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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Jul 11. 2021

건축 탐구] 순교의 역사를 넘어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

땅이 지닌 상징성을 품고 아픈 역사를 추모하는 공간

특별한 장소를 기억하는 방법은 그 장소가 지닌 역사적 의미에 따라 달라진다. 88 올림픽처럼 우리 역사에서 오래도록 자부심을 갖고 축하해야 할 곳에는 웅장한 상징물을 세우기도 하지만 위무해야 할 장소에는 추모비나 위령비를 세운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당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라면 어떤 공간이어야 할까. 한국 천주교의 성지 중 성지에 조성된 서울 서소문 역사공원에 지난 2019년 6월 개관한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은 땅이 지닌 역사성과 상징성을 은유적으로 풀어내면서 아픈 역사를 추모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도심의 대로에서 살짝 비켜 간 곳에, 그것도 도심의 자그마한 공원 지하에 들어앉아 있어서 사전 정보가 없으면 지나치기 쉽지만 엄청난 공간의 아우라를 지닌 곳이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이다. 이곳의 설계를 맡았던 윤승현 교수(중앙대 건축공학과)와 이규상 건축가(보이드 아키텍츠)를 만나 이곳의 의미를 짚어봤다.

붉은 벽돌로 된 벽이 사방을 둘러싼 매우 이국적인 풍경을 보면 ‘이런 공간이 서울 어디에 있었지?’라고 반문할 정도로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한국 천주교인들에게는 성지 중의 성지로 꼽히지만 워낙 눈에 띄지 않는 장소였고, 박물관은 개관 6개월 만에 코로나19가 창궐하는 바람에 문을 닫아야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윤 교수는 “천주교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폭력성과 시대적 편협성에 반하는 항거의 상징적 장소임에도 지금껏 이 같은 역사성과 장소성의 의미를 내포한 특별한 장소적 가치를 간과한 채 방치되고 있었다”면서 “숱한 애환이 서린 이 땅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담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했다.”라고 말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돈의문과 숭례문 사이에 소의문(昭義門)이 있었다. 도성 축조와 함께 1396년 건립되었다가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된 소의문의 다른 이름은 서소문. 한양의 4개 소문(小門) 가운데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강화군과 인천군으로 통하는 관문인 이 문은 도성 안의 시신을 밖으로 내갈 수 있는 ‘시구문’이기도 했다. 또 서소문 밖 네거리는  한강의 지천인 만초천(蔓草川·욱천이라고도 함)을 따라 일찍이 상권이 형성된 까닭에 늘 사람들로 북적이던 대중적 장소였다. 이곳이 조선 중기 이후 300여 년 동안 국사범들의 처형장으로 쓰였던 이유다. 사람들에게 처형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었던 이곳에서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천주교인이 신앙과 신념을 위해 순교했다. 그 숫자가 수만 명은 족히 될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장소는 1973년 서소문 근린공원 지정됐지만 경의선 철로와 서소문 고가 등으로 지역과 단절된 채 외딴섬처럼 버려졌다. 1996년 근린공원 지하에 중구의 재활용 쓰레기 처리장과 900여 대의 공영 주차장이 건립되면서 순교자들의 숭고한 신념을 담은 성스러운 장소라는 상징성에서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그늘을 찾아 잠을 청하는 서울역 인근의 노숙인들에 아늑한 휴식의 장소가 되어줄 뿐 시민을 위한 근린공원의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2011년 7월 국유지인 서소문 근린공원 일대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하고 박물관을 짓는 사업을 제안하면서 대역사가 시작됐다. 윤승현·이규상·우준승 팀이 현상설계에서 당선돼 5년간의 험난한 설계와 공사의 기간을 거쳐 2019년 6월 완공됐다.

“가장 공공적인 장소는 그 지역의 역사와 장소가 품은 깊이를 담아내 고유한 분위기로 펼쳐질 때 그 공공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성지로서 이 장소가 전하는 메시지를 충실하게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천주교인들 뿐 아니라 시민 모두에게 가치 있는 장소로 거듭나는 유효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설계를 시작했습니다.”

이규상 건축가의 말이다. 각자의 세계에서 작업하는 3명의 건축가는 장소의 종교적 상징성을 살리되 종교를 초월해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공의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과거와 현재, 기념성과 일상성을 대비하고 조화 시키는 방식으로 디자인을 풀어냈다. 특히 기존 지상에 있던 서소문 근린공원과 재활용 쓰레기 처리장, 지하 4개 층 3만 6000㎡의 공영주차장을 재편해 역사기념공간을 건립하는 작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은 ‘땅 위와 땅 아래’, 즉 지하와 지상의 관계였다.

“과거의 역사는 기억에 남고 현실은 삶으로 지속된다고 하지만 이 두 가지 개념은 별개의 것일 수 없습니다. 땅 위에서 벌어진 상처와 기념은 그 땅 아래로 스며들었고 우리는 그 땅에 기대어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죠..”

윤 교수는 “대지의 위와 아래는 하나로 결속되어야 한다”면서 “지상의 역사성을 담은 공원과 그에 기반한 지하 역사박물관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고, 그들 간의 관계를 켜켜이 싸인 시간의 흐름이 땅 위와 땅 아래를 넘나드는 공간의 흐름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단초가 됐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이 역사적 공간의 답사는 지상의 공원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른 순서다.

서소문 역사공원이라 이름 지어진 공원에는 천주교 박해 때 이곳에서 참수된 순교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현양탑이 서 있다. 순교자 현양탑은 원래 1984년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순교자 중 44명이 시성된 것을 기념해 세워졌다. 이후 서울시의 각종 시설물 설치계획에 따라 부득이 철거했다가 지난 1999년 새로운 순교자 현양탑을 세웠다. 공원에는 과거 처형장의 망나니가 피뭇은 칼을 씻었다고 하는 ‘뚜께 우물터’, 조각가 티머시 슈왈츠의 작품 ‘노숙자 예수 2013’도 설치돼 있다.

추모의 기능과 이 장소가 지닌 의미들을 도시의 일상적 문맥 안으로 들여놓은 공원은 사방이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로 녹색 띠를 이룬다. 도심의 고층빌딩을 배경으로 서 있다. 중앙부는 잘 다듬어진 잔디광장에 지하에서 올라온 3개의 구조물이 서있다. 붉은 벽돌과 거친 느낌의 노출 콘크리트, 내후성 강판의 물성이 각기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 구조물은 지하 공간의 존재감을 알려주는 동시에 지상의 빛을 지하로 끌어들이는 건축적 장치다.

윤 교수는 “원래 이 마당에 33m 높이의 메모리얼 타워를 배치해 자연스럽게 공원의 지반과 하늘과의 관계를 만들면서 작지만 알찬 역사공원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도록 계획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공원을 가로질러 서남쪽 계단에 그나마 2층 높이의 탑이  외부인들에게 공간의 존재를 알리는 표식 역할을 한다. 공원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순교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서있는 박물관 입구가 나온다. 지하의 박물관은 종교적 공간이자 문화적 공간이다. 이 땅의 역사적 기록과 유물들을 전시하는 상설전시관과 기획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다. 공간은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실은 무척 단순한 구조다.

윤 교수는 “기존의 주차장 일부 구조를 활용하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히 주차장 공간의 효율적 측면만으로 고려해 설정된 격자 모듈(가로 7.5 m×세로 8m)이 공간의 기본 그리드가 됐다”면서 “135개의 단위 입방체 그리드가 지하 2층과 3층에 다층적 구조로 연결되면서 끊임없이 증식 및 통합되어가는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각 단위 그리드는 십자 기둥에 의해 독립적 공간이 된다.”고 설명했다.

기해박해(1839년)에 아내, 딸과 함께 순교한 성 정하상(정약용의 셋째 형)을 추모해 만든 성 정하상 기념 경당은 방문자들이 이 장소의 본질적 의미를 체감하도록 만들어졌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완만한 내리막 경사를 따라 경당에 이르게 된다.

경당을 지나 순례길 같은  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어둠이 짙게 드리운 기념 전당 ‘콘솔레이션 홀’에 이른다. 땅 속 14m 깊이에 2m 높이로 떠있는 가로 25m, 세로 25m, 높이 10m의 입방체 튜브는 ‘신념을 다한 위인들’을 위한 기념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 한가운데로 한 줄기 빛이 쏟아진다. 이규상 건축가는 “공원에서부터 내려오는 이 빛은 이 장소에서 사라진 이들의 신념이 여전히 땅 속 깊은 곳에서 영원히 비치는 것을 은유하면서 이 홀 전체가 박물관의 가장 소중한 전시물이 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어둠 속에서 한참을 있다 보니 빛이 그리워진다. 만초천을 상징하는 바닥의 희미한 빛을 따라 가 문을 나서면 드라마틱하게 정방형의 하늘을 품은 광장이 나타난다. 가로·세로 각 33m, 높이 18m의 무표정한 붉은 벽돌이 둘러싸여 자연스럽게 시선을 하늘로 유도하는 하늘 광장이다.

압도적인 스케일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윤 교수는 “과거의 아픔이 하늘과 교우함으로써 영원히 빛나게 되길 기대하는 공간적 장치”라고 설명했다. 누군가에게는 묵상의 공간이 될 하늘 광장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의를 향한 용기와 무한의 자유를 선사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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