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잠의 두께는 살얼음보다도 얇아 한 시간을 가지 못해 깨져 결국 바깥이 밝아올 무렵까지도 세 시간의 수면도 취하지 못했다.
이건 순전히 내 몸이 받아드리는 스트레스의 무게이며, 어차피 신경쓰이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는 전 날이면 온전한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걸 과거의 걱정과 불안 속에 지새운 수 많은 밤들을 토대로 이미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무슨 일이 됐든지 간에 마주해야 할 그 당일이 오면 또 그 중압감과 부담이 전혀 새로운 모습을 한채 내 눈앞에 버티고 서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추억이 될 일이라는걸 머릿 속으로는 다 알고 있는데도 막상 일을 코 앞에 두면 시간이 희한하게도 버퍼링이라도 걸렸나, 시침과 분침은 버벅대며 제대로 가질 않는다.
아침 6시에 눈이 떠졌다. 조금 더 자야지, 아침 수면의 질은 향후 업무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댔어.
뒤척이며 다시 핸드폰 화면을 보면 여섯시 반, 그리고 다시 일곱시.
이쯤되면 잠은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그냥 일어나고 말지, 쨍하게 울려오는 머리통을 차라리 긁기라도하면 그 성가신 두통이 사라지기라도 할까봐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이불보를 박차고 일어난다.
상쾌함과는 제법 거리가 먼 아침 기상이다.
그래요, 저 오늘 많이 예민해요, 아무래도 전 오늘 척척석사로 첫 데뷔를 앞둔 사람이니까요.
오늘이다, 바로 오늘. 여태 기다리고 벼르며 고대했던 석사 졸업논문 디펜스의 날이 밝았다.
다른 날과는 다르게 오늘은 아침을 먹고자 하는 일말의 생각도 들지 않았고 배고파지려는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위장도 오늘이 남다른 날임을 눈치챈 모양인지 알아서 수그러드는 모양이었는데 곤란한건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머리가 맑아지고, 신체적 활동을 감행할 에너지가 생기고, 획기적인 논문 발표로 전 세계가 나를 주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일단 이번 학위에서는 어려울 것 같지만 어쨌든 아침을 먹어야된다는 본능적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는 거다.
남은 우유에 남은 시리얼을 타서 기계적으로 입에 퍼넣기 시작했는데 마치 삽질하는 기분으로 첫 술을 뜨고 크레인으로 화물을 이동하는 것마냥 시리얼이 담긴 숟가락을 입 안에 떨어트리면, 이빨이 문서 파쇄기 마냥 사정없이 시리얼을 부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십여분 가량 끊임없이 반복하다보니 금새 시리얼 그릇이 바닥이 났고, 초코우유로 변색한 국물을 마시며 시리얼의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데 그 때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나며 심상찮은 화장실의 전조가 보였다.
원래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장에 가장 먼저 직격탄을 받는 몸이었는데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야속하게도 얼마 기다려주지 않고 배에서 신호가 천둥처럼 내리쳤다.
이건 기다릴 수 없는 문제다 싶어서 뒤돌아볼 것도 없이 화장실로 직행해 모든 것을 배출해버리니 화장실 문을 닫고 나올 때는 패잔병처럼 모든 것을 다 잃은 기분이었다.
시침이 이제 8시를 넘기고 있었는데 왜 히말라야를 등반한 것처럼 이렇게 온 몸에 진이 다 빠지는지 모르겠다.
제발, 오늘 이 하루가 평탄히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잠시 침대에 모로 누워 배를 찔러오는 송곳같은 고통을 견디며 아무도 듣지않을 기도를 속으로 되뇌여본다.
우리 반은 총 24명이지만 7월달에 논문 디펜스 일정이 있는 학생은 총 12명으로 절반뿐이다.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논문 발표를 9월로 보류해도 된다는 대학 교수진측 발표가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12명의 디펜스는 9월로 연기되었다.
다른 몇몇 친구들을 비롯해 나같은 경우에는 9월로 미뤄서 한두달 더 고통 속에 사느니 빨리 마무리짓고 여름 마음놓고 놀겠다는 심정이었고, 그 절박함에 매달려 6월 말에는 거의 내 한 몸 불태워 논문 마무리 수정작업에 몰두해있었다.
논문 작업을 마치고 공식적으로 제출을 마치고 보니 또 하나의 복병은 프레젠테이션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논문 작업이 처음인 나는 도무지 어떤 내용으로 파워포인트를 채워야하며, 어떤 템플릿을 사용하고, 어떤 형식적인 절차가 있는지 등등 기본적인 내용조차 숙지가 되어있지 않았었다.
친한 친구들과 묻고 답해가며 프레젠테이션을 완성하며 우정까지 돈독히 쌓아나갈 수 있었고, 템플릿 부자의 명성을 얻고 있는 나답게 템플릿을 고르는건 차라리 그 중에선 제일 즐겼던 과정이었으며, 차곡차곡 쌓여나가는 슬라이드 갯수를 날마다 새롭게 저장해가며 총 32장을 완성했을 때 느겼던 뿌듯함도 있었다는 이 모든 사실들을 사실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완성된 최종 논문 작업물과 프레젠테이션 파일은 깔끔하게 워드와 파워포인트로 저장이 되어 대학원 폴더 상위에 사이좋게 나란히 놓여있었다.
가장 첫 타자인 우리 반 친구 풀리야는 학우들의 뜨거운 응원을 받으며 7월 17일날 첫 스타트를 끊었으며, 그 이후로 하루이틀 사이에 두세명씩 발표를 했었다.
내 발표날은 7월 28일 오전 10시 30분이었는데 이는 전체 발표자들 중 마지막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순번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 더 빨리 하고 싶은데 세월아 내월아 언제 하나, 볼멘소리가 절로 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앞선 발표자들의 디펜스를 서너번 참관한 결과, 늦게 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구나 하는 깊은 깨달음을 얻고 조금은 숙연해진 마음으로 차분히 차례를 기다렸다.
사실 발표랄거야 15-20분 정도 본인이 준비한만큼 보여주면 되는 것이어서 아무리 발표가 체질이 아닌 나같은 사람이어도 이악물고 하면 할 수야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내 기준 가장 끔찍했던 과정은 나머지 40-50분여간 마치 폭격처럼 날라오는 교수님들의 질문들과 끊임없이 조여오는 압박, 조금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해 이 점을 지적하고 싶다는 교수님의 코멘트와 함께 이어지는 날 것의 싸늘한 심사평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날아와 꽂힌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모든 논지들은 발표자가 더 나은 연구자가 될 수 있도록 깔아주는 든든한 초석임에 틀림이 없건만 왜 나는 저 멀리 스크린 너머로 보면서도 간접적인 고통을 느꼈는지 모를 일이다.
혹시 내가 당사작 되는 순간이 오면, 과연 그 날이 오면 저절로 알게 될까? 아니, 그닥 또 알고 싶지는 않다.
나를 비롯해 다른 친구들도 서로의 발표를 참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석사 논문 심사과정도 온라인으로 진행이 되어서 발표하는 학생 개개인마다 링크와 비밀번호가 주어졌으며 이 링크를 사용해 외부인 초청도 가능하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참관했던 발표는 앞에 먼저 했던 10명의 친구들 중 고작 세 명이었으니 그건 내 게으름보다도 개인 일정이 그동안 눈코뜰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결론적으로 절대 많지 않은 참관의 경험으로 추측해보건대 논문 발표 과정이 절대 신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기업의 압박 면접 뺨치는 숨막히는 질의응답 시간을 두어번 두 눈으로 보고 나니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 때부터는 먼저 큰 B4용지에다가 요점정리 식으로 내가 쓴 논문을 정리해보았다.
대챕터, 소챕터, 그리고 그 안에 만든 핵심 내용을 불렛포인트 식으로 보기 쉽게 키워드와 문장을 써서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말이다.
만일 레퍼런스에 관한 질문이 들어올 경우를 대비해 주로 참고한 학자와 논문 내용도 짧게나마 노트 필기식으로 주석처럼 달아놓았다.
그 후에는 정리한 노트를 바탕으로 예상 질문과 답안을 짜기 시작했다.
총 10가지 질문을 구성했는데 포괄적인 질문과 세부 내용 질문으로 나누어 질문 개요를 짜내려갔다.
포괄적인 질문으로는 1) 본 연구 목적? 2) 비판적 교육학을 학교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은? 3) 현재 실시되고 있는 다문화 교육이 겪는 어려운 점은? 4) 본 연구의 한계점과 대안은? 5) 비판적 교육학의 의의는?
세부적인 질문으로는 1) 인터뷰 내용의 질적 연구 방법론 case study approach 2) 인터뷰 결과의 질적 연구 content analysıs 3) 외국어 교육 담화에 등장하는 cyclıcal model 4) 인터뷰 대상 집단은 어떤 식으로 구성했는가?
이렇게 열 가지 질문을 꼽았고, 꼭집어 이 질문을 하지 않더라도 답변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답할 수 있도록 머릿 속에서 마인드 맵처럼 답변들을 연결시키기도 했다.
예상 답안까지 마련하고 난 뒤에는 끊임없는 연습과 리허설의 반복이었다.
발표 날짜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현실을 도피하고자 욕망만 짙어져 느닷없이 찾아온 나태함은 복병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설령 더 이상 논문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소리내 읽어보는 요약본의 내용들이 귀에 익지 않더라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해서 논문을 읽고, 예상 답안을 보충시켜나갔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7월 28일 수요일 아침이 오고야 만 것이다.
10시가 되었다.
난 링크를 내 대학교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보내주었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친구들 중 2명은 내 인터뷰에 응해주기도 했기 때문에 꼭 초대하고 싶기도 했었고, 대학교 찐친들이라 이번 논문 작업 뿐만 아니라 석사 과정 내내 더 없이 큰 힘이 되어줬기 때문에 자리해주는 것만으로도 내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될 것 같았다.
가족같은 경우는 형제자매보다도 부모님께서 참석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초대했다.
석사 과정에 있는동안 코로나며 시험 기간이며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철없게 응석 부린 딸의 그나마 철 들어보이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거의 속죄하는 마음으로 링크를 보내드렸다.
10시 20분이 되어서 링크를 타고 들어갔는데 아직 대기 중이라는 문구가 떴다.
그동안에 정리본이나 좀 더 읽고 있어야지 했는데 정신이 거의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집중이 될리는 만무했다.
평소에는 참 잘도 가는 시간이 이런 때만큼은 1초와 1초의 무한히 쪼개지는 그 사이까지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가는 듯 했다.
10시 30분으로 시간이 바뀌자마자 줌 클래스가 열리고,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교수님들의 얼굴이 보였는데 한 교수님이 내게 잘 지내냐고 물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어? 얼마 전에 우리 얼굴 보긴 했지만 말이야.”
지난 달에 젠 집에 놀러갔을 때 영상통화를 같이 하며 안부를 나누었는데 그 때를 떠올리시며 안부를 물어주시는 것이다.
그 정감어린 목소리의 울림에 어떻게된 일인지 여태 쌓아왔던 긴장이 조금은 누그러드는 기분이었다.
과연 갑작스런 기류의 변화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었을까?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 늘 안부를 먼저 물어주시곤 하던 교수님이었는데 정사각형의 화면으로 다시 그 모습이 재연되니 어떤 대단한 논문 발표를 하는 게 아니라 수업의 일환으로 내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 참석한 느낌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모든 수업에 의욕을 상실했고, 온라인 수업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수업에 임하다보니 마지막에 가선 처참한 성적을 기록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고 이번 학기가 되어서는 나름대로의 심기일전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리라는 굳건한 각오를 다지고 막학기를 임했다.
뿌린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열심히 갈군 밭에 며칠씩 매달린 레포트들이며, 하드캐리한 조별과제들, 수많은 발표 작업물들을 뿌리다보니 그 결과로 엄청난 풍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 입으로 자랑하기 쑥쓰럽지만, 그 쑥쓰러움을 참고 몇번이고 자랑하는건데 8과목 모두 A+에 해당하는 성적을 거둔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이번 학기에 나와 함께한 교수님 두 분이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셨다는 점인데 이게 바로 개이득의 사전적 의미가 아닐런지 모르겠다.
“이번에 준비한 논문이 비판적 교육학이더라고. 정말 탁월한 선택이야.”
“나는 논문 읽기도 전에 기대가 컸어. 이 주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으니 이번 발표 열심히 들어볼게.”
“자, 그럼 준비됐니?”
스크린 쉐어 기능을 누름과 동시에 화면 꽉차게 내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자료가 떴다.
마이크 기능이 열렸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럼 지금부터 다문화 교육 및 외국어 교육 내 비판적 교육학 도입에 관해 연구한 논문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