 있었지만 그중 제일 흥미로운 건 저 멀리 바닷속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한 예를 들어 이미 오전 수업을 시작한 서핑 스쿨의 강습생들은 무료로 대여해주는 현란한 서핑 보드를 타다 중심을 잃고 떨어지기 일쑤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숙련된 서퍼들이 파도가 오길 등 너머로 엿보며 기회를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중에 한 사람을 콕 집어 그 사람이 서핑해서 바다를 가로지르는 경로를 눈으로 쫓아가 보는 것이다.
마치 우버 앱으로 자전거를 타고 배달 오는 배달 기사의 경로를 추적하듯이 눈으로 바다 위에 선을 그리다 보면 수십 개의 곡선이 물결 위에 그려지게 된다.
또, 모래사장으로도 눈을 돌리면 또 그렇게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
사람들이 입은 수영복들이나 비치웨어의 쨍한 색깔들과 더불어 모래 위로 빛이 반사되어서 그런지 바라보는 풍경은 그 명도와 채도가 높은 비율로 다가온다.
그 와중에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덕분에 마침내 이 모든 요소들이 조합되어 시야에 담길 때에는 눈 시리게 선명한 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왁자지껄한 해변가의 소음은 파도가 철썩이며 부딪치는 소리마저 뚫고 나오기에 쟁쟁하게 울리는 그 소리는 곧 얼른 나도 짐 챙겨서 자리 펼치고 놀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제 진짜 돌아가야겠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짐한다, 돌아가는 길은 경보라고.
점심은 초밥 세트였다.
친구는 햄버거나 고기류처럼 무겁고 밀도 높은 음식을 먹지 말자더니 초밥을 제안한다.
네? 그 밥 덩어리를요? 탄수화물이 똘똘 뭉쳐 고칼로리를 이루는 그 음식을 이르는 게 맞으신가요?
서양인이 바라보는 초밥이란 가볍고, 몸에 좋으며, 한 시간이면 소화의 전 과정을 다 거치는 마치 수박화채 같은 음식인가, 돌연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초밥 세트를 보고 있자니 군침이 싹 돌아 단번에 제안하고 바로 주문을 마쳤다.
도착한 음식은 상자 안에 꽉꽉 메워져 있는 연어 초밥들이었고 이건 정말이지 현명한 선택이었다, 과거의 자신을 과하게 칭찬하며 한 점씩 해치워나가기 시작했다.
초밥으로 부른 배를 오른손으로 쓸어내리며 다음 스케줄을 조율해본다.
강경 해수욕 파인 나와 강경휴식 파인 친구와 협상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되었는데 그 내용인즉슨, 아무래도 지금은 햇볕이 너무 뜨거우니까 한 시간만 기다렸다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노곤해져 버린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낮잠에 취해 고개를 끔벅끔벅 떨구어대기 시작했다.
그 애잔한 모습을 보다 못한 친구가 테라스 의자 위에 걸쳐진 숄을 던져주었으니 그제야 본격적으로 잠을 청하기로 한다.
다시 눈을 떠보니 해수욕하기 딱 적당한 오후 3시 반, 이제 대충 짐 챙기고 나가서 자리 펴면 4시다.
이럴 거면 뭐하러 아침 댓바람부터 부지런 떨면서 아침 산책까지 나갔지.
의아한 마음이 고개를 살짝 들려는 와중에 이에 맞서는 합리적 계산은 어차피 일곱 여덟 시까지는 진득하게 모래사장에서 눌어붙어 있을 거니까 지금 나가면 딱이다 싶은 것이다.
바구니에 대충 필요하다 싶을 만한 것들을 때려 넣고 잽싸게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화려한 햇살이 나를 감싸는 와중에 해수욕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바다의 품에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막강하게 날 사로잡았다.
흥분을 이기지 못해 거의 탭댄스를 추며 타월을 길게 깔고 선크림을 샤워하듯 발랐다.
입수 타임은 늘 볼살이 떨릴 정도로 설레는데 그 설렘을 차지하는 일부는 물론 너무 좋아서도 있지만 너무 물이 차가우니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의외로 어제의 차가움이 오늘의 발 끝에 닿을 줄 알았는데 어제보다 확연히 따듯해진 수온에 마음이 중탕으로 녹는 초콜릿 바 마냥 몽글몽글 녹아버린다.
글쎄요, 이 정도면 거의 사우나 수준 아닌가요.
됐다, 오늘은 그냥 한 마리 해파리, 한 송이 물미역이 되어 바다를 유유자적하게 떠다니련다.
친구랑 함께 뛰어든 바다는 오늘도 찬란함을 한가득 싣고 빛을 뿜어댄다.
흡사 물놀이에 미쳐버린 광기 어린 눈빛을 마주한 친구는 너무 무리하지 말라며 가끔씩은 햇볕에 몸도 말리라고 한다.
감히 그런 소리를 입에 담다니, 몹쓸 놈. 오늘이야말로 신이 주신 기회다.
친구의 말리는 몸짓을 뿌리치고 더 깊은 바다로 나가려는데 결국 끌려 나온 건 이빨이 딱딱 부딪혔기 때문이었다는데 네가 대체 아는 게 뭐야.
강인한 정신이 나약한 육체에 깃든 이 설움을 네가 아느냔 말이다.
이 짓을 거듭 반복하고 나서야 나도 슬슬 몸에 수분이 채워져 가는 듯했다.
바다에 있으면 그 시원함이 머리부터 발 끝까지 충전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물 안을 유영하고 있으면 땅에 두 다리를 딛고 서있을 때의 무거운 중력과는 다르게 가볍게 작용하는 부력으로 조금은 나는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두 손과 발 끝으로 들이차는 서늘함과 물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느려지는 호흡과 모든 신체 활동들이 내게는 강한 끌림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아, 이제는 진짜 가야지, 물이 많이 들이찼으니까.
그런데도 또 돌아서면 난 바닷속에 머리를 눕히고 세상에서 가장 인체공학적으로 만들어진 침대에 누운 것처럼 잔 물결을 타고 있는데 어떻게 여길 떠난다는 말인가.
난 돌아갈 수 없어, 돌아갈 수 없다고!
저녁은 토스트와 타코 세트를 먹기로 했다.
배가 고프지 않다더니 뭘 먹을지 메뉴 상의만 삼십 분을 하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거의 연행되다시피 숙소로 다시 돌아왔는데 정말로 수영은 차고 넘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또 저물어가는 해 질 녘 너머로 반짝거리는 바다의 물결들을 바라보니 쩝, 하고 입만 다시게 된다.
에이, 그래도 다음에 또 가면 되지, 애써 아쉬움을 누르고 저녁 메뉴를 주문한다.
야외 테라스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저 너머에 간헐적으로 빛을 발산하는 등대가 보인다.
저렇게 듬직하게 서있는 등대가 있어서 어둠 속에서도 배들이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는 거겠지,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또 저 지평선의 끝을 보고 갈릴레이는 어떻게 지구가 둥글다고 했을까, 내가 그 시대에 살았으면 보나 마나 지구 평평론자다, 뜬구름 잡는 주제로 친구와 꼬리를 무는 대화를 나누기도 해보고.
그러다 보니 어둑한 저녁이 어두운 밤이 되었다.
카파리카의 저무는 밤을 베개 삼아 보내는 마지막 날이 또 그렇게 가고 있었다.
아쉬움의 끝을 잡고 늘어지면 바다 지평선 그 너머까지도 도달할 것만 같은 기분은 늘상 그랬던 것처럼 이번도 다를 것 없는 여행의 마지막 날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