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남구 양림동 이이남 스튜디오
디자인 감각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활하는 환경에서 체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건축과 공간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유럽 사람들의 감각을 아무리 해도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게 있다. 수백 년 된 아름다운 건축물에 둘러싸여 자란 사람과 개성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색감과 공간 디자인에 대한 차이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보면 디자인 개념 없이 용도만 생각하고 지은 건물들이 참으로 많다. 성냥갑을 세워 놓은 듯한 아파트 숲을 비롯해 도시를 가득 메운 개성 없는 건물들, 주거지 골목을 차지하고 있는 똑같은 모양의 다세대 주택들.. 그리고 시 외곽의 창고들.. 우리의 도시는 어디를 가나 똑같고 , 어디를 가나 지루하다.
디자인이고 멋이고 생각할 겨를도 여유도 없었던 시절에 지어진 건축물들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리모델링이 주목받고 있다. 주먹구구식으로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라 건축적 상상력을 가미해 제대로 해 보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 숨을 쉬는 것처럼 건축물도 숨을 쉬어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이 드나들고 빛과 바람이 통하는 건물은 살아있는 건물이다. 반대로 빛과 바람이 드나들지 못하면 죽은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사방이 꽉 막힌 창고가 대표적이다. 코로나 19 와중인 지난해 11월 광주시 양림동에 문을 연 ‘이이남 스튜디오’는 빛과 공기를 불어넣어 새 생명을 얻은 건축물이다. 기능을 다하고 몇 년째 비어있던 제약회사 창고 건물이 최첨단 미디어아트를 감상할 수 있는 멋진 핫플레이스로 바뀌면서 건물뿐 아니라 근대문화유산이 밀집한 양림동에도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죽은 건물이 숨을 쉬도록 숨통을 튀워준 건축가 박태홍(건축연구소. 유토 대표)을 만나 리모델링의 비법을 들어봤다.
광주를 거점으로 작업하는 이이남 작가는 미디어아트 분야에서 일종의 브랜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동서양의 고전 명화에 디지털 기법을 가미해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을 이어주는 그의 작품은 익숙함과 낯 섬의 묘한 충돌과 함께 신선한 예술적 감동을 안겨준다. ‘이이남 스튜디오’는 상생과 공존을 키워드로 작업해 온 작가가 대중들과 좀 더 가까이에서 소통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60,70년대 지어진 나지막한 주택들이 오르막 길에 비좁게 어깨를 맞대고 옹기종기 들어선 양림동 주거 지역의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광주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사택 등 근대문화유산 등으로 광주광역시가 역사문화마을로 지정한 양림동은 최근 들어 레트로 감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맛집과 카페가 늘어나면서 주목받고 있지만 오랫동안 낙후되어 있었다. 몇 년째 비어있는 창고 건물은 낙후함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이남 작가는 작업실과 전시 공간을 가진 스튜디오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양림동의 창고 건물을 매입했다. 어떻게든 활용해 보려고 했지만 성에 차지 않아 몇 차례 착오를 거친 뒤 제대로 리모델링하기 위해 건축가를 찾던 중 지인의 소개로 박 대표를 만났다.
박 대표는 “리모델링 작업은 처음이었고, 기존 건물은 도면도 없어서 그 안의 구조가 어떤지도 알 수 없는 등 여러 가지로 자유롭지 못했지만 완전히 다른 것을 만들어 내야 하는 작업이라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라고 말했다.
“원래의 건물이 약품상자, 즉 무생물을 위한 공간이었던 반면 새로 들어설 이이남 스튜디오는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리모델링은 발주자 입장에서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어 좋을지 모르지만 건축가에게는 신축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그 자체로도 어렵고, 용도가 상반될 때에는 어려움이 배가 되지요.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카페를 만들고, 살아있는 작가의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극적인 반전을 만들어 내야 했습니다. ”
건물은 몇 년째 죽어있는 공간이다. 무생물이 점유하는 공간은 그저 넓기만 할 뿐 채광도 환기도 부족하다. 그런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도전 과제였다.
무생물과 생물의 차이를 어떻게 바꿔 낼 것인지, 살아있는 작가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부터 고민해야 했다. 그는 건물에 빛과 공기를 들여놓는 것으로 해법을 찾았다. 기존 건물의 드라이비트 외벽을 뜯어내고, 골격은 살리되 벽에는 창문을 내고, 슬라브 천정을 뚫어 두 개의 구멍을 내는 대수선이었다. 박 대표는 “천정을 뚫는다는 것은 사실 대범한 수선 방식인데 이이남 작가가 다행히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 준 덕분에 죽은 건물에 숨통을 터주는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방문객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에는 이이남 작가의 작품 ‘다시 태어나는 빛-피에타’가 설치된 나선형 계단이 빠지지 않는다. 건물 천장에 낸 두 개의 구멍 중 하나가 변신한 것이다.
“1층의 카페와 2층 카페를 연결하는 주동선으로 열린 흐름을 만들어 내고 싶었습니다. 두 개 층을 관통하는 나선형 계단을 만들어 각 층의 동선을 연결하고 천정과 사방 벽을 뚫어 낮에는 외부의 빛을 들이고, 밤에는 내부의 빛이 외부로 번지는 공간을 구성했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자연광이 공간 전체에 퍼지고 피에타의 성모상 얼굴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설계 초기부터 이이남 작가의 작품에 맞춰 계획된 나선 계단 공간은 건축과 조각의 협업인 셈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차용해 만든 이이남 작가의 작품으로 아래층에는 성모상이, 2층에는 성모의 품을 떠난 예수가 걸려있어 밤에 조명을 받으면 공중에 예수가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선형 계단은 원형 동선을 따라 움직이면 내부와 외부, 근경과 원경 등을 번갈아 인식할 수 있는 건축적 산책로로서 작동한다.
다른 하나의 숨통은 전시 공간이 위치한 건물 중앙에 뚫었다. 전시구역의 중앙에 원통형 공간인 로툰다를 배치해 실내에서도 외부환경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공간을 왜 쓸데없이 낭비하느냐고 시공사에서도 반대했지만 작가가 원하는 대중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디자인적 파격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면 가운데 천창으로 하늘이 보이고 그 주변으로 원형으로 만들어진 서가가 보인다. 원형으로 만들어진 2층 서가는 학구열 높은 이이남 작가가 소장한 자료와 서적들로 채워져 있다. 그 뒤편에 작가의 작업실이 위치해 있다. 박 대표는 이이남 작가의 작업실 한쪽 벽에 큰 창을 내어 외부의 경치를 들여놓았다.
“작업실에선 현재 진행형으로 작업이 진행되고, 카페와 기획전시장에선 완성된 작품을 보여주도록 했습니다. 소통이란 단순한 채광이나 환기뿐 아니라 환경과의 소통, 혹은 작가와 관람객과의 소통까지 포함하거든요. 관람객들은 이 공간을 통해 작가의 결과물뿐 아니라 작가가 거주하고 작업하는 공간을 느끼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시야가 탁 트인 옥상 공간이 있는 2층 건물은 깔끔하고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유리로 투명하게 처리된 1층에는 카페와 전시 공간이 위치하고 2층에는 카페와 이이남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조각부터 미디어 아트까지 이이남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카페와 전시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물 흐르듯 자유로운 동선이 만들어져 건물은 살아있는 것 같다.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마당에 사열하듯 나란히 서 있는 오래된 향나무들은 분명히 알고 있을 테지만 리모델링 전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건물의 기조가 되는 색은 백색이지만 단조롭지 않고 생동감이 느껴진다. 정면 파사드를 불투명, 투명, 반투명 등 세 가지 물성의 대비로 구성해 건축물에 변화와 리듬감을 준 결과다.
“전면의 가장 큰 부분은 불투명으로 처리해 미디어 파사드로 활용하도록 했습니다. 극장의 간판 같은 역할이 되겠지요. 자칫 딱딱해 보일 수 있는 건물에 이이남 작가의 미디어 작품을 보여주면서 활기를 불어넣는 요소로 작동하게 됩니다.”
미디어 파사드의 불투명하고 플랫 한 면을 중심으로 관람객의 시선 높이인 하단과 상단은 투명한 통유리로 돼 있다. 유리를 통해 보이는 미디어아트 작품과 관람객의 움직임이 건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저녁 무렵에는 내부의 프로젝션 화면에 투사되는 작품이 마치 야외극장처럼 보인다. 건물 2층은 파이프들로 구성된 반투명한 면을 만들어 불투명한 파사드와 대비를 이루도록 했다. 건물 본체에서 뻗어 나와 뒤집힌 ‘ㄷ’ 자 모양의 관문(웰커밍 매스)이 자연스럽게 전면 마당으로 이어진다. 박 대표는 “웰커밍 매스는 건물 본체와는 달리 이용자의 접촉 범위에 있는 만큼 연한 회색의 벽돌을 사용했다”면서 “선교사 사택에 쓰인 벽돌과 비슷한 질감과 색상을 가지고 있어 그 흔적을 재현하는 의미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어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광주광역시에도 개발 열풍이 불어 고층 아파트가 곳곳에 들어서고 있지만 경사지에 위치한 양림 오거리 일대의 주민 주거 지역은 시행자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오르막 끝, 트럭들이 좁은 골목을 드나들며 약품을 실어 나르던 창고는 용도를 다한 뒤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박 대표는 “현대 도시의 주요 과제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 테렌 바그(무기능 상태로 방치된 공간·terrain vague) 현상”이라면서 “이이남 스튜디오의 경우 비어있던 제약회사의 창고가 문화예술을 위한 장소로 거듭나면서 양림동의 미래나 예술의 대중화를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찾아오고 건물은 생기를 찾았다. 카페의 2층과 연결되는 정원의 꽃사과나무(?)에도 예쁜 꽃이 발그레 피어있었다.
* 이 글은 서울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건축 오디세이를 위해 쓴 것입니다. 지면 관계로 못다 한 이야기와 사진 등을 추가해 브런치에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