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의 시작
코임브라는 많이 들어는 봤어도 그저 조용하고 한적한 대학 도시로 알고 있어서 아마 친구가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면 걸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석사 과정을 마무리하는 이 시기에 코로나로 인해 다들 뿔뿔이 흩어져있는 사정이라 마치 드래곤 볼을 모으듯이 직접 걸음 하지 않으면 방방곡곡에 살고 있는 친구들 얼굴마저 마지막으로 보지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찾아들었다.
실제로 그나마 리스본에 있는 친구나 얼굴 마주 보며 밥이라도 먹지, 비행기로 두어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스페인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친구들과 교수님조차 얼굴을 못 본 지 거의 일 년이 지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교수님들은 마지막 졸업 세리머니를 온라인으로 대신하는 아쉬움과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올 겨울 상황이 나아진다는 전제 하에 다 같이 스페인에서 만나기로 약속 아닌 약속을 우리와 했다.
하지만 그건 또 겨울 가면 어떤 식으로 상황이 전개될지도 모르는 것이고, 운명에 맡기기에는 몇 번씩이나 급박하게 변경된 석사 일정을 이미 여러 번 고통스럽게 겪었으므로 이번에는 내가 주도적으로 길을 떠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친구를 만나는 길, 내가 개척해나가기로 말이다.
티파는 인도네시아에서 공부한 친구이며, 나보다는 한 살 어린데도 불구하고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신념이 확실해서 학문에 정진하는 대단한 아이다.
평소에 한국 드라마를 즐겨본다는 티파는 내게 언니라는 말과 고마워, 안녕, 인사 폭격기 수준으로 자기가 아는 한국말을 줄줄 4.3.4 시조처럼 읊기도 했다.
불닭볶음면의 스릴을 아는 그녀는 스페인에 있을 때부터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와준 학우이자 여러모로 도움을 서로 주고받은 사이라서 끈끈한 동지 의식을 함께 쌓아나갈 수 있었다.
그런 그녀는 내가 코로나로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을 때도 젠과 함께 리스본을 지켰다.
그러던 중 학기가 마무리가 되고 여름이 되자 젠은 해변가 도시 페렐로 이사 갔고, 티파는 대학 도시인 코임브라로 이사 갔다.
젠이 파도를 쫓아 페렐로 갔다면 티파는 지도교수님을 따라 코임브라로 간 케이스다.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만큼 대학 캠퍼스와 가까이 있다면 훨씬 더 효율적인 교수 면담과 프로젝트 참여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코임브라에 우연찮게 자리 잡게 된 티파에게 리스본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학기가 끝나기 전에 찾아가도 되겠냐고 러브콜을 날렸다.
바로 만남이 성사되나 싶었지만 아쉽게도 무산된 것은 내 개인 일정이 예기치 않게 생겼기 때문이었고,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렇게 서로 연락을 이어나가다 7월 말 논문 디펜스 일정이 모두 끝나고 퍼뜩 든 생각은 이제부터 신명 나게 포르투갈을 누벼야 된다는 무언의 깨달음이었다.
당장 9월에 복직이었고, 이미 메일함에는 1학기 담임 선생님께서 보내 주신 업무 인수인계 파일까지 압축파일로 쌓여있는 와중이었다.
이판사판이다, 이대로 쭉 가보자고. 마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목적의식은 삽시간에 빛을 발해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에어비앤비 예약, 완료. 버스 예약, 완료. 진짜 가는 건가, 가는 건가? 스스로의 물음에 답하기 전에 모든 결제 과정은 끝났다.
이제 가는 거다, 코임브라로.
여정은 고달팠다.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들지만 리스본에서 생활하면서 얻은 것은 다름 아닌 멀미였다.
굽이진 비탈길과 좁은 돌길이라는 환상의 조합으로 탄생한 경이로운 탄생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어디든 바퀴 4개 달린 운송 수단이면 강도의 차이일 뿐이지 멀미를 겪고는 했는데 코임브라는 버스로 자그마치 2시간 30분 가까이나 걸렸다.
재작년만 하더라도 학기 마무리 기념으로 간 학급 여행에서 편도 7시간 버스를 타고 오갔으며, 코르도바에서 리스본으로 올 때도 야간 버스로 8시간 버스를 탔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정말 애석할 따름이다.
코임브라 행 버스에 몸을 맡겼을 때만 해도 처음에는 나름 안정감 있는 탑승감이다 싶었는데 또 30분을 남기고선 카트라이더를 탄 마냥 속이 메스꺼워졌다.
예상치 못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겨우 도착한 코임브라 버스 정류장은 다행히 숙소와 겨우 20분 남짓한 거리여서 뒤집어진 속도 달랠 겸 바깥공기를 조금씩 쐬고자 우버 대신 걷기를 택했다.
걷는 길에 주변을 살펴보니 경관은 리스본과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신호등 깜박거리는 표시가 리스본보다 귀엽다는 것과 도로와 빌딩들이 아담한 느낌을 준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리스본을 보정 어플로 축소시키다면 아마 코임브라의 풍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첫인상으로 짤막하게 들었다.
숙소 앞에 다다라서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생각해보니 셀프 체크인이라고 했으면서 열쇠의 위치나 인터콤 비밀번호를 고지받은 적이 없었다.
꼭 피곤해서 길바닥에라도 눕고 싶을 때 이런 괴로운 일들은 연속으로 일어나더라.
집주인에게 절박한 메시지를 줄줄이 남기고도 답장이 안와 통화 연결을 시도하기를 네 번째, 겨우 받은 주인이 하는 말이라고는 알려주기를 깜빡했다는 별 시답잖은 이유에 갖은 짜증이 밀려들었지만 일단 집에 안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신속히 번호를 조달받고 한달음에 3층 꼭대기 층으로 향하였다.
물론 엘리베이터가 없는 좁고 기다란 건물이었기에 그 한달음마저 마음뿐이었지, 육체는 그 누구보다도 중력의 부하를 강하게 받고 있었다.
겨우 거실에 짐을 풀게 된 것이 오후 4시 반. 친구와는 오후 7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친구가 예약한 이 근방에 유명한 대구 생선요리 집에 8시경으로 예약을 해놓았지만 점심을 굶었는 데다 멀미로 부글부글 끓어댄 속을 진정시키고 보아야 했다.
잇단 비극적 사건으로 잔뜩 예민해진 신경을 가라앉히려고 무딘 노력을 하며 핸드폰 스크롤을 신중하게 내렸다.
그래, 오늘 간식은 거창하게 가자. 피자 한 판과 리조또.
이는 가파른 꼭대기 층에 위치했기에 아마 오르내리기가 수월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예상되어 그 횟수를 최소한으로 만들고자 최대한의 물자를 일단 수송하고 보자는 계산의 결과였다.
피자와 리조또는 대만족이었으나 후에 있을 성대한 식사를 위해 조금은 위장에 공간을 비워놓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진으로 가득 찬 앨범 용량을 살피듯 배부름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가늠해보았다.
정말 마지막이다, 결연한 마음으로 리조또를 한 수저 입에 야무지게 넣고 남은 피자와 리조또 박스를 정리해 냉장고에 도로 넣었다.
짧은 식사를 마치고 나니 바로 친구를 만나러 나갈 시간이었다.
아까 전에 바깥에서 한참을 기다린 탓에 본의 아니게 급박한 외출 준비가 이어졌는 데다가 정말이지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여서 얼른 보고 싶은 마음도 들어서 요란법석을 떨며 대문 밖으로 나섰다.
초행길인 데다가 골목길들이 너무 좁게 여러 갈래로 나있어서 구글 지도를 보면서 가는데도 여러 번 발걸음을 멈추고 살펴가야 했다.
친구랑 만나기로 한 곳은 산타크루즈 교회(Igreja de Santa Cruz)였는데 그곳으로부터 시내가 시작되는 곳이어서 교회와 10분 떨어진 곳에 두 밤을 더 보낼 에어비앤비를 잡은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에도 숙소를 잘 잡기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를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구글 지도에 거의 고개를 처박으다시피 하면서 가다가 어느샌가 골목길이 끝나고 탁 트인 광장의 시작 지점에 서 있다는 걸 환하게 내리쬐는 빛의 밝기로 뒤늦게 감지했다.
교회는 사선으로 감싸 오는 따뜻한 햇빛을 머금어 밝은 상아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는데 그 웅장한 크기에 한 번 놀라고, 더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새겨진 조각들의 정교함에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국교가 가톨릭이거나 기독교인 나라들은 도시마다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이름난 교회나 성당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들의 순위를 감히 매길 수 없는 것은 종교가 주는 신성함은 물론이요, 둥지를 튼 지역에 녹아들다시피 본연의 특색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사 이곳, 산타 크루즈 교회보다 더 크고 더 섬세한 교회들은 존재한다 할지어도 코임브라 주민들의 열띤 기도와 사랑을 받는 곳인 만큼 특별한 기운을 뿜어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려있는 문틈 새로 성경 구절을 다 같이 낭독하고 있는 소리가 들리길래 친구가 오기 전에 한 번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을 빠르게 접었지만 그 문 앞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독특한 기분이 들었다.
낭독하는 소리가 잦아들고 설교가 시작되려는 시점에 가까워지는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1년 반 만에 만나는 티파는 변한 것 없이 밝고 명랑했는데 그 모습은 코로나 전후의 달라짐을 한 치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더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이 섣부른 판단은 이내 곧 깨졌는데 티파와 얼싸안으며 조우를 마치고 이어지는 시간 속에 나눈 대화들로 그동안 얼마나 큰 고심을 안고 리스본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결심했는지, 코로나가 덮친 도시에서 휩쓸리지 않고 두 다리로 서있기 위한 노력들이 어땠는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꼬불꼬불 이어지는 돌길을 걷고, 연이어 나타나는 계단층을 오르며 도시를 탐사했다.
그 안에 숨겨진 더 많은 굽이진 길들과 더 높은 곳으로 데려다 줄 돌계단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우린 저녁을 먹기 위해 모험을 이만 멈추고 내일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
티파가 예약한 레스토랑은 포르투갈 전통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곳으로 내가 미리 구글에서 알아본 식당과 일치하는 곳이었는데 코임브라에 도착하기 전 서로 메신저로 네가 예약하니 내가 하니 하다가 동시에 예약해버리고만 웃픈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식당으로 향하기 전 이미 한참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반경이 좁은 동네라서 그런지, 티파가 지름길로 골목길 사이사이 잘 안내를 해서 그런지 금방 식당에 도착했다.
8시를 조금 넘겨 도착한 식당에 우린 앉자마자 어떤 메뉴를 선정할지 열띤 상의를 나눈 끝에 문어밥과 다양한 야채를 곁들인 대구 요리를 시키기로 했다.
지난번에 데일라와 문어 샐러드를 시켜본 적은 있어도 문어밥은 처음이라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궁금했다.
내 머릿속으로 상상한 문어밥은 리조또같이 걸쭉한 모양새로 나올 줄 알았는데 정작 뚝배기같이 무거운 냄비에 담겨 나온 요리는 뜻밖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칼칼하다, 시원하다, 라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흡사 해장국 바이브를 물씬 풍기는 국물에다 밥을 비비거나 볶았다기보다는 말았다는 표현이 적당해 보였고, 그 안에 숭덩숭덩 잘린 문어 조각들이 한 입 뜰 때마다 오도독오도독 고소하게 씹혔다.
뒤이어 나온 대구 요리는 한편에 찍어먹을 수 있는 묽은 소스와 당근, 으깬 감자, 병아리콩, 초록 잎채소까지 데쳐서 곁들여 나왔다.
아, 이보다 완벽한 환영 요리가 있을까.
뜨끈하게 가슴 깊은 곳까지 뎊혀주고, 짭짤한 풍미에 은근하게 느껴지는 고소함까지 아주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혓바닥의 모든 미뢰들을 한 번씩 눌러주는 그 기세에 수저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배가 느지막이 불러올 쯤에는 산보를 가야 되지 않겠냐며 겨우 몸을 일으켰는데 바깥바람을 쐬자마자 온 몸을 찌르르 울리는 이 느낌은 순전히 맛 좋은 음식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저녁의 만족감이 최정상을 찍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미 시간이 늦어 산보는 짧게 마쳤다.
그 와중에 들른 곳은 야외 공연이 있었던 카페였는데 우린 들어가진 않고 바깥 한편에 서서 연주를 잠깐 지켜보았다.
기타 연주자의 손가락이 짚는 곳마다 흘러나오는 경쾌한 선율을 뒤로하며 우리가 향한 곳은 코임브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카페였다.
어디를 가자고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티파가 이 거리는 이렇다, 저 건물은 저렇다 설명을 해주는데 카페를 마침 지나치게 된 것이고 이왕 온 김에 디저트나 먹어보자 생각이 들어 안을 살피고 들어갔다.
밤늦은 시각이어서 영업을 하는지가 관건이었는데 계산대 뒤에 서 계시는 분이 주문을 받길래 케이크 한 조각과 차를 한 잔씩 시키고 자리를 잡아 앉았다.
저녁은 네가 샀으니까 디저트는 내가, 티파는 누가 말릴세라 카드를 내밀었다.
티파는 2박 3일의 일정으로 내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코임브라를 방문한다는 것을 듣자마자 본인이 앞장서서 모든 계획을 추진하고 세웠다.
그러니 난 매번 음식으로 보답하고자 하는 내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운 것뿐이었는데 저녁 식사를 사는 것도 티파의 만류가 너무 거세서 겨우 겨우 해낼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석사 과정 중에 만난 친구들 덕분에 한창 혼자 여행을 즐기다가 석사 시작한 이후로는 모든 여행을 친구들과 함께한 것 같다.
이번 코임브라 여행마저도 도시로 오는 교통수단만 혼자 타고 온 것뿐이지 여기 와서는 바로 친구와 접선해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고 있지 않은가.
혼자 여행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같이 여행의 참맛은 가짜가 흉내 낼 수 없는 진짜배기다.
이 좋은 음식, 이 멋진 풍경, 이 훌륭한 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이 바로 곁에 있어서 더 맛있고, 더 멋지고, 더 들뜨는 순간에서 빛을 발하는 같이 여행의 참맛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