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보다는
포르투갈에서의 거주가 막바지로 다다를 즘에도 리스본은 여전히 더웠고, 해가 다 저물고 나서야 선선한 바람이 한두 자락씩 불고는 했다.
신트라 여행에 돌아오고 나서는 2년 전에 20만 원짜리 소형 쿠쿠까지 안에 담았던 다 헤져가는 이민가방과 바퀴가 4개 달린 감색 캐리어를 구석에서 끄집어냈다.
가방에는 허옇게 먼지가 내려앉아 방에 들이기 전에 먼지떨이로 먼저 털어주어야 했을 정도니 그동안 짧다고만 생각했던 시간이 결코 그렇지 않음을 폴폴 날리는 먼지가 증명해주는 듯했다.
텅텅 빈 캐리어들을 하나씩 옷가지와 짐들로 채워나가는데 반절을 겨우 채우고 나서는 도저히 뭘 더 넣어야 할지 모르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봉착했다.
처음 스페인에 들고 간 짐만 해도 빈 틈 하나 없이 그득히 담는 바람에 캐리어의 입을 봉하고 나서도 볼록하게 튀어 오른 양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 후로 2년의 시간 동안 난 이 모든 것들을 소진하고 소비했구나 싶었다.
이렇게 된 것은 많은 소지품들이 말 그대로 닳거나 헤져서 버리거나 그나마 괜찮은 상태에 있는 물품들은 기부함에 넣어야 했기 때문인데 물리적으로 그렇게 하기까지는 사실 어느 정도의 애착을 떼내려는 의지가 필요했다.
오히려 반길만한 것이었다.
덕분에 처치가 곤란했던 우쿨렐레와 LP플레이어, 여기서 모은 LP판들까지 다 한 번에 기내 수하물로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소지품을 버리면서도 내가 이걸 착용하고 사용했던 시간들은 내 몸에 남아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 합리적인 근거에 기반한 개인적 소감이었다.
스페인 코르도바의 꽃 축제에서 입었던 체리 원피스는 드라이어에 잘못 넣어서 기장이 한참 짧아져서 버려야 했다.
생일 선물로 야니스에게 받은 스케이트 보드는 1년이 넘도록 함께 스케이트장을 뒹굴고 내팽개쳐진 덕분에 귀국행 비행기에 함께 갈 수가 없었다.
수많은 까진 상처를 얻은 스케이트 보드는 뒤로 남겨지지만 내가 함께 데리고 가는 건 이제는 누구한테도 스케이트 보드를 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나 자신이었다.
왕좌의 게임에 나왔던 알모도바르 성을 올라가게 해 준 흰 하이 컨버스는 중간에 끈마저 닳아한 쪽 신발은 한 단을 내려 신어야 했다.
런던 캠든 마켓에서 수제작한 컨버스는 그래도 웬만한 또래 컨버스들보다는 많은 곳을 여행했을 거라고 장담한다.
햇빛이 쨍할 때마다 입었던 해바라기 점프슈트도 빛 좋은 날 한 번 더 입고 구호물품 상자에 넣어버리기로 정했다.
사실 많은 의류와 소지품들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제 가게들과 중고품 판매 가게에서 구매했어서 오히려 처분하기는 더 심적으로 편안했다.
세컨드 핸드가 써드 핸드로 사용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니까 어쩔 수가 없다, 미안하긴 하지만 적어도 너희들은 두 번 이상의 생을 보낸 셈이니 그 정도 알차게 살았으면 이제는 미련 없지 않겠냐,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분리수거와 물건 처분이 다 끝나고 나니 모든 소지품들은 깔끔하게 하나의 이민가방과 하나의 일반 캐리어, 그리고 검은색 백팩에 모두 공간 여유를 남기면서 담겼다.
꽉 막히게 담기지 않아 안에서 굴러대는 물건들의 소리가 들림에도 불구하고 제법 묵직하게 들어지는 가방들보다 내 마음이 더 무거웠다.
한국에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을 예전의 생활을 다시 내 손으로 주워서 입기가 겁이 나기 시작했다.
교사로 일하면서 입었던 옷은 내 몸에 맞지 않았다고 거듭 생각했고,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다른 길을 체험해보아야 한다는 다짐이 확신으로 변할 무렵 유럽 대학원들에 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가족들과 미국과 프랑스에 잠깐씩 살며, 그 동네 사람이 아니면 모르는 장소들과 우리가 아니면 웃기지 않을 농담들이 만들어졌다.
학교를 다니며 교과서에서 배웠던 내용은 희미해진 와중에 수학 시간에 자에 연필을 꽂아 헬리콥터랍시고 돌리다가 선생님에게 혼났던 날이 더 선명하다.
승용차에 다섯 명이 끼어서 별별 군데를 다 여행을 다니는 와중에는 미술관에서 본 작품보다 고속도로에서 기름이 떨어져 차가 견인되던 날이 더 기억이 났다.
어려서일 수도 있고, 가족들과 함께여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몇 년들의 인상은 어른의 문턱을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진하게 남겨져 있으니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한번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시 말해서, 내 나라가 아닌 곳으로의 여행보다도 정착을 그려보았는데 수없이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아도 그 안에서 겪을 수 있는 불확실한 불행의 경우의 수들은 내가 속한 현실의 형체가 확실한 불행을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의 막연한 계산의 답을 지금 와서 답을 매겨보자면 정답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혹은 오차 범위가 큰 정답이 있으니 그 범위 안에만 자리한다면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답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을 오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로만 푸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이 품은 생각들을 빨간 선이 쳐진 빈 원고지에다 옮겨다 적을 뿐인데 그 결과물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부정한 행위임은 틀림이 없다.
지난 2년간 나와 생각의 결이 비슷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고, 발이 아프도록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시야에 아름답고 놀라운 경치를 담았으며, 셀 수 없이 다채로운 감정의 폭이 무한히 확장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충분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내가 성장했냐고 자문해본다면 글쎄, 하지만 어쨌든 변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 변화가 마음에 든다.
다시 학교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물어본다면 대답할 수 없다.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쏴아아 빠져나가는데 도로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물길을 내 두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 생각들 중에 하나는 다시 한번 좋은 기회가 온다면 해외로 다시 나와 다른 분야의 석사 과정이 됐든, 교육학 필드의 박사 과정이 됐든 도전을 해보자는 것이고.
둘은 미래를 멀리 내다보기보다는 당장 이번 학기에 학교 환경에 익숙해져 나가 보자는 것이고.
셋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 마음을 단단히 채비를 하자고 생각도 해보고.
넷은, 또 다섯은, 그리고 그다음은.
생각은 불어나가고 그 모든 생각들을 하나같이 흡수하는 바다는 점점 더 커지고 깊어지고 만다.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돌이키고 반복하는 말은 이거다.
내가 단정 지을 수는 없더라도 나는 변했으니 학교도 변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의 변화인지, 얼마만큼의 변화인지, 아니면 어느 차원의 변화인지는 측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난번의 옷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옥죄었다면 이번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다시 판단할 수 있는 쉬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근시안적 사고를 갖고, 이럴 것이고 저럴 것이라며 속단하는 것은 명백한 자만이다.
그러니 학교에서만 즐길 수 있는 기쁨을 누려보고자 더 노력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나만 알 수 있는 즐거움, 나만 볼 수 있는 교실의 풍경을 이제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나는 한국으로 귀환한다.
귀국보다는 귀환.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귀국이라고 할 것이고, 다른 곳에 있던 사람이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귀환이라면 내가 포르투갈에서 한국으로 가는 것은 귀환에 더 가까울 것이다.
국가와 국가를 오고 갔던 지난 2년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뚜렷하게 그어진 경계선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
포르투갈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든 같은 곳에 있을 장소이니 유럽의 끝에 붙어있는 어느 나라보다도 여태 걸어왔던 동선을 다시 밟아 돌아갈 수 있는 목적지라고 여길 것이다.
길다고 하기에는 조금 적적하고, 짧다고 하기에는 고향이 그리워질 무렵 여정을 끝내고 고국으로의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