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었다.
작년 리스본에서 새 학기를 시작한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꼭 가야 한다던 도시.
다른 에라스무스 학생들과 대화를 할 때마다 신트라 가봤냐며 꼭 한 번씩 언급이 되었던 도시.
하물며 교통 카드마저 한 달 정기권 끊으면 그 도시까지 갈 수 있으니 값이 비싸게 느껴지더라도 그곳을 간다 치고 리스본 카드를 만들라고 했었지.
그럴 때마다, 아 갈게, 간다, 진짜 나 갈 거야, 내가 꼭 가고 만다, 라며 얼버무렸던 바로 그 도시.
정말 지긋지긋하게 듣기도 들었지만 실제로 내 주변 친구들이 모두 다 한 번씩은 가는 바람에 인스타 스토리로도 너무 많이 봐서 거의 제2의 고향 급으로 친숙해지려는 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루고 미루다 설마 한국 귀국할 때까지 못 가는 거 아니냐, 조바심이 스물쩍 올라오려다 찰나에 어쩌다 보니 어라, 에어비앤비를 결제했네, 그럼 가야지 뭐, 하는 싱거운 루트로 신트라행이 결정되었다.
신트라 여행이 이렇게 발등에 불붙은 듯 속행된 이면에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들도 더러 있었다.
먼저, 한국으로의 귀국을 얼마 안 남기고 포르투갈 곳곳을 여행하던 중에 리스본에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직 가지 않은 곳들 중 하나였다는 것이었다.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으면서 심지어 우버를 타고 20 유로면 갈 수 있는 곳이기에 별다른 수고 없이 갈 수 있는 목적지였다.
또 다른 점은 최고의 가이드와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함께 갈 동행자로 그 친구의 의사와는 별개로 친구 한 명을 스카우트했는데, 역사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평소에도 쏠쏠한 역사 지식을 뽐내기 때문에 여행을 같이 다니다 보면 아는 만큼 보인다고, 옆에서 계속 뿌려대는 배경지식들로 절로 식견이 넓어지는 이점이 있다.
또, 290센치 거인으로 살래, 29센치 소인으로 살래 마저 치열한 인문학적 고민으로 둔갑시키는 능력을 지닌 이 친구와 함께 보낸 시간들을 반추해본다면 확실히 같이 여행을 다닌다면 그만큼 재미있는 추억도 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에어비앤비 앱을 켜서 스크롤을 쭉쭉 내리다 은근히 괜찮은 가격에, 꽤나 괜찮은 위치에, 제법인 경관을 지닌 숙소를 예약한 지 며칠이 지나고서야 여행을 겨우 반나절 앞두고 부랴부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우리의 계획은 이러했다.
오후 2시부터 체크인이 가능했으므로 12시쯤에 집을 나서서 신트라로 이동한 후에 가방과 짐을 숙소에 맡기고 나와서 어디 한 군데를 둘러보고 다시 돌아가자, 하는 막연해 보이는 것 치고는 구체적이고, 상세하다기에는 뭔가 허술한 계획.
그렇게 말을 맞추고 배낭과 과자만 잔뜩 든 쇼핑백을 들고선 우버에 탔다.
물론 가는 길에 멀미는 예견된 일이었고, 나는 담담하게 멀미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도착하기 직전에 신트라 시내로 접어들면서 시작된 꼬불거리는 길에 요동치는 뱃속을 멈출 길이 없었다.
차가 멈출 때까지 겨우 버티기는 했지만 조금만 더 오래 차 안에 있었으면 무슨 봉변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리자마자 잠시 골목길에 앉아서 마스크를 내리고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조금 살 것도 같았고, 그 길로 바로 숙소로 향했다.
아직 시간은 많이 일렀고, 우린 예정했던 대로 숙소에 짐만 맡기고 간단히 가벼운 짐과 물만 작은 가방에 따로 챙겨서 바깥으로 나왔다.
숙소 위치가 지도에서 확인한 것처럼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어서 여러모로 가려고 계획한 관광지들이나 상업 지구와 가까워서 편리했다.
다른 때도 그렇듯이 이번 여행도 사실 엄청난 준비를 하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기에 일단 처음 시작 지를 어디로 잡을까 시내 초입에 서서 갈팡질팡을 조금 했다.
물론 친구가 이미 신트라를 두어 번 와본 적이 있어서 우리가 돌아볼 곳을 몇몇 군데 정해놓기는 했지만 다시 2시로 숙소에 돌아가야 한다는 강한 계획형 인간이라서 애매하게 남은 시간을 어디까지 가야 꽉 채워서 쓸 수 있을지를 가만히 서서 고민했고, 그 결과 어차피 오늘 가기로 했던 헤갈레이라 별장(Quinta da Regaleira)을 먼저 가보기로 했다.
올라가는 길에 먼저 마주한 것은 신트라 왕궁이었다.
거대한 원뿔 모양의 지붕을 하고 있어서 못 보고 지나치기가 더 어려운 이곳은 포르투갈 왕실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신트라는 말 그대로 녹음이 우거진 곳곳에 숨겨진 보석들처럼 왕궁과 별장들이 있는데 이 또한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서 건축물을 쌓아 올린 지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수십 세기 전의 그 옛날을 생각해본다면 외부인들의 출입이 그나마 쉬웠을 초입 부근에 신트라 왕궁이 있고, 그곳에서부터 조금 더 올라간 중턱에는 헤갈레이라 별장이 있는데 그 지점도 충분히 높은 지대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조경과 아래로 펼쳐지는 녹음의 전경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헤갈레이라 별장이 위치한 지점에서 방향을 틀어 더 가파른 길을 지나 그 위로 향해 올라가면 무어 성과 페나 성이 나오는데 말 그대로 전략적 요충지이자 요새로 쓰일법한 성곽 둘레길을 따라 그 끄트머리 꼭대기에 성이 위치해있는 것이다.
각 용도에 걸맞은 곳에 위치한 왕궁, 별장과 성만 해도 볼 것이 한 트럭인데 요목조목 난 골목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구경하는 재미까지 잡으려면 신트라라는 낯선 도시를 하루 당일치기로만 둘러보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스스로의 나태함을 믿고 1박을 자처한 결정이 오히려 선견지명으로 느껴졌다.
여러분은 그 두꺼운 사회과부도에서 나름 큰 지분을 차지하던 계단식 논밭의 지형을 기억하는가.
신트라는 그와 유사한 구조를 자랑하고 있는데, 신트라 왕궁도 그 계단식 지형에서 아예 밑바닥은 아닌 나름의 중저층인지 신트라 왕궁에만 올라와도 사실상 그 아래 너른 벌판과 오밀조밀하게 세워진 마을들을 멀찍이서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다.
이 정도면 더 위로 가면 거의 항공 샷 수준으로 아래가 내다보이는 거 아닐까 싶은 의구심이 들만큼 이미 왕궁에 올라왔을 쯤이면 아래 마을이 작게 찍힌 점들의 집합으로 보인다.
우린 왕궁에서의 휴식을 짧게 갖고 다시 길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갈레이라 별장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다다랐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요인이 나타났으니 공사장 먼지를 휘날리는 포크레인이 그것이었다.
근처 어디에 공사 현장이 있는 모양이었는데 사람들은 자유자재로 오가고 있으니 계속 올라가도 되겠다 싶어 길을 재촉하려는 중에 두 번째로 닥친 방해 요인이 있었으니 이는 계획형 인간인 친구의 촉박한 시간 계산이었다.
“여기서 더 올라갔다간 체크인 시간에 늦을지도 몰라.”
“그래도 6시까지 체크인받으니까 그때까지만 가면 되는거 아니야?”
“아까 데스크에선 2시까지 가기로 했잖아.”
“어차피 개인 에어비앤비도 아니고 호텔처럼 운영하는데 리셉션은 저녁까지는 열려있다잖아.”
길바닥에서 잠시 토의 시간을 가졌다가 결국에는 돌아가자는 합의점에 도달하였다.
덥기도 덥고, 먼지바람 뚫고 가긴 싫으니 포크레인이 지나갈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하는 데다가, 점심시간에 다가와서 배는 출출해지고, 어차피 체크인 시간이니 숙소에 들어가서 점심시켜먹으면 딱이겠거니 싶었다.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하나 그때, 우린 발걸음을 돌리지 말았어야 했다.
에어비앤비로 돌아오고 나선 수난의 연속이었다.
일단 체크인부터가 문제였는데 난데없이 코로나 백신 접종 확인서를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친구는 이미 2차까지 접종을 마친 상태였지만, 난 한국에서 접종 예약을 마친 상태라 이곳에선 증빙 서류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린 숙박업소로 등록이 되어 있어서 정부가 새로 발표한 법에 따라서 들어오는 손님마다 확인할 수밖에 없어요.”
“저희는 에어비앤비 어플을 통해서 예약을 했는데 이 부분은 어플 내에는 고지되지 않은 내용 아닌가요?”
“업소 측에서 고지할 의무가 있는 게 아니라서요. 정부에서 발표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실시하는 규정일 뿐이라서 시설을 이용하는 손님들이 알아서 준비해와야 할 부분이에요.”
숙박업소 측에서 어플 상으로 미리 내용을 게시하지 않는다면 굳이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친구 같은 경우는 코로나 소식에 예민한 편이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코로나 관련 뉴스를 챙겨보는데도 불구하고 몰랐다고 했다.
데스크에서 시간을 소모해봤자 별 다른 소득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다른 방도가 없을까 물어보았더니 리셉션 직원이 위로 꺼내서 보여주는 것이 있었다.
“간이 검사 키트예요. 이걸 방에서 한 후에 음성 판정 나온 결과를 사진으로 찍어서 이 번호로 보내주세요.”
그렇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뜯지 않은 코로나 키트를 2.60 유로에 구매해서 팔자에도 없는 간이 검사를 하게 되었다.
지난해, 한국에 잠시 귀국했을 때 한 번 해본 검사지만 이건 비전문인이 해서 그런가 왜 이렇게 코를 깊숙이 찔러대는 것이며, 그 안에서 빙빙 돌리는 것은 내게 어떤 억하심정이 있길래 하는 파렴치한 행위인가.
양쪽 콧구멍이 처참히 쑤셔진 후에 십여분을 기다린 뒤 음성 줄이 뜬 것을 확인하고 겨우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난관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음성 확인 후 곧바로 시킨 피자가 배달 도착 예정시간이 한참을 넘긴 뒤에도 올 기미가 안 보이는 것이었다.
심지어 친구가 객실을 찾아오기 어려울까 봐 아예 현관 바깥에 나가 서서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결국 배달은 예상 시간을 훨씬 넘겨 도착해 점심 식사가 한참 미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는 후에 치명적인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야, 이거 실화?”
“뭔데, 또.”
친구가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며 날 부르는 소리가 불안 불안하다 했다.
“지금 몇 시야?”
“거의 4시 다 돼가는데.”
“헤갈레이라 별장 5시 반에 문 닫는대.”
아까 문 앞까지 와서 걸음을 되돌린 그곳이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반 후에 문을 닫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거기까지 올라가는데도 최소 삼사십 분을 잡아야 하는 와중에 우린 지금 피자를 입에 물고 있는 참이었다.
다른 데를 찾아볼까 했더니 무어 성도 여섯 시에 문을 닫고 그 근처에 위치한 페나 성도 마찬가지였다.
“망했네. 야, 일단 먹어.”
또 피자는 왜 이렇게 맛있냐, 우선은 먹고 보자, 우린 말없이 묵묵히 피자를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