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립도서관 '우주로 1216'
'어린이'었던 때 어린이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린이 날이 그저 그런 공휴일로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즈음부터 세상사가 마냥 즐겁지만도 않았다. 여러 가지 궁금한 것도 생기고 나만의 일기장에 '비밀'도 적기 시작했던 것 같다. 방에 틀어박혀 온 세상 고민을 다 끌어안을 것처럼 이유 없이 짜증을 부리는 '어른이'로 한동안 살았다. 생의 중대 전환기를 지혜롭게 이끌어줄 사람이, 혹은 같은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친구와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면 나의 삶은 좀 더 창의적이고 도전적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본다.
어린이도 아니고, 청년도 아닌 애매한 나이에 갈 곳은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진대, 우리 사회는 지금껏 그 나이 또래에 무관심하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중2병'이라고만 하고 어떻게든 이 시기만 지나면 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전주시립도서관 3층에 있는 '우주로 1216'이 한가지 해법이 될 듯 하다.
건축가들은 사용자의 생활을 관찰하고 요구를 파악한 뒤 자연과 역사, 도시적 맥락을 고려해 공간을 디자인한다. 때로 사용자들을 적극적으로 디자인 기획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전주시립도서관 3층에 조성된 국내 최초의 트윈세대 전용 공간 ‘우주로 1216’의 경우다. ‘트윈(tween)’은 10대(teenager)와 사이(between)의 합성어로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생의 연령대를 가리킨다. 공간 구축을 맡았던 이유에스플러스건축의 공동대표 서민우·지정우 건축가를 만나 참여 설계를 기반으로 한 우주로 1216의 설계과정을 들어봤다.
‘우주로 1216’은 도서관 건물에 자리 잡았지만 조용하게 앉아서 책을 읽는 도서관과는 완전 딴 판이다. 맘껏 떠들고 쿵쿵 거리며 친구들과 뛰어다녀도 된다. 친구들과 몸을 던져 놀기도 하고 다락방 같은 곳에서는 책을 읽다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인다. 혼자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아이도 있고 테이블에서는 초등학교 고학년생 둘이서 3D 펜슬로 자동차를 만들고 있다. 친구들과 블록 쌓기를 하기도 하고 혼자 소파에 앉아 독서 중인 아이도 있다. 어떤 아이는 책을 보다가 철봉을 타고 넘기도 한다. 녹음실에서는 친구들과 목청을 높여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선생님에게 뜨개질 수업을 받는 아이들도 있다. 형님뻘 되어 보이는 아이들은 그물망 위의 아지트에서, 언니뻘 되는 아이들은 창가에 마련된 바 테이블에서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중이다. 다양한 디자인의 가구와 설치물을 이용해 자유롭게 놀고, 만들고, 얘기하고, 그러다 지치면 책을 본다. 종잡을 수 없는 공간이지만 아무튼 다들 즐겁다.
트윈세대는 나이로 치면 12세에서 16세, 초등학교 5학년에서 중학교 3학년의 아이들이다. 어느 정도 자기 의견이 서고 취향이 생기는 중요한 시기다.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거의 없다. 중요도에 비해 그들을 위한 공간 자원은 마련돼 있지 않다.
“트윈세대는 어린이의 세계에서 청소년의 세계로 건너가는 전환점에 선 나이입니다. 다양한 영역에 호기심이 생기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지만 집과 학교 공간은 그 요구를 채워주지 못하지요. 학교는 천편일률적이고 집도 아파트나 빌라여서 구조가 단순합니다. 도서관은 너무 딱딱하고요. 키즈카페와 입시학원 사이에서 안전한 탐험 공간과도 같은 곳을 마련해 주고 싶었습니다.” (지정우)
트윈세대 아이들에 관심을 갖고 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자는 제안은 도서관의 새로운 모델을 고민하고 준비하는 책읽는사회문화재단, 도서문화재단씨앗에서 비롯됐다. 첫 사업으로 전주시립도서관 1개 층 전체를 트윈세대의 전용공간으로 구축하기 하고 벤처 1세대의 기금으로 운영되는 C프로그램이 프로젝트 기획과 진행을 맡아 ‘스페이스 T’ 프로젝트가 2019년 1월 출범했다. 콘텐츠 기획은 진저티프로젝트가 맡았고 어린이박물관과 학교 등의 디자인 경험이 축적된 이유에스플러스 건축은 물리적 공간의 구축을 맡게 됐다. 두 건축가의 접근방법은 시작부터 달랐다. 아이들에게 ‘주말에 가는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가 있나요?’‘그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가요?’와 같은 질문들이 담긴 ‘트윈 공간 노트’를 나눠주고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했다.
“원하는 것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것뿐 아니라 아이들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아이디어를 단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전주시라는 도시적 맥락에서 트윈세대의 일상이 어떤지, 아이들이 주로 가는 곳,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간 등은 어떤 곳인지 알기 위해 글을 써보도록 했습니다. ” (서민우)
“처음부터 어떤 구상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트윈세대 공간은 국내에서 처음 만들어지는 것인 데다 공간을 새로 짓는 것도 아니었죠. 층고는 똑같고 옆으로 기다란 평면적인 공간을 어떻게 입체적으로 구상할지 처음엔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디자인 워크숍으로 만나면서 이들의 생각을 알아가는 것이 디자인 과정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 (지정우)
낀 세대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과의 우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집과 학교 외에 가장 마음 편하게, 자주 가는 곳이 고작 편의점이었다. 돈이 좀 있다면 모아서 친구들이 함께 노래방에 가서 발산하는 정도였다.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은 제한적이었지만 원하는 공간은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무언가를 꼭 해야 하는 의무감이 없는 공간, 친구네 집같이 편안하면서도 자유로운 공간, 공부 말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자신들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다고 자부심을 가져서인지 생각을 촘촘하게 얘기하고, 이 공간에서 갖게 될 감성과 느낌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었습니다. 트윈 공간 노트를 해부하면서 공간 설계 초기에 전주라는 지역특성을 살린 ‘길’을 디자인 콘셉트로 도출할 수 있었고 다른 분야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공간 개념을 구체화시켰습니다.”(지정우)
우주로 1216은 박공형 구조물이 설치된 길 ‘트윈가로’를 중심으로 네 개의 공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조다. 4개의 구역은 구획을 짓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트윈세대 아이들의 다양한 에너지 레벨과 생각, 감성과 의지를 수용한 공간들이다. 각 구역은 조금씩 다른 재료와 분위기를 갖는다. 아이들이 각기 다양한 관심사와 삶의 방식, 그날의 감정에 따라 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넓고 깊게 확장시켜 나가도록 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안내 데스크를 거쳐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소통을 위한 ‘톡톡 존’이다. 그다음은 ‘쿵쿵 존’이다. 공연을 하거나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무대가 설치돼 있고 바닥에는 우주선이 안착한 것 같은 고무 재질의 구조물이 놓여있다. 사내아이들은 여기에 몸을 던지며 논다. 천정에는 각이 진 철봉이 나란히 박혀 있다. 아이들은 뛰고 뒹굴고 매달리면서 에너지를 발산한다. ‘슥슥존’은 무엇이든 만들어보며 창의력을 발휘하는 공간이다. 종이, 물감, 실 등 창작을 위한 모든 재료는 무료로 제공된다. 편안한 의자가 군데군데 놓여있는 곳은 사색의 공간 ‘곰곰 존’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독서와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구석진 곳에는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책상도 마련돼 있다. 벽장 뒤에는 비밀 공간도 있다.
“ 학교든, 놀이터든 디자인을 할 때 자칫 범하기 쉬운 오류가 있는데 그건 어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이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이렇게 하면 아이들에게 더 좋지 않을까? 하면서 디자인을 합니다. 이용자인 아이들 기준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어른들의 기준으로 정해주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잘 알아서 이용하거든요.”(서민우)
우주로 1216에서 아이들은 유별난 ‘우주인’이 된다. ‘우주’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트윈세대들에게 길잡이가 되는 우주정거장 같은 역할을 하는 안내 데스크는 ‘지구인 출몰지역’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전주시립도서관 사서들은 이곳에서 ‘지구인’의 역할을 맡아 우주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에만 등장한다.
코넬대 선후배 사이인 지정우·서민우 건축가는 비슷한 또래의 트윈세대 아이들을 두었다. 집에서 아이들과 소통할 때의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됐다는 그들은 건축가인 동시에 아빠의 마음으로 아이들의 속내를 들여다봤다고 했다.
“ 우리가 공간을 디자인하기는 했지만 아이들이 실제 이용하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건축 설계의 완성은 사람이 한다고 하는데 이 공간 역시 아이들이 완성해 주고 있어요. 아이들은 누가 무얼 하라고 지시하거나 참견하지 않아도 이곳에 와서 그날의 기분에 맞게 좋아하는 공간을 찾아가서 원하는 것을 합니다. 이처럼 자발적으로 공간을 이용해 본 아이들이 점점 많아졌을 때 우리 사회도 바뀌어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서민우)
“‘우주로 1216’이 트윈세대에게 인생이라는 너른 우주로의 창의적인 탐험을 위한 정거장의 역할을 하기를 바랍니다. 이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이들은 자연스레 크리에이터가 됩니다. 이곳을 경험한 아이들이 자라서 20대. 30대가 됐을 때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지정우)
‘우주로 1216’은 지난해 문화관광체육부 주최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대상(대통령상)과 국토교통부 주최 ’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최우수상(국토교통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이곳을 찾았던 날 전주에는 봄비가 제법 내렸고 나무들은 봄비 속에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곳에서 뛰어노는 트윈세대 아이들의 푸른 꿈도 쑥쑥 자라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