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나미술관, 2월 25일~5월 23일
무심코 흘러가는 시간은 정말 야속하다. 시간이 쌓여 갈수록 더 그렇게 느껴진다. 아주 오래전 우리의 먼 조상인 태초의 인류도 흘러가는 날들을 보면서 같은 마음이었을까.
해가 뜨고 하루가 시작되면 생존을 위해 사냥이든, 채집이든, 이동이든 무언가를 하고 해가 지고 달이 뜨면 잠을 자는 그런 반복되는 날들을 보내면서 무슨 느낌이 들었을까. 누군가는 얼마나 태양을 보았는지, 혹은 얼마나 많은 달을 보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달의 모양이 매일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규칙성을 발견하고 흘러가는 날들을 표시를 하기 위해 작대기에 눈금을 새기거나 바위에 금을 그었다. 수학자 알렉스 벨로스가 지은 ‘수학이 좋아지는 수학’ (해나무 펴냄)에는 ‘인류가 가장 먼저 센 것은 시간’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시간은 인류와 함께 생겨난 것이고, 그것을 기록하는 방법이 진화했다. 인류는 시간을 지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인류와 시간의 싸움은 늘 시간의 승리로 끝났다.
예술가들에게 시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창의력을 자극하는 흥미 있는 주제였다. 화가 유근택은 ‘시간의 피부, Layered Time’라는 주제로 사비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2017년 이후 4년 만에 갖는 전시다. 동양화 재료를 사용해 일상을 낯선 장면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선보여 온 그는 이번 전시에서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소소한 사건, 존재하는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현상을 포착해 시공간을 압축한 듯한 형태로 한 화면에 담아낸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 초 우리를 덮치고 , 일상을 빼앗아간 코로나 19는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멈춘 듯 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 시간의 피부를 접했던 것 같다. 평범했던 일상에서 마주한 비일상적인 사건들, 예컨대 남북정상회담과 코로나 19의 확산에 따른 팬데믹의 경험 등을 작가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독특한 시각으로 작품에 반영한다.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자 우리의 경험이었던 이러한 비현실적인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내는 시공간 속에서의 삶이 56여 점의 작품에 담겨있다.
작가는 4년 전 전시에서 선보였던 물성을 극대화했던 작업방식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작품에 섬세한 디테일을 더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현장에서 먹과 붓으로 빠르게 드로잉 한 풍경을 기초 삼아 드넓은 캔버스에 시간을 겹겹이 쌓아가는 방식이다.
여섯 겹으로 배접 된 한지 위에 철솔로 젖은 종이의 결을 일으켜 호분을 바르고 나무와 같은 딱딱한 물질로 드로잉 한다. 종이가 마르기 전까지 요철을 만들어내기를 반복하며 화면의 거친 질감의 깊이를 더해주며 시간과 공간을 담는다. 이 같은 작업으로 평면의 캔버스에는 주글주글 골이 파이고 입체감이 나타난다. 유근택 작가가 보여주는 시간의 피부다. 시간의 피부도 사람의 피부와 마찬가지로 진피와 내피와 외피가 있다.
“회화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여러 레이어가 화면 안에 압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영상, 영화와는 다르게 양파껍질처럼 벗겨낼 때마다 또 다른 언어가 탄생하고 시간과 공간, 나의 심리, 사회적, 시대적 중층이 화면 안에 쌓여있기 때문이다. 나의 작업은 질문을 확장시켜 나아가는 과정이다. 나의 작업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시간을 살고 있는 내 몸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 유근택 인터뷰 중
이번 전시에 출품된 신작에서는 정물, 인물, 풍경 등으로 다양한 소재를 확인할 수 있다. 작품 '어떤 만찬'은 마치 '바니타스 정물화'를 보는 느낌이다. 라틴어 ‘바니타스(vanitas)’는 허무, 무상을 뜻한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정물화에서 이 주제를 즐겨 다뤘다. 캔버스에 해골을 그려 놓으면서 당신도 곧 이렇게 될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그림을 ‘바니타스 정물화’라고 한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고 인간은 죽음 앞에 무력하니 각자 알아서 잘 살라는 교훈적인 그림이다.
만찬을 벌인 사람은 오간데 없이 테이블 위에는 먼지가 세월의 흔적처럼 쌓여 화석처럼 굳어진 사물들만 즐비하다.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 같다. 캔버스 속에 말없이 켜켜이 쌓인 시간의 무심함에 문득 쓸쓸함이 밀려온다. 무언가 해야할 것 같은, 이대로 시간을 보내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전시는 5월 23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