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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Oct 16. 2021

초등교사복직잔혹사

직장으로 복귀한 지 한 달이 넘었다.

휴직으로 낸 2년의 기간을 얄짤없이 꽉 채우고 9월 1일 자 위대하신 경기도 교육청의 부름을 받아 다시 교단으로 복귀한 지 정확히 한 달 하고도 십여 일.

적어도 체감상으로는 세 달은 족히 흘렀을 그 시간이지만 이제 겨우 한 달 남짓을 넘겼다.

하루하루가 다이나믹한건 보장된 바였기에 복직 이후에는 아침 7시 20분 기상과 동시에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탑승한다.

그렇게 한 번은 어마무시하게 화가 나서 울었고, 다른 한 번은 방심했다가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화를 냈다.


울지 마, 나는 얼은이니까, 라는 마인드를 오차 없이 탑재하고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내가 가장 방어 태세를 갖춘 건 2년 만에 갖게 된 나의 담당 학급일 거라고 여겨서 학생이든 학부모든 어떤 특이점이 생기면 곧바로 신속 정확하게 일을 처리할 것을 스스로 되뇌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의외로 복병은 복직 서류의 행정 처리였다.

복직 일주일 전, 복직 처리에 필요한 서류가 다 수합되지 않아 미비된 서류를 요구하는 교육지원청의 연락이 왔다.

미비 서류가 무엇인고 하니, 코로나로 잠깐 한국에 들어왔던 시기에도 학업을 수행했다는 증빙 자료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먼저 소명서를 썼고, 그 뒤에 사유서를 썼다.

사유서에 함께 첨부할 증빙 자료로 교수님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번역 공증 처리받아 제출했다.

번역 공증 사무소가 있었던 양재역으로 가는 그날만큼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한 달 뒤에도 시달릴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서 양재 빌딩 앞 스타벅스에서 샌드위치를 신나서 먹었겠지.

그 문서는 반려되었다, 학부처에서 발행한 공식 서류가 아닌 지도 교수의 사적 메일로 온 통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그럼 진작 말하지. 그거 한 장에 7만원이었는데요. 저 거기까지 왕복 두 시간 걸려서 다녀왔어요.

다 큰 어른은 그렇게 미성숙하게 대처하지 않지, 나는 다시 교육지원청에 그럼 공식 수료증을 발급받겠다고 답변하고 전화를 끊었다.

수료증 발급 처리는 3주가 소요됐다. 그 와중에 7번의 메일을 주고받았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융통성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관료주의와 행정 기관들의 떠넘기기식 일처리로 인해 문서를 위조하고 싶은 마음마저 생겨날 쯤이었다, 수료증이 내 메일함에 날아왔다.

그 문서를 받아 번역 공증 처리를 해 교육지원청에 제발, 이제는 그냥 받아줘라, 하는 마음으로 드물었다.

아, 참고로 이 문서도 마찬가지로 8만 원에 달하는 소요 금액과 나의 소중한 왕복 2시간이 소요되었다.

심지어 중간에 번역 사무소의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는데 공증 처리에 있어 필요한 준비물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 것이었다.

그 덕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날, 서류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옆 건물 지하 1층 문방구에서 도장을 팔 뻔했다.

도장을 파려고 했다, 유일한 문방구 한 곳이 동네 백화점 1층으로 이사 갔다는 비보만 전해오지 않았다면.

컴컴하게 닫힌 문방구 유리창에 꽂힌 명함 속 작게 검정 볼펜으로 쓰인 번호에 간절하게 전화해 닿은 그 동네 유일하게 도장을 파준다던 문방구 아저씨는 급하면 10분밖에 걸리지 않으니 새로 옮긴 곳으로 오라고 하셨다.

“괜찮아요, 아저씨.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하필이면 비가 오는 날이라서 그런지, 복직해서 이미 학교를 다니는데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교육지원청의 요청에 질려서인지, 아니면 진짜로 도장이 필요한데 못 파서 그런 건지.

어쩌면 이사 소식을 알리며 위치를 전해주는 문방구 아저씨의 목소리가 내 급박한 상황과는 다르게 너무나 태평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울 것 같았다.

상가의 지하 1층, 닫혀있는 문방구 앞에서 나는 다시 번역 사무소에 전화를 갈겼다.

핸드폰의 통화 화면에 번호를 누르는 것이 전화를 거는 게 아니라 정말이지 갈겼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제가요, 아까 다 말씀드렸지만 어쨌든 개인 지장 없으면 서류 처리가 안된다고 공증 사무소에서 말씀 주셨고, 지금 번역 사무소에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옆 건물에 도장을 파러 왔거든요? 근데 문방구가 닫았어요. 저, 진짜, 저 그러면 오늘같이 날 잡아서 여기까지 다시 못 오거든요. 그리고 번역 사무소 측에서 여기 공증 사무소를 연계 소개해준 거면 제대로 안내를 해주셨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제가 책임 소재를 묻자고 드리는 말은 아니고요, 도저히 여기서 더 일을 진행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대행비를 더 드릴 테니까 다음번에 여기 공증 사무소로 와서 공증 처리 마치고, 문서를 등기로 보내달라, 는 것을 구구절절하게도 말했다.

고작 서류 하나 때문에 밑창 닳을 듯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내 모습에 기어코 현타가 오고 말았다.

번역 사무소는 내 부탁을 들어준다고 했으며, 다시 한번 거듭 사과하고 본인들 책임이 크니 대행비나 우편 비용은 따로 받지 않겠다고 답변을 주었다.

그러니까, 그 서류는 그렇게 받은 서류였다.

“선생님, 그런데 여기에는 학교의 공식 직인이나 마크도 보이지 않고요. 더더군다나 정확한 복직 날짜가 기입되어 있지 않아서요. 이게 처리가 될지는 모르겠네요.”

각종 개고생의 산물인 그 서류를 받은 교육지원청 담당 주무관의 목소리는 식어빠져버린 율무차처럼 뜨듯미지근하게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공식 직인이 있으면 제가 전자 문서로 받아보지 못했겠죠. 이 학교는 직인 대신에 전자 서명으로 처리가 돼서 큐알코드가 밑에 있는 거고요.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수료증은 날짜가 아닌 학년도와 학기로 구분이 되어요. 여기 내용에 보시면 20/21학년도라고 쓰여있고, 3학기와 4학기를 증명한다고 쓰여있잖아요. 그리고 이 공식 문서가 수료증이라는 이름을 달고 유일하게 나오는 문서기 때문에 제가 뭐를 바꿔달라, 이걸 넣어달라, 이렇게 요구를 할 수가 없어요. 이해하시죠?”

이해를 못하는 듯했다.

굉장히 찜찜하게 이 문서는 그럼 교육청에 문의를 넣어볼 테니, 그러면 19/20년도에 해당하는 수료증을 다시 떼어오랜다.

주무관님의 눈에는 제가 이 가학적인 행위를 즐기는 걸로 보이시나요?

답답한 마음에 복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 깍 깨물고 알겠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 친구에게 영상 전화를 했다.

친구는 다음에 그런 대왕고구마를 우유 한 모금 없이 마셔야 되는 통화를 또 받으면 일단 스피커로 돌려놓고 핸드폰 화면에다 중지를 날리면서 통화를 이어나가라고 했다.

그러면 차라리 마음이 한결 풀린다고.

다시 같은 서류를 무한대로 커져가는 스트레스 속에서 처리해야 된다는 아득한 과정이 떠올려보았다.

차라리 이렇게 내가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의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기한을 정해두지 않고, 세월아 내월아 해버리는 건 어떨까.

어차피 제출해야 되는 장본인은 이미 일선에 복직해 있는 마당에 서류 처리를 못하는 건 그쪽이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서류를 다 던져주고 있다.

그러니 급할 건 없다.

슬로 라이프를 관료제에 부어버리자, 물론 중지 손가락을 한껏 세운 채로.



학교는 전쟁터다.

매일매일 어쩌고 저쩌고의 끔찍한 개요를 담은 이런저런 일들이 여기저기서 터지는데, 그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참혹한 현장을 수습하는 거나 다음 날 그 일의 당사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중에 가장 피하고픈 일들 중 하나는 같은 동료 교사들과 부딪히는 일인데, 적어도 여태까지는 소리를 질러가면서까지 의견 대립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 기록을 지난주 목요일 깼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 뚜껑이 열렸고, 울면서 소리를 질렀나, 소리를 지르면서 울었나, 그게 그건가?

3주 전, 그 사람이 잘라준 사과를 먹지 말았어야 했다.

자기 교실로 불러서 복직해보니 어떻냐, 거기서는 공부 많이 했냐, 시답잖은 질문을 던질 때 모질게 쳐냈어야 했다.

그 사람을 둘러싼 소문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고 방어 태세를 온전히 갖췄어야 했다.

처음 그 사람의 수작에 예정에도 없는 공개 수업을 하게 될 때, 진작에 주변 선생님들께 알려 도움을 구했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많은 신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랬기에 혹은 그러지 않았기에 목요일 오후 다섯 시, 다들 컴퓨터 전원을 내리고 있을 시기에 나는 그 사람과 옥신각신 아무런 생산성 없는 말다툼에 온갖 진을 다 빼고 있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으며, 내가 그 일을 해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는 데다, 당신이 말하는 그 원칙은 바뀐 지 오래다,라고 아마 100가지 다른 문장으로 말했다.

겹겹이 쌓인 예의는 양파껍질처럼 한 꺼풀씩 벗겨져 그 사람도 나도 여섯 시가 다다를 무렵에는 이미 반말만 안 텄지, 오가는 말에 가시가 잔뜩 돋쳐있었다.

앞으로 나는 당신을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설탕 코팅이 된 꽈배기로 볼 것이다.

그렇게 뻔뻔하고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며,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내가 내리는 사람의 정의와는 거리가 꽤 머니 말이다.

그다음 날, 넌지시 어떻게 잘 해결이 되었느냐 물어보는 연구부장님의 물음에 자초지종 설명을 드리니 대리 분노를 해주셨다.

오후에 이르렀을 때, 연구부장님은 참전 의사를 밝히셨다.

나만 괜찮으면 대신 이 건에 대해서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해볼 테니 어떠냐는 것이었다.

복직하자마자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하여 연구부장님은 지극히 인류 박애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 것이다.

퇴근하기 바로 전, 나는 연구부장님께 장문의 메시지를 드렸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생각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하지만 이 사람의 입장은 너무나도 강경하고 다른 선생님들에게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고 잘 마무리를 지어보고 싶다고 말이다.

메시지의 끝에 눈에 하트를 박은 이모티콘을 넣었다.



어마 무시하게 화가 나서 눈물이 나던 그 일은 다른 사람의 무조건적인 지지와 응원으로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받았다.

최악의 선택으로 눈물을 흘리느니 분노와 역정을 내보자는 차선책을 선택했던 그 일련의 사건들은 마음을 달리 먹기로 했다.

두 사건 모두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종이 쪼가리든 꽈배기 인간이든 화를 낼 가치고 울 일도 아니라고 생각을 바꾸면 그만이다, 나만 놓아버리면 그만이다.

게다가 어떤 일이 이 사건들로 파생되든 간에 적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일은 없다.

내 편에 같이 선 사람들도 있고, 내 마음도 많이 튼튼해졌으니 말이다.

벌써 시월의 중순이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으니 감기나 조심하고 내 몫이나 잘 해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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