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즘 건축이 보여주는 황망한 미래적 풍경
코로나 19가 장기화된 팬데믹 시절에 정신 건강하게 버티려면 자신만의 방법들을 터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넷플릭스와 같은 OTT 서비스를 통해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접하며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낸다. 나 역시 그렇다. 드라마 몰아보기, 좋아하는 영화 다시 보기를 하며 콘텐츠의 바다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무조건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보다 주제를 하나 선택해서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건축가 겸 칼럼니스트인 사만다 피레스가 온라인 매체 'My Modern Met'에 쓴 칼럼에서 건축가들과 건축에 흥미를 지닌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영화들을 추천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비롯해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테리 길러엄 감독의 브라질(1985),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Her, 2013),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2010), 워쇼스키의 매트릭스(1999,2003) 등을 꼽았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영화들을 건축(建築)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리바이벌 붐을 타고 재개봉 한 매트릭스를 시간 내어 몰아보면 좋을 것 같다. 이 가운데 내가 안 본 영화도 꽤 있었는데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그중 하나였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SF 영화의 전설로 불리는 '블레이드 러너'의 후편으로 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7년 작품이다. 넷플릭스에서 오리지널과 후편 모두 볼 수 있다.
블레이드 러너 2049 (2017)
시놉시스 :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년) 오리지널의 시대 배경은 2019년이었다. 개봉 당시보다 37년 지난 시간으로 언제나 그때가 될까 했을 테지만 현재 우리는 2021년을 살고 있으며 이 마저도 이제 곧 과거가 될 것이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오리지널에서 30년이 지난 시점에 벌어지는 일이다. LA 경찰 소속으로 예전에 오리지널 시기 만들어진 1세대 복제인간(리플리컨트)을 색출하는 블레이드 러너 경관 K (Ryan Gosling)가 주인공이다. 영화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디스토피아적인 LA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경관 K는 명령에 순수하게 복종하는 2세대 리플리컨트이다. 주인공은 기억 속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어린 시절의 장면의 실체가 늘 궁금했다. 심어진 것인가, 실제 기억인가.
어느 날 K는 지시를 받은 대로 1세대 불량 리플리컨트를 처치한다. 그리고 리필리컨트가 숨어 살던 주거지 마당에 심어진 나무 아래에서 뼈 상자를 발견한다. 다른 리플리컨트의 골반뼈였는데 놀랍게도 출산의 흔적을 갖고 있었다. 리필리컨트끼리는 자식을 낳을 수 없으니, 이 죽은 리플리컨트는 인간과 관계하고 출산했다는 얘기다. 인간과 리플리컨트 사이에서 난 아기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이고,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고민하기 시작하던 K는 기억 속의 장면에 나타나는 장소에서 실제 나무로 깎은 목마를 찾아낸다. 기억은 사실이 되고 자신이 인간과 리플리컨트 사이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경관 K는 출생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Richard Deckard (Harrison Ford)를 찾기 위한 탐색을 시작한다...
디스토피아적인 영화의 분위기를 더욱 강하게 살려주는 배경은 브루탈리즘 건축을 떠올리게 한다. 브루탈 brutal이란 '짐승같은' '조악하고 폭력적인'을 의미한다. 르 코르뷔지에가 사용한 프랑스어 생 콘크리트 béton brut에서 유래한 브루탈리즘 건축은 콘크리트와 시멘트 같은 건축 재료의 질감을 그대로 외관에 노출시키는 조형 방법 혹은 스타일을 가리킨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전반에 영국에서 시도되고 1970년대까지 유행했된 건축 양식이다. 한때 프랑스, 일본 등지에서 유행하긴 했으나 이내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건축 재료를 그대로 노출하다 보니 산성비로 인한 풍화작용으로 외관에 심각한 손상이 일어나고 습기로 인해 건물에 이끼와 얼룩이 생기기 쉬웠다. 비인간적이다, 차갑다, 괴물 같다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떠나고 슬럼화 되면서 도시의 흉물 취급을 받았다.
브루탈리즘은 거칠고 추함의 건축물의 외형적 특성 때문에 실패한 조형 사조로 거론되곤 한다. 하지만 건축사적으로 생성과 소멸을 짚어보면 무의미하지 않다. 브루탈리즘은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하며 합목적성을 강조했던 르 코르뷔지에가 주창한 기능주의 건축에서 비롯됐다. 건축이 조형성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데에 반감을 가진 제임스 스털링(1926~1992,1981년 프리츠커상 수상자)과 몇몇 런던 AA 스쿨 교수 건축가들이 기능주의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건축물의 구조적인 기능을 이루는 보, 내력 벽체, 재료의 질감인 노출 콘크리트를 그대로 외관에 노출시키는 조형 방법을 구사했다. 영국 런던 북서쪽에 위치한 알렉산더 로드 아파트는 건축공무원을 지낸 네이브 브라운이 디자인한 것으로 브루탈리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 브루탈리즘 건축은 거칠고 추한 건축물의 외면 때문에 실패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현대건축이 찬란하게 발전하고 문화적으로 중요한 입지를 얻게 되는 초석이 됐다는 점에서 브루탈리즘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영국 사람들이 참으로 문화를 이해하고 놀라운 점은 추한 존재가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것들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는 점, 거칠고 추하지만 그것도 도시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밉다고 그 건축물들을 부수지 않고 오히려 도시 문화재로 지정하고, 그것을 잘 살려 현대 도시이지만 역사가 살아있는 도시, 다양성이 존재하는 도시를 지켜나가는 점은 배워야 할 부분이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와서.. 영화에서는 삭막하고 비인간적인 브루탈리즘 건축의 외형적인 특징을 극대화시켰다. 인간성이 상실된 암울한 미래 삶을 보여주는 영화의 분위기를 건축적으로 훌륭하게 살려 준다.
1982년 오리지널 '블레이드 러너'는 시대적 배경이 2019년이었다. 그로부터 30년 뒤인 2049년이 블레이드 러너 후편의 시간이다. 해리슨 포드가 후반에 나오는데 35년이 지나서 배우가 그 역할을 한다는 것도 재미있다. 1편에서는 일본어가 등장하지만 2편에서는 폐허가 된 건물 창에 한글이 적혀있는 것이 특이하다. 디스토피아와 한국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