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인종차별을 당하게 된다면 기분이 썩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음, 당할 때는 기분이 더러웠지만 또 앉아서 생각해보니 어떤 인종차별은 괜찮고, 다른 건 더 별로고? 아니, 그렇게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나노 단위로 재고 나눌 것도 아니다.
모든 인종차별은 그 나름의 지독함을 품고 있다.
그저 질 나쁜 인종차별과 더 나쁜 인종차별만 존재할 뿐이다.
막말로 누가 똥과 설사의 위생 척도를 검사하겠는가, 그냥 다 더럽다고 하지.
차별의 손가락질이 나를 향했다 치더라도 그 차별의 근거가 나의 인종에 달려있다면 그건 쓰레기 같은, 차라리 쓰레기는 재활용이라도 할 수 있으니 쓰레기보다도 못한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가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와도 좋다.
<인종차별의 뭐 같은 점>
가장 일차원적으로 답하자면 하루를 망친다.
그 하루를 포함해 후유증이 일 년이 갈 수도, 십 년이 갈 수도, 평생 갈 상처가 남을 수도 있다.
차라리 정의 구현하다 치고받고 싸워서 생긴 흉터며 자랑스러워라도 하지, 남의 일방적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상처는 쉽게 낫지도 않고 그 흉터마저 꼴 보기가 싫어진다.
난 아직도 5살 때 놀이터에서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한 일이 드문드문 떠오르고, 그 아이가 자주 입던 빨간색 원피스도 기억이 난다.
부러 떠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에서 살던 시절을 추억하면 실이 갈 때 바늘이 따라오듯 갈고리처럼 끌려오는 기억의 조각조각들 중 하나가 그 아이의 괴롭힘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점은 보상을 받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난 피해를 당해서 그만한 보상을 바라는데도 그 피해를 증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위에서도 적었듯이 그 애매모호함과 행위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아주 정도가 심해 폭력 행위가 동반이 되었다면 이는 충분히 법적 공방으로도 잘잘못을 가릴 수 있겠지만 이러한 특수한 경우조차 인종차별보다는 폭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가해자를 심판할 것이다.
소수자가 겪는 차별은 대부분의 경우 일상에 스며들 듯이 일어난다.
마이크로 어그레션이라고 부르는 이 행위는 사람의 신경을 살살 긁는다.
그 사람은 기분이 더럽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주변인들의 반응에 자신의 더러워진 기분을 애써 억누르고 좋게 좋게 넘어가려고 한다.
그 사람의 마음에는 그렇게 생채기가 생기게 되는 건데 아무도 몰라주는 경우는 다반사거니와, 스스로도 모른 채 넘어가거나 괜찮다고 애써 합리화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생채기가 기분 더러운 하루를 보내는 걸로 끝이 나지만, 불행하게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돌려받은 상처의 형태가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은근한 괴롭힘이나 직장 승진 기회의 박탈, 혹은 동료들보다 낮은 연봉이나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차별에 물들다>
애매한 건 그 차별을 지정해줄 사람도, 법도 없는 애매한 회색 구간이 넓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인종 차별뿐만이 아니라 모든 차별과 혐오의 영역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모호함이라고 생각된다.
같은 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말 그대로 같은 뜻을 내포함에도 그걸 표현하는 말과 행동의 양식에서 어떤 이는 ‘차별을 당했다’라고 느낄 수 있으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말을 상대방이 던졌을 때 한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반면 다른 사람은 얼마든지 ‘차별을 당했다’라고 느낄 수 있다.
혐오의 감정과 차별의 인식은 어느 나라의 무슨 법을 위반했다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나 다수로 이루어진 집단이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애매모호한 영역인지 알려주는 하나의 단서이며, 이러한 특성을 악용해 가해자들은 때때로 본인들의 말과 행동을 정당화시키기도 한다.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 그런 뜻은 아니었어.”
“네가 좀 예민한 것 같아. 난 너랑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건 역차별 아닌가? 네가 이 말을 들으면 차별이고, 반대로 내가 들으면 차별이 아닌 거야? 그런 게 어딨어.”
모호한 개념의 마찬가지로 모호한 특성을 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다져 피해자들을 향해 또 다른 가시 돋친 언어와 보이지 않는 압력이 가해진다면 피해자를 위한 공간은 점점 소멸해버린다.
그놈의 예민함, 빌어먹을 역차별.
결국에는 가해자에 의해 뒤따라오는 후속 조치로 인해 피해자들은 자연스럽게 합리화를 하게 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마인드로 시작하게 되는 이 합리화 과정은 결국에는 피해자들 마음속 한편에 피해 의식을 심어주기도 하고, 열등감의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종래에는 소수 인종들끼리도 척을 지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일부 2세, 3세 교포가 FOB을 무시하는 경우나 해외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워킹 홀리데이를 하러 온 사람들을 은근히 깔보는 태도, 심지어 십 년 이상을 살았는데도 시민권의 유무로 쓴소리를 듣는 일도 생긴다.
따지고 보면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인데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버리는 일상 속 에피소드처럼 피해자의 피해자가 속출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왕왕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권력은 절대적인 숫자 놀음에서 따르는 게 아니다>
일례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구 80프로 가까이 인종적으로 흑인이 가져가는 것에 비해 부의 축적은 10프로를 웃도는 비율의 백인들이 손쉽게 이룬다.
2020년 남아공 통계청 연구자료에 따르면 2011년도 일자리 고용을 이룬 흑인은 38%였고, 백인은 64.4%였다.
2017년 이 비율은 각각 40.3%와 63.7%로 격차를 많이 줄이기는 하였으나, 대신 같은 해 실업률은 흑인의 경우는 31%인 반면 백인은 고작 6.7%에 그친다.
자본주의 세상에 계산기를 두드리면 못 털게 없다고,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그 불편한 이면을 드러낼 수 있는 것 또한 절대적인 숫자들이다.
권력은 절대적 소수나 다수와는 무관하니 그 너머를 보아야 한다.
저택을 소유하는 한 명의 백인을 위해 수십 명의 유색인종들이 존재하는 것이 일상일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인종차별에 대응하는 101가지 방법>
직접적으로 맞서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개인의 개성을 뽐내며 독특하게 나만의 커스터마이징을 통해 칭챙총에 대응하는 인터넷 밈이나 짤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혹은 상대방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최대한 꽈배기처럼 비꽈서 그 사람에게 손수 먹여주는 방법도 이러한 직접적 대응 방식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인종차별을 가한 사람은 그만큼 뛰어난 지능이나 문해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해학적인 대응책을 이해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또 다른 방법은 회피 혹은 도망이다.
36계 줄행랑이라는 말도 있다. 1보 전진을 위한 2보 후퇴.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전략적 방도임을 뜻하는 표현들을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듣고 자랐다.
못 들은 척하거나 못 본 척, 곤혹스럽기는 해도 어떻게든 이 순간만 모면한다면 곧 지나갈 일이고 내 어깨 뒤로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
가장 어려운 건 폐쇄적인 환경이나 대인관계 속에서 어떻게 직접적으로 맞설 수 있으며, 피하려고 한들 어떻게 피할 것이냐의 문제다.
직접적으로 맞선 뒤에 따라오는 후폭풍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오늘 피하면 내일 또 만날 사람인데 피해봤자 도루묵 아닌지, 여러 가지 심란한 생각들에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되지?
어떡하지?
음,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등 시민, 근데 모범성을 곁들인>
초등학교를 다닐 때 난 항상 수학을 잘하는 아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수학을 잘하는 아이가 아니라 수학을 잘해야만 하는 아이.
아시안이라는 같잖은 이유로 말이다.
항상 어이가 없었던 게 인종차별을 행하는 사람들의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근데 일단 너네들, 아시아가 대륙들 중에서 가장 큰 대륙이라는 건 알고는 있는지? 일단 중국 13억은 세고 시작하는 거 맞는지? 그니까 내 말은 너네 지금 서남아시아부터 동북아시아까지 다 생각은 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많은 머릿 수를 가진 ‘모든’ 아시안을 향해 당당히 낙인을 찍어버린다.
수학을 잘한다느니, 순종적이라느니, 샤이하다느니.
조금이라도 나대는 아시안이 있으면 와, 너 정말 아시안답지 않다.
내성적인 아시안이 본인 마음에 내키지 않아 소극적으로 임하면, 와 너 어쩜 그렇게 아시안 같냐? 컴온, 돈비샤이!
도대체 누가 너희들에게 나라는 한 명의 인간을 판단하게 하는 회초리를 주었습니까, 하고 물어보고 싶다.
내 행동이 샤이하다면 그건 나라는 인간이 가진 많디 많은 특성 중 하나일 뿐이지, 공장에서 찍혀 나온 수많은 아시안 중 하나라서가 아니라는 걸 너의 뇌가 샤이해서 배우지 못한 건 아닐까.
어쩔 때는 그런 말 못 할 기분이 든다.
나라는 사람이 아시안이라는 꼬리표에 잡아먹힌듯한 기분. 나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데 그저 아시안이 되어버리는 기분. 아시안은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자랑스러운 부분일 뿐인데 그게 전체가 되어버리는 기분. 그저 그런 기분이기에 따지기도 어렵고, 따질 대상을 찾기도 어렵고, 겨우 겨우 용기 내서 따져봤자 도로 내 기분만 상해버리는 그런, 기분?
시간이 흘러 현재는 사람들의 인권 인식이나 감수성 등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큰 울타리, 아니 울타리는 너무 포근하게 들린다, 그러니까 족쇄?
그래, 그 족쇄로 다닐 수 있는 거리가 더 넓어졌고 높이가 더 높아졌다 뿐이지 무슨무슨 인종처럼 지구 한 바퀴 반을 두르고 올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위에 끄적끄적 적어 내린 건 순전히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혹은 내 가까운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을 보고 자라며 느낀 점들이다.
그러니까 어, 난 인종차별당한 적 없는데, 거기 사람들 다 착하던데?라는 말은 노땡큐, 조용히 사양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