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미술관
마티스가 남긴 불멸의 작품 '로사리오 채플'을 나오니 하루 해가 뉘엿뉘엿해지고 있었다. 피카소 미술관이 있는 앙티브(Antibes)로 갈지 말지 망설이다 가는 것으로 정하고 출발했다. 다음 날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들러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다. 이제 가을이 올 것을 예고하듯 기온도 낮아서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여행을 끝내야 하는 아쉬운 마음까지 겹쳐져 기분이 가라앉았는데 구름 낀 하늘과 그 아래의 풍광은 또 어찌나 멋지던지.
왼쪽으로 바다를 보며 차를 달려가다 보니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해안도로의 절경을 애써 외면하며 피카소 박물관에 도착했지만 불행하게도 마지막 입장이 끝나서 들어갈 수 없었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안내원에게 부탁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매정한 얼굴로 내일 다시 오라는 말만 반복하는 야속함에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미술관은 문을 닫아야 하고, 직원들은 집으로 돌아가 빗소리를 들으며 따스한 저녁 식사를 해야 할 테니. 먼 나라에서 찾아온 나그네의 사정은 아랑곳없다.
다행히 우리에겐 마지막 날 금쪽같은 오전 시간이 있었으므로 돌아서며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날은 흐렸고 부슬부슬 비가 내렸지만 시간이 아직 이른 편이어서 앙티브 시내를 좀 돌아봤다. 시장 건물이 보이기에 들어가 봤더니 바깥 날씨와는 정 반대로 왁자지껄하다. 한쪽에서는 결혼식 피로연이 열리고 있었다. 비오는 날 결혼식을 올리면 행복하다는 말이 혹시 있던가? 없다면 만들어 주기로 하고 구경하고 있었더니 낯선 이방인에게도 피로연을 위해 준비한 달달한 디저트를 맛보라고 권하기까지 한다. 즐거운 사람들과 잠시 어울리다 보니 미술관에서 퇴짜맞고 돌아섰던 꿀꿀한 일도 금새 잊고 말았다.
비가 더 내릴 것 같아서 상점에 들어가 우산을 샀다. 검은 바탕에 파란 별 무늬가 촘촘이 새겨진 것을 골랐다. 여행 마지막날 우산을 살게 뭐람. 그것도 접히지도 않는 장우산을. ( 성가시면 버리겠다고 생각했지만 버리지 않고 들고 왔다. 펼치면 밤 하늘에 별이 뜬 것 같은 사랑스러운 우산은 지금도 우산꽂이에서 항상 대기하고 있다. )
결국 찾아온 마지막 날이다. 최대한 서둘러 움직이기로 하고 칸에 잠시 들렀다가 앙티브로 다시 갔다. 어제와 정반대로 화창해진 날씨가 마음을 들뜨게 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아름다운 날씨를 두고 떠나는 게 많이 아쉬웠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하늘을 덮었던 구름들이 모두 사라지고 밝은 태양 아래 지중해가 빛나고 있다. 바다는 깊은 청색이었고 하늘도 맑은 청색이었다. 맑은 공기와 햇살 아래 꽃들이 아우성 하듯 피어나고 있었다. 마지막 날 이런 환상적인 날씨를 만나는 것은 큰 행운이리라. 기억 속에서 지중해는 늘 파랗고 그 하늘 또한 이렇게 파랄테니 말이다. 미술관 근처에 차를 대기가 어려워서 좀 멀리 차를 대고 미술관까지 걸어서 갔다. 몸의 기억이 희한해서 어제 잠깐 와봤다고 낯설지가 않다. 다시 찾은 미술관이 이번엔 양팔을 벌리고 나를 반긴다.
프로방스의 맑은 공기와 강한 햇살, 푸르른 바다를 사랑했던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생폴 드 방스를 자주 찾아 휴가를 보내곤 했다. 그러던 중 1939년 고고학 박물관으로 운영되던 앙티브의 그리말디 성을 방문했다. 로마 시대의 기초 위에 연한 크림색 돌로 지어진 견고한 성채가 푸른 지중해 바다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환상적인 풍경에 매료됐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46년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앙티브 박물관 관장이던 도르 드 라 수셰르가 성채의 위쪽에 있는 밝고 넓은 홀을 피카소가 아틀리에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소박한 마을도 좋았고 지중해가 코앞에 내려다 보이는 견고한 성채도 마음에 쏙 들었다. 이곳에서 피카소는 두 달간 머무르며 소묘 등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리고 일부를 이곳에 기증했다.
이듬해 피카소를 위한 방이 만들어져 방문객들에게 그의 작품을 공개했다. 1948년 피카소는 발로리스에서 만든 78점의 도자기를 포함해 다른 작품을 추가로 기증했다. 1957년 앙티브 명예시민이 된 피카소는 자신의 이름을 단 미술관으로 바꿀 수 있을지를 제안했고 1966년 그리말디 성은 공식적으로 피카소 미술관이 되었다. 1990년 피카소 미망인 자클린 피카소가 작품을 추가로 기증하고 미술관에서도 구매를 이어가 현재 피카소의 작품 245점을 소장하고 있다.
피카소는 그의 고향인 스페인 말라가, 작업을 했던 프랑스 파리, 스페인 바르셀로나, 그리고 앙티브까지 자신의 이름을 단 미술관 4개를 갖고 있으니 정말 대단한 화가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만 못 가본 것 같다. ( 바르셀로나에 가야 할 핑계가 생겼다.)
여성 편력도 유명하지만 아흔 살까지 장수를 한 그가 청년 시절부터 평생 했던 작업량은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많다. 회화 작품 1885점, 조각 1228점, 도자기 2880점에 판화 수천 점을 남겼다. 파리 퐁피두 미술관에도 시기별로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들이 많이 있고 피카소 미술관들에도 많은 작품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다작을 한 결과다.
피카소가 작업실로 사용했던 꼭대기층 방의 창을 통해 바다가 보인다. 밖으로 나와 테라스에서 바라보니 파란 지중해 바다는 한 폭의 그림이다. 저 멀리 바다의 잔 물결이 은빛으로 빛나고 흰색 돛을 단 요트들이 그림처럼 떠 있다. 테러스에서 바라보는 지중해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미술관에는 피카소 작품 외에도 프로방스를 사랑했던 니콜라스 드 스타엘의 대형 회화작품을 비롯해 페르낭 레제, 한스 아르퉁 , 호안 미로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탈리아 국경에서 멀지 않은 앙티브는 예로부터 군사요충지였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로 건설했고, 이어 로마의 시저에 정복됐던 곳이다. 루이 14세 시절 프랑스에 편입돼 건축가 보방 Vauban이 국경 지역의 성곽을 건설하도록 했다. 작은 어촌에서 도시로 개발된 것은 1865년 식물학자 튀레가 아름다운 소나무 숲과 풍관을 재발견하면서부터다. 이후 샤를 가르니에가 네덜란드 백만장자의 부탁으로 호화 별장 엘렁로크 Eilenroc를 세우고 난 뒤 부호들의 별장들이 들어서고 부자들의 휴양지로 각광받게 된다.
여유롭고 오래된 이 도시는 어딜 가나 꽃들이 가득하다. 화초와 덩굴 식물로 예쁘게 치장한 현관문을 구경하면서 골목을 헤매다 보면 바다로, 혹은 시장으로 통한다. 좀 더 머물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아쉬운 마음으로 앙티브를 뒤로 하고 고속도로를 달려 엑상프로방스 TGV 역으로 돌아왔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역 카페에서 숨을 좀 돌리고 있는데 눈 앞에서 파리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고 있다. 아차 하는 순간에 기차를 놓친 것이었다. 우리나라 KTX도 그렇고, 프랑스의 초고속열차 TGV도 정말 정확하게 출발하기 때문에 출발 5분 전에 착석하고 있어야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몸은 떠나야 했지만 마음은 아직 갈 준비가 안 된 것일까. 오전에 너무 많은 것을 하느라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다행히 다음 기차표를 살 수 있어서 비행기 출발 시간에 맞춰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천행 비행기에 올라타 좌석을 찾아 앉았다. 숨을 돌리고 있는 사이 비행기는 이륙했다. 눈을 감았다. 방금 본 지중해 바다가 반짝이고 있었다. 테라스에 서 있는 조각상이 말하는 것 같았다.
‘ 언젠가 다시 오게 될 거야! ‘
< 에필로그> 남프랑스는 늘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맑은 바람과 햇살, 지중해의 푸른 바다, 맛있는 음식과 멋진 풍광으로 가득한 곳이다. 햇살 아래에서 모든 것이 선명하다. 예술가들이 왜 그곳을 사랑했는지 이해가 간다. 코로나 19가 갑자기 지구촌을 덮친 탓에 예전처럼 마음 놓고 여행을 다시 할 수 있는 날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다. 지난날은 모두 아름답다고 했다. 여행 다녀온 지 한참이 지나 사진들을 꺼내 보며 글을 쓰면서 새삼 그 말이 다가온다. 운전하고 요리하고 검색하고 말동무를 해 주면서 여행을 함께 해 준 C, 파리의 화가 B, 엑상 프로방스에서 따스하게 맞아준 K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