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리지 않는 강렬한 바다와 하늘
언젠가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들이 있다. 비아리츠(Biarritz)도 그중 한 곳이었다. 대서양 남쪽 스페인과의 국경에서 가까운 이 곳을 프랑스인들은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들과 함께 최고의 휴양지로 꼽는다. 파도가 높아서 프랑스에선 거의 유일하게 서핑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랜드마크처럼 보이는 바닷가 바위 위의 성 사진을 본 뒤 늘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파리에서 TGV로 바로 갈 수 있지만 아무래도 거리가 멀다보니 짧은 휴가기간에 가기엔 부담스러웠다. 프랑스 남부 여행을 보르도에서 시작한 덕분에 드디어 비아리츠에 가 볼 수 있게 됐다.
보르도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해 아르카숑을 거쳐 대서양을 끼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비아리츠가 나온다. 지방도로 D652를 타고 가다가 고속도로 A63을 타고 갔다. 비아리츠에서 25㎞만 더 가면 스페인 국경이 나온다.
밤늦게 도착해 호텔에 짐을 풀고 시내 구경을 하러 나가보니 야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해변 쪽의 풍경에는 말 문이 막혔다. 청색과 보라색이 뒤엉킨 해질 무렵의 하늘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고전주의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불을 밝힌 거리와 해변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대서양을 끼고 이뤄진 오래된 휴양도시에 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자연히 길에는 주차할 틈이 없었다. 주차장도 만원이라 좁은 길을 오르내리다가 결국 주차공간을 찾지 못하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호텔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렌트한 차는 호텔에 두고 버스를 타고 해변가 산책을 나갔다. 버스는 24시간 이용권이 2유로. 버스 안에서 직접 구매한다. 파도가 높은 이곳은 프랑스에서 서핑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람이 불고 하늘은 좀 흐렸지만 산책 나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아침에부터 해변에서 서핑 타기를 배우는 모습도 보였다. 비아리츠에서는 서핑스쿨이 여럿 있어서 며칠 머문다면 배워볼 만하겠다.
비아리츠는 해변 산책로가 잘 가꿔져 있다. 조성된 지 100년은 더 됐을 것 같은 산책로에는 간간이 돌로 된 벤치를 둔 휴식공간이 있고 나무가 우거진 터널도 있어 지루하지 않다. 한낮의 따가운 햇살과 바람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다.
해변을 따라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건강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데크를 설치하지 않고 자연지형을 살려 만들어진 산책로를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멋진 해변이라면 누군들 매일 열심히 달리지 않을까.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비아리츠가 파리의 부르주아들에게 휴양지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19세기 말이다. 나폴레옹 3세가 스페인에서 시집 온 아내 외제니를 위해 스페인 국경에서 가까운 이곳에 여름 별장(현재는 호텔 뒤 팔레)을 마련해 주면 서다. 이어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 부호들 사이에선 이곳에 별장을 마련하고 여름휴가를 보내는 게 대유행이 되었다. 20세기 초 벨 에포크 당시 피크를 이뤘고 오늘날에도 명성은 이어지고 있다.
언덕 마을에는 벨 에포크 시절에 지어진 듯 아르데코 스타일의 별장들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듯 서있다. 3개의 비치가 있는 해변은 풍광이 정말 아름답다. 비아리츠의 상징 ‘로셰 드 라 생트 비에르쥬 (Roche de la Sainte Vierge)’에서 바라보던 짙푸른 바다는 잊을 수가 없다. 해변의 거센 파도에도 꿋꿋하게 바위 위에 서있는 빌라 벨차, 바다를 굽어 살피는 듯 의연하게 서 있는 생 마르탱 등대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비아리츠에서 바스크 해안이 시작된다. 지척에 있는 도시 바욘 Bayonne은 바스크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생 장 드 뤼즈Saint-Jean-de-Luz는 역시 아름다운 해변과 산티아고 가는 길의 스페인 도로 시작 지점으로 잘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와 스페인 공주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식이 1660년 생장드 뤼즈의 생장바티스트 교회에서 열렸었다.
바스크 지방은 스페인도, 프랑스도 아닌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지니고 있다. 베레모는 원래 바스크 지방 농부들이 쓰던 모자다. 바스크족은 피레네 산맥 서쪽의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서부에 200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이 스페인에 속해 있고 10% 정도가 프랑스에 속한다. 바스크족은 14세기에 스페인에 통합되었지만 19세기까지는 준독립 지위를 인정받았었다. 19세기 들어 그 특권이 박탈되고 1939년 프랑크 독재정권 수립 후 심한 탄압을 받았다. 1959년 결성된 바스크 분리주의 무장단체 ETA(바스크 조국과 자유)가 독립을 요구하며 과격 테러를 저질렀으나 이들의 방식에 반발 여론이 거세지자 한계를 느끼고 2006년 3월 22일 영구 휴전을 선언했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도시 산세바스찬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 정확히 장소를 기억하진 못하지만 저녁에 그곳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 산속의 선술집 같은 분위기였는데 초면에도 불구하고 뭔지 모르게 강한 동지애 같은 걸 느꼈다. 험한 산과 거친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들 특유의 거칠지만 뜨거운..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아마도 바스크 다움이었던 것 같다. 산세바스찬의 그들은 지금 무얼 할까.. 스페인은 코로나 19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는데 그들도 우리처럼 잠시 멈춤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