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전시] 리히터 '4900가지 색채'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 2021.3.12-7.18

by 아트노마드 함혜리

게르하르트 리히터 ‘4900가지 색채’ 전

독일 드레스덴 출신의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는 이 시대의 매우 중요한 예술가 중의 한 명이다. 2014년 스위스 바젤에 있는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에 갔을 때 마침 리히터 회고전이 열리고 있어서 그의 작품 전반을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 작품의 주제와 표현방식이 다양해서 놀랐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짙은 회색톤에 촛불을 그린 작품들, 그리고 밝은 톤의 색채를 사용한 추상화, 그리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초상화 작품들이 소개됐다. 전시회 포스터에 소개됐던 리히터의 딸 베티의 초상도 이 시리즈 중 하나였다. ‘베티’라는 제목의 1988년 작으로 사진을 기반을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것인데 붉은 꽃무늬 스웨터를 입을 베티가 고개를 돌린 채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포토 페인팅 기법의 작품으로 1967년 ‘루디 삼촌’에서 시작한다. 나치 친위대였던 삼촌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사진의 흔들림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지각을 흔든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짙은 회색톤으로 역사와 상실성을 다루고 있다.

회고전에 소개된 작품들 중 유달리 튀는 작품군이 있었다. ‘이게 같은 화가의 작품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정도로 컬러풀한 색채판 작품이었다. 우울하고 모호한 작품 일변도였던 그가 왜 ‘갑자기’ 이런 튀는 작품을 했는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의아하기만 했지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다. 단지 ‘리히터는 참 열심히, 다양한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가는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에스 파스 루이 비통 서울( 압구정로 454)에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 전시를 보면서 작가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리히터는 2007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훼손된 독일 쾰른 대성당 남쪽 측랑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디자인 작업을 의뢰받는다. 그는 중세 시대에 세워진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쓰인 72가지의 색채를 표현한 1만 1500장의 수공예 유리조각으로 창을 가득 메웠다. 자유로운 색상 배치는 특별히 개발된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했고 이처럼 예술가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 객관적인 조건에 의한 우연성에 그는 매우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이 같은 작업 방식은 스테인드 글라스 작업과 동시에 작업한 ‘4900가지 색채’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4900가지 색채’는 정사각형의 색채 패널 196개를 여러 사이즈의 작은 격자판으로 조합한 것부터 하나의 대형 패널로 완성한 작업까지 11가지 버전으로 구성된다. 이번 전시에 국내에 처음 공개하는 작품은 아홉 번째 버전으로 436.5 ×436.5㎝ 크기의 플레이트 2개와 242.5 ×242.5㎝,145.5 ×142.5㎝ 패널 등 정사각형 플레이트 4점이다. 점묘파 화가의 작품을 확대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오색 조각보 같기도 하다.

리히터는 1966년 산업용 페인트 색상표를 대규모로 확대 재현한 색채판 그림을 선보였다. 색상에 대한 고찰의 핵심인 산업용 페인트 색채 견본 집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어 제작한 것이었다. 색채 견본 집은 색상별로 주문할 수 있도록 번호가 매겨져 있다. 이렇다 할 구조나 구성이 없이 단지 보여주고 주문받는 것만을 위한 색채 견본 집이 빚어내는 완벽한 조화로움과 정확성에 주목했다. ‘4900가지 색채’는 색상에 대한 초기 연구를 이어가는 대작인 셈이다. 컴퓨터의 무작위 추출기술로 배열한 쾰른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가 정결한 아름다움을 보여준 것처럼 색채는 우연성과 객관성을 지닐 때 색다른 감동을 우리에게 안겨준다는 것을 리히터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럼 작가는 뭘 한다는 거냐는 질문이 나올 법하다. 현대미술에서 작가의 역할은 단지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것을 벗어나 기획자로 확장됐다. 작품의 콘셉트부터 표현 방법론, 재료의 선택까지를 아우른다. 리히터의 작가적 역량을 의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를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또 있다. 기교를 잔뜩 부렸으나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존재하는 것이 훨씬 정직하며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전시된 작품수로 보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생각거리를 많이 안겨주는 작품들이니 숫자가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세계적 스타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 건물 구경은 덤으로 주어지는 전시는 무료이며 사전 예약을 하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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