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자기소개와 함께 넘겨진 첫 슬라이드는 차분한 상아색 바탕에 논문의 제목, 내 이름, 내 지도 교수님의 성함을 담고 있었다.
한 장 더 넘기고나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논문 소개가 시작되었다.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은 연습한 대로라면 20분 안팎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다음의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논문 작성 동기 및 이론 소개, 이론적 배경 설명, 인터뷰 설계, 인터뷰 연구, 실천 방법, 결론 및 향후 발전 방향.
먼저 이론 소개는 비판적 교육학이 가진 의미를 바탕으로 펼쳐졌는데 현재 사회의 세태와 다양한 가치의 공존이라는 큰 틀에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시켰다.
“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의미 있는 가치들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 공존하며, 나아가 융합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린 교육가로서 어떤 부분을 생각해야 하는가?”
논문을 시작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스스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서부터 그려나간 논문의 뼈대는 다문화 교육의 현주소를 파악한 뒤, 다양성과 그 가치를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다문화 교육의 도약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다문화 교육의 일환에서 외국어 학습과 언어 교육 또한 전체 도식에서 핵심 요소로 꼽는다.
언어를 학습하는 과정을 하나의 넓은 스펙트럼으로 보자면 그 안에는 학습 언어가 포괄하는 문화적 요소와 문화 존중의 마음가짐이 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다문화 교육과 언어 학습의 진화를 꾀할 수 있는 이론적 받침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난 그 해답을 브라질의 교육학자인 파울로 프레어리가 주창한 비판적 교육학(Critical Pedagogy)으로부터 찾고자 했다.
특히 비판적 교육학의 근간을 이루는 몇 가지 주요 쟁점들인 Problem-posing thinking mechanism, Reflection, Dialogue 등의 개념을 다문화 교육의 분야로 끌고 오고자 했다.
정리하자면, 본 논문 작업은 비판적 교육학의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비판적 다문화 교육 및 외국어 교육의 실현 방법을 강구해보려는 시도인 셈이다.
고로, 논문의 제목은 Constructing Critical Intercultural Education and Foreign Language Education이었다.
너무나 정직한 제목이라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심심한 제목이기는 한 것 같다.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기 전, 심사 위원으로 참석하신 교수님 세 분 중 두 분은 비판적 교육학을 주제로 정한 것에 대해 큰 관심을 드러내셨다.
짧게 말해주신 이유로 한 교수님은 비판적 교육학이라는 교육학자의 이론 체계와 연구물을 프리즘 역할 삼아 다른 교육 분야에 적용해보겠다는 시도가 참신하다고 말씀하시고, 다른 한 분은 비판적 교육학을 과거에 개인적으로 연구 주제로 꼽은 적이 있다고 하셨다.
아직 서론을 꺼내기도 전인데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시는 교수님들 덕분에 어디선지 모를 자신감이 솟구친 건지 그다음부터 이론 소개를 하고, 내 논문의 요지를 밝히는 부분으로 들어가니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발표가 진행되었다.
이건 흡사 부족한 수면과 좋지 않은 컨디션의 기이한 조합에서 나오는 심신의 반각성 상태가 불러온 사태일지도 모른다고 끝나고 언뜻 생각하기는 했었다.
걱정한 바와 달리 술술 말이 잘 나오는 게 리듬 게임에서 몇십 콤보를 그대로 찍어 이대로만 끝나면 레벨 깨트리는 그런 상황을 현실에서 겪는 기분이었다.
시작 전에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전에 혼자 줌 클래스를 개설해 들어가 몇 번 연습을 해봤을 때도 말의 버벅임이나 매끄럽지 않은 진행 등의 실수들이 잦았던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 플로우를 피부로 의식하자마자 실수를 연발할 게 틀림이 없었으니 최대한 그 생각으로부터 멀어지자, 지금 이 문장 그리고 바로 다음 문장에만 천천히 집중하자고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그마저도 밀어내 버렸다.
이론적 배경과 논문의 목적을 설명한 뒤에는 인터뷰 작업과 설계 방법으로 넘어갔다.
인터뷰는 총 4개 국가에서 교육 기관에서 근무하거나 상위 교육기관에서 학위를 습득한 8명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각 참가자는 국가당 2명으로 설정했다.
개개인이 쌓아가는 내러티브를 기록하기 위해 case study approach 방법이 구현되었으며, 집계된 인터뷰 답변의 분석 방법으로는 content analysis를 활용해 답변을 분석 및 연구했다.
인터뷰 질문을 작성하는 데 있어서 델피 테스트를 통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해 질문을 최종 점검했으며, 참여자들의 상이한 환경과 문화권에서 기인한 가치관과 통찰력 깃든 답변들을 넓은 시각으로 담을 수 있도록 개방형 질문으로 끝맺음했다.
인터뷰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총 3가지 분야(비판적 교육학, 비판적 다문화 교육, 비판적 외국어 교육)로 나누어 설정한 뒤 그 안에 각각 4가지의 연계된 질문이 들어가도록 구성하였다.
이와 같이 설정한 이유는 비판적 교육학이 다문화 교육과 외국어 교육을 엮는 끈의 역할이자 서로를 잇는 가교가 되기 때문이었으며, 그 연계성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 분야의 핵심 개념에 대한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영역별 4가지의 질문을 수록하여 인터뷰는 총 12개의 질문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으며, 각각의 질문은 그 분야의 핵심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개별 질문들끼리도 연계성을 가질 수 있도록 설계했다.
예를 들어, 비판적 교육학 분야에서는 1) 비판적 교육학의 목적 2) 학습자의 경험을 근간으로 한 학습 설계 3) 커뮤니티 기반 학습 4) 협동 학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이 수록되어있다.
비판적 다문화 교육 분야에서는 먼저 참여자가 속한 교육적 환경을 조사한 뒤, 의미 있는 논쟁을 위한 공동체 기반 학습, 반인종차별 운동이나 코로나와 같은 사회적 이슈를 활용한 학습, 학습자 간 협동학습의 쟁점이 주요 포인트였다.
마지막으로, 비판적 외국어 교육 분야에서는 문제 제기 이론에서 나오는 순환 모델(Wallerstein & Auerbach, 2018)을 차용해 듣기(listening)-대화(dialogue)-실천(action)으로 이어지는 개념을 소개하였고, 수록된 4가지 질문들도 듣기, 대화, 실천의 개념을 학교에 도입하는 것에 대해 물었다.
이렇게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참여자들의 통찰력 있는 답변을 얻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학교에서 비판적 다문화 교육 및 언어 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한다.
주요 세 가지 제안은 교육학자들의 연구 사례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는데 먼저 2015년 로드리게즈가 발표한 deep culture를 활용한 수업이다.
겉핥기 식의 이론 중심 수업이 아닌 실제 경험과 빈번하게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례들을 바탕으로 문화 충돌 내지는 문화적 담론을 학생들이 소규모 토론이나 협동 과제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가까이 관찰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Koutlaki & Eslami (2018)가 주장한 학습 언어를 매개물로 이용한 문화 수업이다.
모국어와 학습 언어를 직접 번역하면서 그 사이에 놓인 문화적 차이를 학생들이 스스로 발견해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Engelking (2018)의 학생들이 직간접적으로 겪은 문화적 Critical Incident 개념을 활용해 문화 및 언어적 차이를 인지하고, 나아가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함양하는 활동이다.
마지막으로 이어진 본 논문 발표의 결론은 이러하다.
이 논문은 비판적 교육학, 다문화 교육, 그리고 언어 교육의 세 가지 영역을 잇는 연결고리를 마련하고자 한 것에 의의를 찾았으며, 인터뷰 작업 결과 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하는 참여자들 대다수가 이러한 목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 사회의 발전 방향에 따른 미디어를 활용한 비판적 교육학을 향후 과제로 삼고자 하며, 본 연구를 통해 미래 다문화 교육의 발전을 기원한다는 말을 끝으로 발표를 끝맺었다.
준비한 대로 발표는 무사히 마쳤지만 바로 훔치고 들어오는 교수님들의 질문들이 이어졌으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옆에 펼쳐놓은 종이에 질문을 요약해서 받아 적고 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마련했어야 했다.
첫 번째 교수님의 질문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내가 개인적으로 비판적 교육학을 활용할 수 있는 적용 방안에 대한 예시와 학교 단위 혹은 국가 단위로 정해진 다문화 교육 커리큘럼을 실용적으로 바꾸기 위해 어떤 실재적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서였다.
나머지 두 교수님들도 각각 세 가지 질문을 하셨다.
질문들은 다른 문화권과 생활 반경에서 가르치는 교육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다문화 생활권에 거주하지 않는 교사나 학생들의 경우 어떤 다문화 교육을 디자인할 수 있는지, 비판적 교육학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것이었다.
답변을 준비하면서 진작에 예상 질문과 답변을 미리 써놓기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미리 제작해놓은 답변 몇 개를 이끌어다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내놓을 수도 있었거니와 그 답변의 내용을 가감하여 더 보완된 답을 빠른 시간 안에 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1분여 만에 바로 답을 내놓는다는 건 나로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지난 3년 반 현장에서의 교직 경험이 논문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질의응답 시간에도 요긴하게 활용되었던 점은 내가 예측하지 않았지만 얻은 부수적 이득이었다.
교수님들이 주신 질문들 중 학교에서의 구체적 실천 사례, 적용 방안, 문화권에 따른 다문화 교육 방향 등은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같이 한 프로젝트나 수업 활동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어서 더 탄탄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었다.
또, 경험에서 우러나온 소감이나 배운 점은 특히 내가 직접 분석한 수업 활동에서부터 출발한 것들이기 때문에 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모든 답변을 끝내자 발표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조금 지나있었다.
교수님들은 저마다 구체적 내용을 담은 피드백을 제공해주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포르투갈의 문화적 배경을 설명한 부분에 있어 다양성의 설명이 부족했다.
스스로의 경험에서 끌어낸 주제 선정이 아주 좋았고, 거기에 곁들여진 연구 과제 및 도출한 결론이 논리적으로 체계적이었다.
비판적 교육학을 다문화 교육과 언어 교육에 연결한 시도가 참신했으며, 실천 방안을 이론가들의 주장에 근거하여 마련한 점도 세심했다.
인터뷰에 적용된 질적 연구 방법과 연구자의 해석 또한 명료했다.
논문 발표가 끝나갈 시점에는 더 이상 평가를 받는 자리가 아닌 내가 여태 작업한 결과물을 함께 공유하고 의견을 나눔으로써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자리로 느껴져 몸과 마음이 이토록 편할 수가 없겠다는 한가로운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영 자신이 없어 도망치고만 싶었던 이 시간이었는데 누구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과연 이 과도한 에너지와 마르지 않는 기쁨의 원천은 무엇일까?
2년에 걸친 석사 과정이 성황리에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는 것과 그 마지막 여정을 친구들과 부모님, 지도교수님까지 마지막으로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마침내 연구 결과를 선보인 자리에서 들은 긍정적인 피드백이나 칭찬과 따뜻한 격려의 말씀들.
이 자리를 끝내는 즐기게 된 내 스스로의 에너지는 이 대장정을 끝까지 매듭지은 스스로가 대견하다고 외치는 내면의 소리로 울려 퍼져 온 몸을 짜릿짜릿하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