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허망함에 빠져서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다.
일단 피자나 먹자는 말과 함께 전투적으로 한입 한 조각을 시전 하였고, 결과는 빠른 시간 안에 저녁 시간이 다 되어 먹는 점심을 마칠 수 있었다.
시간이 촉박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 스피드.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한 우리는 오늘의 목적지를 6시에 문을 닫는다는 무어 성으로 설정하였다.
헤갈레이라 별장은 그보다 더 이른 5시 반에 폐장을 하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지금으로서는 미루는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무어 성에서 20분 떨어진 곳에 페나성이 있었으며, 여기 오기 전만 해도 그 성의 존재를 몰랐던 나였지만 시간이 촉박해 못 갈 수도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괜히 페나성만 바라보고 산 사람처럼 절절함이 밀려들어 왔지만 애달픈 슬픔을 안고 채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무어 성과도 같은 방향이니까 운이 좋으면 갈 수라도 있겠지, 희망적인 생각을 품었지만 여유로운 일정을 위해 1박을 자처한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황은 굉장히 급박하게 흐르고 있었다.
가방에는 정말 필요한 물품들만 가볍게 챙기고 부랴부랴 길을 나섰다.
그렇게 날아갈 듯 떠나간 길이 돌아올 때는 4족 보행의 길이 될 줄은 미처 몰랐지.
어차피 페나성과 무어 성으로 향하는 길은 어느 지점까지는 쭉 같이 올라갔다가 두 갈래길로 나뉘어 방향만 다르기 때문에 올라가면서 시간을 다시 계산해보기로 했다.
잔뜩 기합이 넣고 땅만 보고 걸어가기 신공을 펼쳐도 모자를 시각이었지만 우리의 발을 묶어버리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당연히 가파른 경사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끝내주는 경치였다.
경사길이야 어느 정도 예상은 했고, 전에 헤갈레이라 별장을 올라가는 길만 해도 가파름을 대강 체감했으므로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리스본에서도 이 정도 경사는 슈퍼 가는 길에도 만나기 십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주변에 가는 길이 내가 생각했던 단순한 등산로가 아니었다.
가는 길은 켜켜이 쌓여 마치 크레이프 케이크를 오르는 느낌이 들었는데 한 층을 더 오를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다르게 불어오는 바람과 비스듬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만들어내는 음영으로 색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올라가는 길 자체도 나무와 풀숲이 우거진 곳이어서 그 주변을 둘러보아도 초록의 싱그러움을 한껏 느낄 수 있었는데 잠시 줄 지어 선 나무들이 끊겨있는 구간에서는 온 마을의 풍경이 여지없이 자취를 드러냈다.
역시 다섯 시가 가까이 되어서야 정상을 오를 사람들은 없는 건지 몇몇 사람들이 드문드문 하산길을 밟는 것 제외하고는 숲 속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공기조차 풍경의 일부를 이루는 것처럼 묵직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는데 아마 사람이 많은 시간대에 왔다면 이런 숲의 진면모는 목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니 딱히 서두를 필요도 없을 것 같았고, 오히려 신트라의 쉽게 볼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만 같아서 더 천천히 발걸음을 떼게 되었다.
신트라는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난 무어 성에 충성하자, 생각을 하며 카메라를 들었다.
시야에마저 넘쳐흐르는 눈앞의 광경이 카메라 렌즈 속에 제대로 담길 리가 없었지만 그 일부의 일부라도 보존하고 싶었다.
비탈길을 오르고 한 번씩 옆으로 잠깐씩 비켜서서 쉬어주면 금세 무어 성 입구에 도착하게 된다.
마지막 입장 시간을 이십여분 앞두고 들어간 우리는 그제야 한숨을 좀 돌리려나 했는데 그건 헛된 희망이라는 것을 아주 금방 알게 되었다.
고개를 올려 성의 끄트머리 지점을 향해 성곽을 따라 시선으로 좇는 와중에 한참을 올라가서야 겨우 그 윤곽선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웬일인가.
아무래도 성의 꼭대기까지 가려면 또 어지간히 걸어야 되나 보다 싶은 막연한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또 착실하게 몸을 앞서 나가고 있었다.
정말로 높긴 높구나 체감할 수 있었던 건 아직 성벽 둘레길을 오르기도 전인데 벌써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마을은 작은 레고 블록처럼 보였다.
위로 점점 올라갈수록 높이는 끝도 없이 더해져 여기까지 오니 나 스스로가 땅보다 하늘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희한한 의문까지 생겼다.
오르내리는 사람이 채 스무 명도 되지 않는 건 여섯 시를 넘어가는 시간 때문일 것이고, 이제는 아예 입구까지 닫았을 것이니 여기서 더 들어올 인원도 없어서 성내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길을 오르고 오르다 잠시라도 톱니의 모양을 한 성벽 너머로 아찔한 높이가 느껴지면 팔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가 뜨끈한 바람이 한번 불면 가라앉았다.
이제는 아예 바깥은 내다보지도 말자, 마음의 채비를 하고 묵묵히 걸어 오르니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지점에 도착했다.
무어 성의 정상이었다.
세상의 끝이 내다보이는 것만 같았다.
정상에서는 도시 전체가 품에 안겨진 듯이 보였고, 그 둘레를 따라 흐르는 강줄기마저 눈에 띄었다.
흐르는 강의 반대쪽은 하늘과 맞닿아 꿰매진 것처럼 경계선이 흐릿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불투명해지는 색깔들로 내 눈이 담을 수 있는 이만큼만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루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옛날, 이 성에 살았을 귀족들과 왕은 지금 내가 보는 풍경을 똑같이 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8세기에 이곳의 마지막 돌을 쌓고 요새를 맨 손으로 일구어낸 사람들은 과연 그들의 성이 몇십 세기 동안 멈추지 않고 부는 바람에도 한 점 깎이지 않고 서있을 거라는 것을 알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답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21세기 여름일 뿐이다.
친구와 나는 반지의 제왕에서 나오는 곤도르 왕국이 있다면 이곳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우거진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겹겹이 올라오는 길목들이 마침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끝도 없이 위를 향해 언덕진 길을 오르면서도 이런 장면이 구성되리라는 건 예기치 않았다.
풀숲과 나무들 사이사이로 얼핏 보이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풍경은 무어 성의 사방이 탁 트인 정상에 올라서야 시야에 한 번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확대되어 웅장함까지 갖추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이곳에 서있으니 세상의 모든 생물과 사물을 다 내 발 밑에 둔 것만 같은 묘하게 쾌감이 일어나는 듯했다.
저 멀리로는 페나성이 자그마하게 보였는데 특유의 색과 모양 때문에 놓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페나성은 마치 알록달록하게 색칠한 성냥갑이 풀숲 사이에 꽂혀 있는 것처럼 저 멀리 우두커니 서있었다.
돌벽을 하나씩 짚고 내려올 때마다 그 위에 쌓인 세월이 끈적한 액체처럼 맨 손에 들러붙는 것 같았다.
일수와 연수를 넘어 세기를 거슬러 올라간 사람들의 손길까지 탔을 돌계단은 셀 수 없는 사람들을 보내고 나서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이전과는 같지 않았다.
낮은 곳에서 높은 정점을 찍었다가 다시 원래 출발했던 낮은 제대로 옮겨왔을 뿐인데 단순한 직선거리의 이동이 아닌 도시의 거친 질감이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감각적인 체험이었다.
도시 전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