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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Jan 17. 2021

[남프랑스 #18]방스-마티스 채플

예술과 우정으로 지은 성소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은 여럿인데 앙리 마티스(1869~1954)도 그중 최고로 꼽는 화가이다. 순수하고 강렬한 색채와 단순한 형태, 그러면서도 매우 리듬감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밝고 따뜻한 순수한 색채로 된 형상들이 리드미컬하게 어우러진 작품을 보면 가라앉았던 기분도 저 멀리 사라지는 것 같다.

생폴 드 방스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방스(Vence)에는 마티스가 말년에 혼을 담아 작업한 스테인드글라스와 벽화가 설치된 ‘로사리오 경당'이 있다.  ‘ 마티스 채플'로 더 유명하다. 마티스의 작품은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 뉴욕 현대미술관, 러시아 푸슈킨 미술관 등 전 세계 최고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딱 한 곳만 가야 한다면 방스의 마티스 채플로 알려진 로사리오 경당을 선택하겠다. 마티스의 예술적 여정을 그대로 함축한 곳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다가다 하면서 기온이 뚝 떨어졌지만 길 위의 방랑을 멈출 수 없었다. 마티스 채플이 문을 닫기 전에 서둘러 도착했다. 비 구름이 깔려있어 어둑하기까지 했던 늦은 오후였다. 우산의 비를 털며 채플에 들어 서니 바깥의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밝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야수파를 대표하는 화가 마티스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꼽힌다. 20세기 초 파리에 머물며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벗으로 두었던 미국인 거트루드 스타인은 마티스를 북극점, 피카소를 남극점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개척해 나가는 예술에 찬사를 보냈다. 두 화가의 혁신적인 시도는 그 자체로 현대미술사를 장식했다. 피카소가 번득이는 천재성으로 순식간에 사람들을 사로잡은 반면 마티스는 느리지만 확고한 걸음으로 아름다움의 본질을 향한 여정을 계속했다.

마티스는 파리 교외 이시레물리노에 작업실이 있었지만 건강이 나빠지면서 거의 니스에 머물렀다. 72세였던 1941년 큰 수술을 받게 되고 두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긴 뒤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고 그로부터 한참을 더 살았다. 덤으로 두 번째 삶을 산다고 생각했던 그는 니스의 레지나 호텔에서 요양을 하면서 더욱 순수의 핵심에 다가가고자 했다. 붓을 들 수 없을 때 그는 목탄을 나무 막대기 끝에 매달고 드로잉을 했고 가위를 들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등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당시 간호학교에 다니던 모니크 부르주아가 밤 시간에 찾아와 거동이 불편한 예술가 마티스를 보살펴 줬다. 간병인과 환자로 만났지만 두 사람은 긴 시간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며 우정을 쌓았다. 마티스는 모니크 부르주아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모니크의 헌신적인 간호 덕분에 그는 창작의 열정을 지속해 나갈 수 있었다.

 마티스는 니스가 연합군의 공습 목표가 되자 황급히 니스를 벗어나 시골마을 방스로 거처를 옮겼다. 별장의 이름은 '르 레브', 꿈이란 뜻이다. 모니크가 머물던 수녀회 소속 기숙사가 근처에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마티스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보살폈다. 모니크는 도미니크 회의 수녀로 서원하고 자크 마리 수녀가 되어 1944년 아베롱의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마티스와 자크 마리 수녀. 자크 마리 수녀는 수녀가 되기 전 간호학교 학생일 때  마티스를 간호하며 우정을 쌓았다.

 자크 마리 수녀와 마티스는 편지를 나누며 대화를 이어갔다. 자크 마리 수녀는 방스로 돌아와 간호 수녀 일을 하게 된다. 수녀회에서는 마침  방스에 헛간으로 사용하던 곳을  경당으로 개축하기로 했다. 자크 마리는 1948년 마티스에게 편지를 보내 그 경당건축에 참여해 줄 것을  부탁한다. 마티스는 건축은 커녕 그림에서도 종교를 주제로 다뤄본 적이 없었지만 자크 마리 수녀의 부탁에 " 기꺼이 도와주겠다."라고  답했다.

일흔일곱살의 마트스는 1949년부터 4년간 성당 건립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생명나무를 모티프로 마티스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해 벽화, 십자가, 촛대 등 배치와 신부들이 입을 전례복도 디자인했다.  마티스는 동쪽 벽은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고 서쪽 벽엔 성모 마리아를 주제로 타일 벽화를 장식해 변화를 주었다.  북쪽벽에는 거친 선으로 ‘십자가의 길 14처’를 그렸다. 채플은  1951년 완공됐다.

두 사람의 우정이 낳은 성당은 그래서 참 따뜻하다. 순수하고, 맑고, 밝으며 신성한 기운마저 풍긴다. 실제로 마티스 채플은 마티스 예술의 집약이며 명쾌함과 단순함에 넘치는 조형미를 지닌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채플 내부에선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었다. 채플 내부 사진은 로사리오 경당의 홈페이지에서 받아왔다. )

생명나무 잎으로 가득한 마티스 채플 내부. 옆의 창문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벽에 이미지를 만들어 준다.
막대기 끝에 목탄을 달고 드로잉으로 하고 있는 마티스.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 노르파드칼레의 르카토 캉브레시스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 때까지 법률 공부를 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창작의 기쁨을 발견한다. 곡물 씨앗상을 하는 완고한 아버지를 설득해 화가가 되기로 하고 파리에 올라온 것은 그가 22세 때였다. 늦게 시작한 공부로 밤새는 줄 몰랐던 것 같다. 파리 국립 미술학교에 들어가 구스타프 모로에게 배우면서 된다. 모로는 늦깎이였던 마티스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늘 그를 지지했다. 그러

면서도 “자네는 그림을 너무 단순화시키려 하는군."이라고 애정을 담아 얘기하곤 했다.

마티스는 인상파 화가들과 친하게 되면서 그들의 작품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영국 여행을 하면서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가난했지만 아내 아멜리가 결혼할 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보석을 전당포에 잡혀 구해 준 돈으로 1900년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로부터 폴 세잔의 '목욕하는 세 여인'을 구입해 탐구의 교과서로 삼았다. 마티스는 37년간 이 작품을 가까이 두고 보았는데 생활이 어려울 때 그 그림을 팔라는 유혹을 받았을 때에도 그 작품을 팔지 않고 지니고 있었다. 1936년 파리 현대미술관에 기증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잔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다."

마티스는 인상파, 후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탐구하면서 자신의 회화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폴 시냑이 창시한 점묘법에 심취돼 있던 빠졌던 그는 앙데팡당 미술전에 점묘법으로 그린 ' 출품하고 하면서 드랭, 블라맹크와 사귄다. 마티스 부부는 1905년 친구 앙드레 드랭과 함께 지중해 여행을 한다. 파란 하늘과 햇살을 받아 자연은 원색의 향연을 펼쳤다. 그 강렬한 색채는 마티스의 감정을 때렸고 마티스는 감정이 선택하는 대로 색채를 구사하며 화면을 채웠다. 단순하고도 강렬한 색상을 기반으로 한 혁신적인 회화기법을 발전시킨 그는 1905년 가을 살롱전에 아내의 모습을 담은 '모자 쓴 여자'를 출품했다. 전시회 개막 전날 프리뷰에서 미술 잡지 <질 블라스>의 루이 복셀 기자는 마티스의 귀에 대고  " 야수들 사이에 도나텔로가 서 있군."이라고 말했다. 점잖은 조각 작품 주변에 설치된 강렬하고 직관적인 마티스의 회화 작품이 전시된 것을 비유해 한 말이었다.  미국인 컬렉터 스타인을 알게 된다. 그는 '야수파의 기수'가 된 마티스의 작품 '모자를 쓴 여자'를 구입했으며 미국에 마티스를 적극적으로 알린다.

마티스는 1차 대전 후부터 주로 니스에 머물며 모로코와 타히티 섬을 여행했다. 마티스가 처음 니스를 찾은 것은 1917년 12월 25일이었다. 무척 흐리고 추운 날씨였고 그가 묵은 싸구려 호텔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며칠 동안 방에 갇혀 바이올린을 켜며 스스로를 위로하던 그는 화구를 챙겨 밖으로 나가 그림을 그리려다 너무 추워 다시 호텔로 들어왔다. 그런데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따스한 햇살을 느끼고 창문을 열어젖혔다.

" 창을 여니 밖에는 야자나무 끝자락이 팔랑거리고, 하늘과 바다에는 파랑, 파랑, 파랑이 가득했다. "   

말년에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면서 치료를 위해 남프랑스의 니스를 자주 찾았다. 니스에 가면 그가 머물렀던 레지나 호텔, 해변 산책로, 작업공간 등을 볼 수 있고 마티스 미술관도 니스에 있다. 오래전( 2013년, 벌써 그렇게 됐다.) 니스의 마티스 미술관을 찾아갔었는데 마티스전을 한국에서 열고 싶다는 얘기를 그곳 담당자에게 이메일로 보내 놓았었다. 그쪽에서 관심은 보였는데 진행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미술관만 다녀왔다. 너무나 멋진 '폴리네시아 바다' , '재즈' 시리즈 등을 모두 볼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니스의 마티스 미술관

마티스는 192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작품전'에 3점 출품했다. 비평가들은 혹평을 했지만 그와 달리 밝고 강렬한 마티스의 작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마티스의 관심은 색채의 추상적 표현력에 있었다. 자연의 색채가 아니라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색채를 화폭에 옮겼다. 1930년 미국을 거쳐 남태평양의 타히티를 여행하고 나서는 평면화, 단순화된 화면에 역동성을 가미한 작품을 구현했다. 조각, 동판화에도 뛰어났으며 직품 디자인, 삽화 등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니스 마티스 미술관 '왕의 슬픔' 은 제목과 달리 그야말로 색채의 향연이다.

마티스는 반스 재단 펜실베이니아 메리언에 있는 반스 재단의 벽화를 의뢰받았다. 세 개의 아치에 들어갈 벽화를 그리면 되는 거였는데 마티스는 주제를 '춤'으로 정하고 니스에서 작업 구상에 들어갔다. 벽화의 높이 때문에 2m 가까이 되는 막대기 끝에 목탄을 고정시키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모양에 맞게 종이를 오려 이리저리 옮기며 구성을 다듬어 나갔다. 1년 넘게 걸려 작업한 그림은 반스 재단 건물 로비에 무사히 설치됐다. (그런데 이 작품을 설치한 뒤 반스는 무슨 영문인지 작품을 대중에 공개하지 않았다. 1960년대 초 반스의 사후 법정 소송을 통해 중앙 홀의 일반 관람이 허용된다. )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는 마티스의 작품 '춤'.


 구아슈로 색을 칠한 종이를 가위로 오려 작업하는 것은 반스 재단 벽화를 준비하면서 시도했던 것인데 방스의 별장으로 옮긴 후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그는 종이를 오려 만드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의 도구는 색을 칠한 종이와 가위였다. 가위질을 하는 그는 마치 드로잉을 하는 것 같았다.

"가위질은 비행의 느낌이다. 비행기도 선을 그리면서 날아간다. 가위질과 비행은 동의어다."

방스의 '르 레브'로 옮긴 지 3개월 뒤 그는 '이카루스의 추락'을 완성하고 그 연작 작품집 '재즈'를 발표했다.

데쿠파쥬 원호를 볼 수 있는 마티스 미술관의 <재즈> 전시실. 니스

마티스의 작품 '파란 누드'는 4가지 형태를 보이는데 '마티스 미술관'에서 눈을 가까이하고 보니 그 안에 수많은 고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예술이 곧 신앙이었던 마티스는 로사리오 경당이 완성된 지 3년 뒤인 1954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자크 마리 수녀는 2005년 하느님 곁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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